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화] 김금자 보험 사기 살인사건 (1)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내가 빙의하기 전 김정환이 맡은 사건이었고 그를 믿을 수 없었기에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일단, 불기소 처리하고 사건을 좀 더 면밀하게 파악한 후, 모든 것이 명확해 지면 재수사를 하는 것이 낫겠어!
나는 일단은 한상길의 지시대로 사건을 ‘혐의없음’ 의견으로 불기소 처리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피의자 측에 그 사실을 통보했다.
“공 수사관님, 김금자 사건 피의자 측에서 제출한 증거물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뭐 하시게요? 이 사건은 이미 불기소 처리한 건 아닙니까?”
“아직도 끊기는 기억들이 좀 있어서요. 사건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기억이 살아날지도 몰라서 그럽니다.”
“아…… 그러시구나. 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피해자 김금자 사망 추정시간은 1월 3일, 19시에서 21시 사이다. 그 시간에 피의자 박상철은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는 얘긴데…….
피의자 측에서 제출한 CCTV 화면을 면밀하게 검토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확인을 해야 했다.
“어르신, 여기 자주 오십니까?”
“암만, 나야 여서 살다시피 하제.”
“그럼, 혹시 이런 사람 본 적 있습니까?”
박상철의 사진을 내밀었다.
“뭐야? 인내 봐. 가까이서 보게.”
할아버지가 안경을 벗고 유심히 사진을 살폈다.
“글씨, 여 오는 양반들은 엔간하면 나가 다 아는디 첨 보는 양반인디?”
“그래요? 다시 한번 자세히 봐주세요. 어르신.”
“어이, 박가야. 니 이 사람 아냐?”
“뭐신디?”
옆에 계신 또 다른 어르신이 사진을 받아들었다.
“누여?”
“어르신도 처음 보는 사람입니까?”
“모르겄는디? 근데 어쩐다고?”
“긍께, 말이여.”
“아뇨, 아뇨. 제가 찾는 사람이 아닌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동네 기원은 이곳 하나뿐인데, 박상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기원 출입이 잦았다면 어르신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분명 이건 뭔가 있어.
수십 번 CCTV 녹화본을 돌려 봤지만, 화면 속 남자는 분명히 박상철이 틀림없었다.
뭘까? 이 찝찝한 기분은…….
답답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사건의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그날 저녁, 8시 40분경.
나는 집 근처 슈퍼에서 우유와 물, 간단히 먹을 음식을 고르고 있었고 편의점 구석에선 두 남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 인자 몇 분 남았냐?”
“3분.”
“몇 대 몇이여?”
“86 대 84. 한 골 차여.”
“아따, 겁나게 거시기해분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모니터를 뚫고 들어갈 기세로 농구 중계에 빠져있었다.
“시간 없다. 모비야. 얼렁 넣어 불어라. 지발…….”
한 남자가 더욱더 몸을 웅크리며 초조해 했다.
“이거 얼맙니까?”
“만 원입니다.”
계산대에서 물건값을 계산할 무렵이었다.
“와! 이건 기적이여. 시방, 이게 꿈이여 생시여!”
한 남자가 개선장군처럼 양팔을 치켜들며 소리를 질렀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이긴 듯했다.
“니, 묵었냐? 얼매나 박았냐?”
“막폴 분질러질 뻔봤다. 똥줄도 이런 똥줄이 없다 야.”
한 남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포츠 토토 용지를 꺼내보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니까, 얼매나 묵었냐고.”
“니는 몰러도 돼야.”
“이런 썩을….”
한심하군. 어린 나이에 저렇게 도박에 빠져 지내다니…….
“그럼 많이 파….”
슈퍼 문턱을 내디딘 순간, 무언가 띵하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포츠 토토? 그리고 중계방송?
그래, 바로 이거였어!
