# 12
[12화] 한상길의 최후 & 진실 혹은 거짓 (1)
김금자 사건의 경위는 이랬다. 김금자의 남편 박상철은 감당할 수 없는 도박 빚을 해결하기 위해 길상파, 행동대장 망치와 짜고 2년 전부터 아내 김금자 앞으로 5개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박상철은 사망보험금 20억을 타낼 목적으로 그의 아내, 김금자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한 다음. 테트로도톡신을 주입해 살해한 후, 사고사로 위장했다. 또한, 허위 사망신고를 통해 주민등록이 말소된 쌍둥이 형 박상준을 이용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고 그들의 뒤를 봐준 한상길 부장, 나, 아니 김정환 검사의 도움으로 그들의 보험 사기는 완전범죄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장 검의 개입으로 모든 계획이 틀어졌고 결국, 망치는 현장에서 사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박상철은 존속살인 및 보험 사기 등의 죄목으로 구속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망치가 쏜 총알에 팔을 스친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
“선배님 저예요.”
장 검이 문을 열고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한 손에는 파란 장미 한 다발이 들려져 있었다.
“어, 장 검 어서 와.”
“선배님, 몸은 괜찮은 거예요? 저 그날 얼마나 식겁했는데요.”
장 검이 화분에 파란 장미를 꽂아 넣었다.
“우리 어머니가 나는 돌잔치 때 명주실을 잡았다더군.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 봐! 그나저나, 그건 뭐야? 장미 같은데 색깔이 파랗네?”
“예쁘죠?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서 이렇게 파란 장미도 재배할 수 있나 봐요. 신기하죠?”
장 검이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러게, 나도 어디서 들어본 듯하긴 한데 이렇게 직접 본 건 처음이야.”
“선배님, 이 파란 장미 꽃말이 뭔지 아세요?”
장 검이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깜빡거렸다.
“글세…….”
“요즘, 제가 선배님한테 느끼는 감정이에요.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헐, 이 여자가 왜 이러지? 장미 꽃말은 대부분 사랑 뭐 그런 거 아닌가?
“어, 그…… 그래?”
나도 모르게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어? 선배님 지금 그 표정? 뭐죠? 왜 얼굴은 빨개지지?"
장 검이 입술을 일자로 만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아냐. 여기가 좀 더워서 그래. 장 검, 거기 창문 좀 열어줄래?”
“더우세요? 알았어요.”
드르륵, 장 검이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 바빠? 뭘 여기까지 와. 할 일도 많을 텐데.”
“안 그래도 들어가 봐야 해요.”
왜들 술만 먹으면 그렇게 개가 돼서 운전대를 잡나 몰라?
“이쯤 되면 이거 병 아니에요?”
장 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귀엽네.
“…….”
나는 말 없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선배님, 그럼 저 가요. 다음 주에 퇴원하신다고 그랬죠?”
“어.”
“그럼. 나중에 지청서 봐요. 몸조리 잘하시고요."
“그래. 바쁠 텐데, 어서 들어가.”
나는 장 검이 간 후에 파란 장미의 꽃말을 검색해 보았다.
[불가능, 기적]
파란 장미의 꽃말이었다.
불가능? 기적?
후후, 맞는 말이네. 지금 내 모습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나 보군. 하긴, 내가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들이 이렇게 일어나니 말이야.
<한상길 부장실.>
병원에 입원했던 나는 회복 속도가 빨라 일주일 만에 퇴원해 지청에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반드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었다.
“정환아! 아니, 김 검사 어서 와. 앉아.”
한상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앞까지 나왔다.
“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지?”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진짜 용한 무당한테 가서 굿이라도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냐? 머리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병원 신세야.”
뭔가가 불안했는지 팔다리를 꼬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정환아, 나도 진짜 몰랐어. 그 미친 망치 새끼가 그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일이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마.”
한상길이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좌불안석했다.
쓰레기 같은 인간!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어? 어, 그래, 그래. 이 짓도 불안해서 더는 못 해 먹을 것 같다. 아무래도 조만간 은퇴해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너도 그때까지만 버텨. 나만 믿고 열심히 따라오기만 하면 돼. 내가 은퇴하면 이 자리는 네가 주인이다. 나만 믿어라. 하하하.”
