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화] 김금자 보험 사기 살인사건 (4)
[킹 메이킹 시스템을 시작합니다.]
어디서 나는 소리야?
그 순간 낮고 묵직한 중년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어디선가 들어 들은 듯한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외부에서 나는 소리 같지는 않았고 귀 안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분명히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잘못 들은 건가?
나는 욕실에서 나와 거실로 이동했다.
[지명 찬스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누구야?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한술 더 떠 눈앞에 흐릿한 화면이 나타났다가 이내 또렷해졌다.
녹색의 YES 버튼과 적색의 NO 버튼이 있는 팝업창 같은 것이었다.
휙, 휙, 휙.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어 보았지만 잡힐 리가 없었다.
맞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었던 날, 그날 들렸던 목소리와 같아.
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갔다.
음…… 그때 카드를 뽑았고, 뒤집었을 때 분명히 지명 찬스권이란 말이 쓰여 있었어!
그렇다면, 그게 꿈이 아니란 소린데…….
그 순간 빨리 선택하라는 듯이 Y/N 버튼이 깜빡거렸다.
뭐야?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하는 건가? 에라 모르겠다.
나는 YES라고 써진 녹색 버튼을 터치했다.
[지명 찬스권을 선택하셨습니다. 상단에 실행 버튼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역시, 귀 안쪽에서 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걸 누르라는 건가?
실행 버튼을 터치하자 화면이 점점이 퍼지더니 곧 선명해졌다.
[거제도 구조라 방파제, 초록 산장]
거제도 구조라 방파제, 초록 산장? 왜 이런 것이 나타나는 거지?
몸이 뒤바뀌고 난 후부터 이상한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몸이 뒤바뀌고 난 후 벌어진 일시적인 괴현상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3층, 형사 3부 검사실 복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한상길은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고 국과수 검사 결과까지 위조된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랬다. 어떡하든 장 검이 수사에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나는 장 검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가 나타나자 고의로 그녀와 부딪혔다.
와르르, 장 검의 핸드백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갖가지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여성용품, 화장품 그리고 그녀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USB 휴대용 하드디스크까지…….
“미… 안 해, 장 검, 내가 한눈을 팔다가 그만…….”
나는 쪼그리고 앉아 장 검의 물건들을 주워 담는 시늉을 했다.
“어머, 선배님! 진짜 뭐예요. 놔두세요. 제가 할 테니까…….”
내가 장 검의 여성용품을 주워들자 화들짝 놀란 그녀가 내 몸을 밀쳤다.
“이런 것도 성희롱에 해당하는 것도 몰라요?”
“아니…… 난 뭐.”
당황한 장 검이 벌게진 얼굴로 물건들을 대충 핸드백 속에 주워 담았다. 덕분에 나는 손쉽게 그의 USB를 확보할 수 있었다.
몇 시간 후,
나는 지금까지 분석한 모든 내용이 담긴 자료를 장 검의 USB에 담아 그녀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노크하려다 보니, 문이 살짝 열려있었고 때마침 사무실에는 장 검 혼자뿐이었다.
“장 검, 이… 거…….”
장 검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급히 몸을 숨겨 그녀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분명, 국과수 연구원과의 통화가 틀림없었다.
“그래, 장영은. 네 예상이 맞아. 네가 보내준 사진이랑 혈흔을 검사해 봤는데, 네 말대로 일산화탄소 중독이 아니야.”
“진선아, 확실해? 확실한 거 맞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은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이건 전혀 아니야.”
“광주 국과수에선 일산화탄소 중독이라고 하던데?”
“야. 내가 국과수 생활 벌써 5년 차야. 육안으로만 봐도 아닌데, 이런 엉터리 결과를 보고한 검사관이 도대체 누군데? 사짜 아냐?”
“알았어.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직접적 사망 원인이 뭐야?”
“테트로도톡신 중독!”
“테트로도톡신? 그 복어에 들어있는 독이라는 거지?”
“그래 맞아.”
“확실해?”