그 순간, 전기가 통하듯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양다리가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 * *
결론부터 말하면 박상철의 알리바이는 조작이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면밀하게 CCTV 녹화본을 보며 분석했고 결국, CCTV 화면은 조작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상황은 이러했다. 수십 번 되돌려 봤지만, 화면에 등장한 남자는 분명 박상철이 확실했다. 문제가 될 만한 요소가 없는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근데, 저 사람이 지금 뭘 하는 거지?
실타래처럼 얽혀있던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 이상한 건 박상철이 아니라 CCTV 화면에 같이 잡힌 기원 종업원의 행동이었다.
지금, 뭘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모니터를 뚫어지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모니터 뒤쪽에서 잡힌 화면이라 뭘 보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남자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환하게 웃다가도 뭔가를 중얼거리기도 했고 탄식을 내뱉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좀 전에 슈퍼에서 스포츠 중계를 시청하고 있던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 패턴이었다.
스포츠 중계를 보는 것이 틀림없어!
오후 8시 55분!
드디어, 결정적인 단서가 잡혔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남자가 더욱더 몸을 웅크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갑자기 양손을 불끈 쥐었다.
그 시각이 8시 55분!
보고 있는 중계가 농구 경기가 맞는다면 4쿼터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이어서, 그는 지갑에서 스포츠 토토 복표로 추정되는 하얀 종이를 꺼내 재차 확인하더니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쩔 줄을 몰랐다. 스포츠 토토에 투자한 사람이 중계를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좀 전에 슈퍼에서 봤던 그 남자와 똑같았다.
이것이 무슨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냐고?
당연히 결정적 단서가 되고도 남는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피해자 김금자가 사망한 1월 3일! 19시에서 21시 사이에는 스포츠토토 대상 경기가 없었다. 이틀 후에 그 시간대에 프로농구는 단 한 경기가 열렸는데 삼송 선더스와 서양 오리온스의 경기였다. 그 경기의 종료 시각이 정확히 8시 55분이었고 4쿼터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삼송 썬더스가 극적인 버저비터로 이긴 경기였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화면은 1월 3일에 찍힌 CCTV가 아니라 1월 5일에 찍힌 화면이 확실해!
물론 녹화 경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이 남자에게서 이와 같은 행동 유형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심증으론 조작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부른 단정은 아직 일러!
CCTV 화면을 조작한 것이 틀림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했다. 이 정도 정황 증거만 가지고는 유죄를 증명할 수 없고 오히려 역공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나는 좀 더 신중해야 했다.
서울에 올라가야겠어!
<부장실.>
“부장님, 죄송하지만 서울에 좀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 있나?”
“두통이 너무 심해서 정밀 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그래? 그럼 가야지. 아, 내가 삼송 병원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소개해 줄까?”
“아닙니다. 이미 다른 병원에 예약도 다 해둔 상태입니다.”
“그래? 아무튼, 이번 건도 잘 처리했으니까 다녀와.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네.”
* * *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고소인이자 피의자 박상철의 처제인 김순자 씨의 집을 찾았다.
딩동.
“안녕하세요. 순천지검에서 나왔습니다.”
- 전 할 말이 없어요. 돌아가 주세요.
딩동, 딩동.
“죄송하지만, 여기 김순자 님 댁 아닌가요?”
- 맞기는 하는데요. 전 할 얘기가 전혀 없다고요!
“김순자 님! 잠시만요. 언니 김 금자 씨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이 맞습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으니 문 좀 열어주십시오.”
- 네? 뭐라고요?
덜컹, 그녀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나는 고소를 취하한 여동생 김순자를 만나, 이유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여길 왜 오셨어요?”
그녀가 원망 어린 눈동자로 나를 쏘아봤다.
그 순간, 머리가 잠시 어질거리더니 김정환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김순자 씨, 언니의 재산이 탐나서 그런 것 아닙니까? 박상철 씨를 범인으로 몰아넣고 당신이 가로채려는 수작 아니냐고요!"
“검사님,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우리 언니는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십니다. 게다가 형부가 알코올 중독에 걸려 술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만취 상태에서 넘어지다뇨. 검사님 말도 안 됩니다.”