한상길이 과도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뭔가 착각을 하시는 모양이군요. 전 당장을 말씀드리는 건데요.”
굳은 눈빛으로 한상길을 쏘아봤다.
“뭐? 그…… 게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이라니?”
툭, 나는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 얼마를 받으셨단 겁니까?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 게, 한 장 받았어.”
“한 장이라면 1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래, 그래. 자네한테는 미안하게 됐네. 너도 알다시피…….”
“저… 정환아, 이게 뭐…… 니?”
당황한 한상길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듣기에는 부장님의 목소리가 맞는 것 같은데요.”
“그… 래, 그렇긴 한데, 이런 걸 언제 녹음했어?”
“부장님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우리 김 검사 다시 봐야겠어? 그래그래, 보험을 들어두시겠다? 암, 그래야지. 이 정도 준비는 해둬야 협상을 하더라도 하지. 좋아, 좋아, 말해봐. 원하는 게 뭐야. 돈이야? 뭐야?”
한상길이 당황한 듯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특정 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및 알선수재) 혐의로 기소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조용히 옷 벗고 물러나시겠습니까?”
“하하하, 야야, 에이, 그만해라. 만우절도 아닌데 무섭게 야시를 주고 그래? 너 자꾸 그러면 나 화날지도 모른다!”
“저 지금 농담하는 것 아닙니다. 부장님!”
한상길이 녹음기를 집으려 하자 먼저 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거 당장 이리 안 내놔?”
순간, 얼굴에 핏기가 오르더니 한상길이 이를 드러냈다.
“수년간 상관으로 모신 정을 생각해 지금 당장 옷을 벗으신다면 더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부장님은 검사복이 어울리지 않는 듯하군요.”
“이 새끼 봐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왔구나. 야, 김정환! 너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이거 터지면 너는 무사할 것 같아?”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죠. 저야, 부모님도 안 계시고 부장님처럼 해외에서 공부 중인 자식도 없는데 뭔 걱정이 있겠습니까?”
“너…… 내가 나만 죽을 줄 알아? 너도 그럼 검사 생활 끝이야.”
“그럴까요? 부장님은 신문도 안 보십니까? 정의를 위해 목숨 던진 열혈 검사, 김정환! 사람들은 항상 영웅의 탄생에 목말라 하죠. 그토록 열망하던 영웅이 나타나면 열광합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그를 신봉하죠. 그가 하는 말은 곧 진리고 정의가 됩니다. 과연 대중들은 부장님의 말을 믿을까요? 제 말을 믿을까요?”
“이런, 개새끼!”
한상길이 분을 못 이겨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떨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격이 급한 편이라,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한상길이 터질 듯 시뻘게진 얼굴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아? 부장님! 그나저나 송별회는 어떡할까요?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이럴 때는 동문서답이 답이다.
“뭐라고? 나… 나가. 당장 나가! 개새끼야!”
와장창, 한상길이 분을 못 이겨 자신의 명패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불편하신가? 그럴 수도 있겠네.
“뭐, 그럼 송별회는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유유히 밖으로 나왔다.
며칠 후,
“김정환, 네가 이긴 것 같지? 너무 승리감에 도취하지 말라고. 너도 곧 이렇게 될 거야.”
“안녕히 가십시오.”
“…….”
“참! 부장님. 이건 나중에 부장님 칠순 잔치 때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나는 한상길에게 녹음파일을 꺼내 보였다.
“독한 놈! 너, 정말 내가 아는 김정환이 맞아?”
한상길에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당신 뒤꽁무니나 졸졸 쫓다 다니던 강아지가 아닌 것 같아 당황스럽습니까?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처리해야 할 교통사고 건이 많아서 멀리 못 나가니, 잘 사십시오. 부장님.”
결국, 한상길 부장의 갑작스러운 경질, 연일 1면을 장식했던 나와 장 검의 기사로 한동안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우리 형사 3부는 어느새, 하루에도 수도 없이 쏟아지는 자잘한 사건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장영은 검사실.>
“내일 김진웅 사건 결심 공판이라면서, 준비는 잘 돼가?"