“당연하지. 근데 그게, 나도 좀 이상한 게 좀 더 면밀하게 검사를 해봐야 알긴 하겠는데 검출된 양이 극소량이거든. 복어 속에 들어있는 테트로도톡신보다 훨씬 강한 독을 쓴 거 같아.”
“그게 뭔데?”
“내가 봤을 땐, 뭘 사용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이 정도 양으로 사람을 죽일 정도면 일반적인 복어 독보다 백 배에서 천 배는 강한 독을 쓴 거 같아.”
“그래? 일단, 알았어. 아무튼, 고마워. 진선아. 나중에 서울 올라가면 밥 살게.”
“야 이 년아! 맨 날 올라온다고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을 해라. 뭐가 잘났다고 그 촌구석을 자원해? 아주 대한민국의 정의로운 장 검사 나셨어. 진짜.”
“후후, 알았어. 시간 내 볼게. 참! 진선아 혹시, 테트로도톡신이 피부 반응도 하나?”
“빙고! 당연하지. 피부세포에도 반응해. 그래서, 외국영화 보면 살인청부업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작업할 때 종종 이 독을 사용하거든. 근데, 그게 신경이 마비돼서 몸은 못 움직이는데 정신은 살아있거든, 아마도 이 사람 죽을 때까지 무진장 고통스러웠을 거다.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야.”
테트로도톡신? 거제도?
그래, 맞아!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것 같아. 요즘, 우리나라 날씨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최근에 제주도 인근과 남해 연안에서 파란 고리 문어가 자주 출몰해서 낚시꾼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복어 독은 청산가리에 10배, 파란 고리 문어의 테트로도톡신은 복어의 1000배라고 알려져 있다. 단 1mg만으로도 치사량이 될 수 있어. 파란 고리 문어의 독이라면 극소량이라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 그라요? 그건 우리 영업 비밀인게 더 알라고 하지 마소.
망치가 말하던 그 영업 비밀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일 지도…….
그나저나 포기한 줄 알았는데. 역시 장 검답군.
“야, 아무튼 확실한 거지?”
“얘는 진짜! 의심병 걸렸니? 올라오기나 해 이 년아! 상은이랑 우리 한 번 뭉쳐야지.”
“알았어. 올라갈게. 일단, 정밀 검사부터 해보고 다시 연락 줘. 야, 이거 절대 비밀이다. 알았지?”
장 검이 주위를 살피더니 한 손으로 휴대전화 수화기를 가리며 소곤거렸다.
“알았어. 계집애야.”
“아무튼, 고맙다. 끊어.”
“흠흠, 장 검, 들어가도 돼?”
장 검이 전화를 끊은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인기척 했다.
“선배님? 네, 들어오세요. 무슨 일이세요?”
드르륵, 장 검이 전화통화 내용을 메모하던 다이어리를 슬그머니 서랍에 집어넣었다.
“이거 장 검거 맞지?”
나는 장 검의 책상 위에 USB를 올려놓았다.
“어머? 이거 어디서 찾았어요. 없어진 줄 알고 한참을 찾았는데.”
“아, 그게 아까 아침에 장 검이 나랑 부딪혔을 때, 떨어뜨린 건데 장 검이 너무 서둘러 가는 바람에 못 줬어. 회의 시간에 주려 했는데 그땐 내가 깜빡했고.”
“아…… 그래요. 아무튼, 고마워요. 선배님!”
장 검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사건은 일단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장 검 생각은 어때?”
“음…… 국과수 결과도 그렇고, 결정적 증거가 없다면 저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아쉽지만 접어야죠.”
접는다는 사람이 서울 국과수에서 근무하는 친구한테 부탁을 하나?
후후, 생각보다 여우 같은 구석이 있군.
“그래, 이거 빨리 마무리 지어버리자고. 안 그래도 할 일도 많은데. 그럼 수고하고.”
“네에. 수고하세요.”
이쯤 되면, 밥상은 차려진 게 되는 건가?
<목포 XXX 횟집.>
한상길 부장이 주말, 남의 눈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나를 불러냈다.
“6월은 병어가 제철이지. 여기 병어회가 죽인다. 죽여.”