김순자가 울먹이며 김정환에게 호소하는 장면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군. 김정환이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죄송합니다. 그때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왜…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검사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녀를 최대한 설득했고 다행히 진심이 전달되었는지 그녀도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형부는 언니 재산에 욕심을 냈어요. 하지만, 언니가 완강히 거부하니까 술만 먹으면 주먹을 휘둘렀어요. 언니는 원래 술을 먹지도 못할뿐더러 술 얘기만 나와도 치를 떠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만취 아뇨, 말도 안 돼요."
흑흑흑, 그녀가 몸을 떨며 오열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왜 갑자기 고소를 취하하셨습니까?”
“그… 그건…….”
뭔가를 말하려다 멈췄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양팔을 연신 쓸어내렸다.
“왜요? 혹시, 누가 협박하던가요?”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일 없어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다 했으니까 돌아가 주세요.”
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떠밀었다.
분명 외압이 있었어!
“잠시만요. 혹시 이 사람입니까?”
나는 망치의 사진을 그녀 앞에 내놓았다.
“모…… 몰라요.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사색이 된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이 인간이 협박한 것이 틀림없어.
“언니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힘드시겠지만 저를 믿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어떡하든 그녀를 설득해야 했다. 결국, 한 시간여의 설득 끝에 간신히 망치가 그녀를 협박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제가 모든 것을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만약에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우리 애들을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어요.”
흑흑흑, 그녀가 그동안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자제분들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지…… 진짜인가요?”
“네. 저를 믿으십시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진짜, 믿어도 되는 건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반드시 약속시키겠습니다.”
“네에. 그… 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조만간 연락을 드릴 테니 그때, 지검에 항고하세요. 그러면 재수사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를 만난 것은 절대 비밀입니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섣불리 항고했다가는 기각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때를 기다려야 했다.
“네에…….”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 * *
서울에 올라온 나는 CCTV 화면 정밀 분석을 의뢰했고 답변이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건 날짜를 조작한 건데요?”
“확실합니까?”
“없던 사람도 있게 만들 수 있는 마당에 찍힌 날짜 정도 조작은 컴퓨터 좀 만질 줄 아는 사람이면 어렵지 않아요.”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
김정환과 한상길은 이 사건을 덮으려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국과수에 증거 감식을 의뢰하기는커녕,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파악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그 중심에 조폭 망치가 있는 사건이었다.
김정환이 사건과 연관 있어!
절대 내가 나설 상황이 아니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장 검사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그 해답은 장영은 검사였다. 나는 장 검사에게 익명으로 내가 분석한 모든 자료를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하지만, 결코 그녀의 힘만 가지고는 한상길을 넘어서기 힘들어!
그녀를 지원 사격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김상수 사법연수원장!
얼마 전, 어머니 반찬가게에서 봤던 그가 적격이다. 대검 중수부장, 주요 요직을 거쳐 지금은 후학 양성을 위해 사법연수원장을 맡고 계신 분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는 둘도 없는 죽마고우셨고 법조계에서도 강직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셨다. 나는 그분에게도 장 검사에게 보낸 것과 같은 자료를 보냈다.
며칠 후,
띠리리링.
예상대로 한상길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정환아. 큰일 났다. 너 빨리 지청으로 내려와야 할 것 같아.”
다급한 한상길의 목소리였다.
“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장 검이 어디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박상철이 건을 들고 나왔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시치미를 뗐다.
“그게 말이야. 장 검 혼자 설치는 거면 내가 대충 찍어 누르겠는데, 이 년 뒤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지청장이 군소리 말고 재수사하라고 난리야. 아무래도 이 년이 위에다가 찌른 모양이야. 급하니까 빨리 튀어와.”
“네, 알겠습니다.”
후유.
이제는 내가 나설 수 있는 상황이 된 건가?
띠띠띠띠.
[김순자 씨, 저 김정환 검사입니다. 지금 즉시, 지검에 항고해 주십시오.]
김순자에게 문자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