나는 결심 공판을 준비하고 있는 장 검사 방을 찾았다.
김진웅 사건!
20세 대학생, 김진웅이 고교 시절 자신이 짝사랑하던 고교 동창 이연수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강제로 성폭행 후, 분을 못 이겨 다시 찾아가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한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이었다. 정황 증거도 확실했다. 물론 김진웅이 하루 만에 경찰서에 찾아와 자수했지만, 강간살인에 수법 또한 잔인해서 중형을 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준비랄 것도 없어요. 너무 뻔한 사건이라…….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초범이고 자수도 한 마당에 법정에서 성실하게 답변하고 반성의 기미를 보이면 어쩌면 중형은 피할 수 있을 텐데 묵묵부답이에요. 게다가, 내 느낌상 저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만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던데 나이도 어린 사람이 왜 그랬나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빼박 중형이 선고될 것 같아요.”
장 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코끝을 찡그렸다.
“장 검, 수사할 때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안 돼. 우리한테 ‘왜 그랬냐’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수사란 객관적으로 드러난 팩트를 근거로 하는 거니까.”
흠, 이 인간이 정말 내가 아는 뺀질이 김정환 검사 맞아?
“얼, 선배님.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전 심정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모든 범죄는 분노, 시기, 질투 등등 마음에서 시작되는 거니까요.”
장 검이 지지 않으려는 듯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그나저나 내가 그 수사 기록 좀 볼 수 있을까?”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물론이죠. 여기요.”
장 검이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들었다.
“고마워. 여기 앉아서 좀 봐도 되지?”
“당근!”
“거기 골무 좀 줘봐.”
서류 뭉치가 하도 두껍고 넘기기 힘들어 골무가 필요했다.
“네. 여기 있어요.”
웃을 때 살짝 패는 장 검의 보조개는 언제나 매력적이긴 했다.
아무튼, 나는 수사 기록을 살펴보았다.
피의자의 지문이 남아있는 식칼!
현장에서 발견된 그의 족적.
피해자 손톱에서 발견된 김진웅의 살점.
말을 맞춘 듯 너무나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목격자의 진술!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김진웅의 자수!
마치, 누군가 설계한 듯이 완벽히 맞아 들어갔다. 왠지 개운치가 않은 사건이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을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나는 지금 강간당했다. 너무 두렵다. 김진웅 그는 악마다.]
영수증에 급하게 쓴 듯한 피해자의 친필 쪽지였다.
“장 검, 이건 뭐야?”
“아, 그거요. 피해자 이연수가 김진웅한테 성폭행을 당한 직후에 쓴 건데, 필적이 이연수의 다이어리 필적과 일치해요.”
뭐지? 성폭행당하고 난 직후? 심적 동요가 심하게 일어난 상황에서 쓴 글씨체가 흔들림이 없다?
냄새가 진동한다!
[킹 메이킹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은 세상을 반 바퀴 돌 수 있다. -마크 트웨인-]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흔들었다.
진실? 거짓? 이런 문구가 왜 보이는 거지?
나는 좀 더 수사 기록을 살펴봐야 했다.
이건 뭐지?
몇 페이지를 넘겨보니 이연수 시체 사진이 나왔고 그 옆에 사진을 가리키는 듯한 화살표가 반짝거렸다.
“장 검! 혹시 수사 기록에 화살표 같은 거 표시해둔 적 있어?”
“아뇨. 누가 수사 기록에다 낙서해요. 전 안 했는데요?”
“여기, 화살표 안 보여?”
나는 급히 장 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뭐가 보인다고 그러세요?”
“그러게. 아무것도 없네.”
“선배님 아직 회복이 덜 되셨나 봐요.”
“그런가…….”
다시 보니 좀 전에 보였던 화살표가 사라졌다.
흠……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그나저나, 이쯤 되면 뭐가 있는 거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야. 진실은 이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장 검! 결심 공판 미뤄야 할 것 같아. 김진웅이 범인 아닐 수도 있어!”
“네, 아닐 수도 있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