“그렇습니까?”
“그럼, 살이 보드랍고 감칠맛이 일품이야. 어떻게 짱깨들이 그 맛을 알았는지 이맘때면 하도 사재기를 해대서 부르는 게 값이야.”
“자, 들자고.”
“네.”
“그나저나, 부장님, 아무래도 이번 사건 망치가 끼어든 것 같은데요.”
나는 은근슬쩍 한상길의 속내를 떠봤다.
“알아.”
한상길이 병어회 한 점을 간장에 찍어 입안에 넣었다.
역시, 이미 알고 있었군.
“그 성질 더러운 인간이 박상철이를 제친 게 틀림없어. 나도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지금 보면 그렇게 결과가 나쁜 것도 아니야.”
음…… 사망자가 박상철이 아니라 쌍둥이 형, 박상준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나 보군.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떻게 처리해? 피의자가 죽은 마당에 그냥 덮어두는 거지. 게다가, 이미 보험금도 다 털렸을 거야. 보험회사만 병신 된 거지.”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이 장 검이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 같던데요.”
“그러게 말이야. 그게 목에 가시야. 하지만, 지가 어떡하겠어? 별다른 합의점 없으면 포기하겠지!”
“장 검이 타살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한상길 부장의 반응이 궁금했다.
“너한테 그래? 장 검이?”
“네.”
“후후, 의외군. 아무튼, 그래 봐야 소용없어 광주 국과수 쪽에도 손을 써뒀어.”
“그거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 설마 내가 직접 나섰겠어? 이길상 회장, 그렇게 녹록한 인물이 아니야.”
국과수 쪽까지…….
“부장님, 장 검 그렇게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좀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장 검이 대검 중수부 계통을 타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장 검에게 힘을 좀 실어줘야 했다.
“뭐? 확실해?”
“네.”
“아이 씨, 어쩐지, 중수부장이랑 성이 같다 했어. 딸인가? 아니면 조카인가?”
역시, 중수부장이 무섭긴 하군.
한상길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망치가 이번 일로 장 검한테 앙심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성질 더러운 놈이 괜히 장 검 건드리면 골치 아파질 텐데요.”
“음…… 그렇지.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만약에 그 또라이 같은 새끼가 괜한 미친 짓이라도 한다면 큰일인데… 어떡한다. 아! 맞다. 정환아, 네가 망치 좀 데리고 한 일주일만 피해있어.”
“제가요?”
“그래, 다른 사람은 못 믿겠고 한 일주일만 망치 이 새끼 데리고 어디 좀 가 있어라. 그럼 그사이에 여기 일은 내가 어떡하든 마무리 지어 놓을 테니까…….”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신지….”
“글쎄, 음… 아, 거기가 좋겠다. 거제도로 가. 거기 구조라 방파제가 망치 놈이 자주 낚시하러 가던 곳이야. 그 새끼 바다낚시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가자고 하면 바로 따라나설 거야. 거기 가서 한 일주일만 조용히 있다가 와. 기억 안 나? 너도 예전에 거기 한 번 가봤잖아!”
“아… 네. 기억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적당히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장님!”
역시나, 대충 둘러댔다.
“그래, 그래. 난 너만 믿는다. 자 한잔해.”
또르르, 한상길이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나저나, 난 은퇴해야겠다. X도, 이 짓도 이젠 못 해 먹겠어. 정환아! 이번 일만 잘만 마무리되면 이 자리 네 것이야. 알아?”
한상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지, 최선은 누구나 하는 거고, 잘해야지. 안 그래?”
순간, 한상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네. 잘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좋아! 아주 좋아.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해. 시원시원하잖아. 자, 한잔하자!”
“네.”
“캬, 좋다. 바다 냄새 좋고, 안주 좋고, 술맛은 더 좋고!”
한상길이 단숨에 술을 털어 넣었다.
거제도 구조라 방파제!
우연인가?
아니, 이쯤 되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아니, 우연일 수가 없다. 만약 우연이라면 요즘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전부 우연이란 말인가?
아니다! 분명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