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2화] 신념(信念) : [명사] 굳게 믿는 마음 (2)
내가 떨어진 걸 어떻게 알았는지 곧 있으면 연수원을 졸업하는 대학 동기 정훈이가 위로한답시고 찾아왔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부리나케 달려온 녀석의 성의를 봐서라도 거절할 순 없었다.
“상우야, 진짜 다음에는 꼭 붙어라. 사시 합격하고 나서 연수원 들어가니까 은행에서 골드 카드도 내주더라.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맘껏 먹어.”
정훈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며 으스댔다.
“그래, 고맙다.”
“야! 많이 먹어라. 여기 한우가 아주 그냥 죽여. 투뿔뿔 짜리라고. 돼지고기는 왜 이런 감칠맛이 없나 몰라?”
치지직, 정훈이 시뻘건 고깃덩이를 불판에 올려놓았다.
삼겹살에 핏기만 가셔도 입에 처넣었던 녀석이…….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튼,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 그래. 고맙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왜 그랬어? 시쳇말로 머리에 노랑물만 안 들이고 가면 통과되는 3차 면접인데 거기서 떨어지냐? 넌, 하여간 그 뻣뻣한 게 문제야 문제! 1, 2차 수석까지 해놓고 이게 뭐냐? 다음엔 대충대충 해라.”
쯧쯧쯧, 정훈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
“그나저나 너도 나중에 합격하면 알겠지만 여긴 기수 군기가 군대는 저리 가라다. 진짜, 연수받는데도 군기 빡빡 잡더라고. 어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 막막해.”
정훈이 볼때기가 미어터지도록 익지도 않은 고깃덩어리를 밀어 넣었다.
“아직 덜 익은 것 같은데?”
“원래 소고기는 약간 덜 익혀 먹는 거야. 그래야 육즙이 안 빠져.”
“후후, 그러냐? 알았다.”
“야! 그리고 겁나 신기한 게. 사시 딱 합격하니까 여기저기서 맞선 자리가 들어오더라. 뭐? 무슨 물산 딸내미부터 무슨 건설 외동딸, 하여간 세상 사시 합격하고 볼 일이더라고.”
정훈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목을 휘저었다.
“…….”
별로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안 먹냐? 야 인마, 좀 먹어! 오래간만에 몸보신 좀 시켜 주려고 했더니만….”
녀석이 이죽거렸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런가, 별로 안 당기네."
“그래? 말을 하지! 그럼 대충 먹고 일어나. 한잔하러 가자. 내가 분위기 좋은 곳 하나 물색해 뒀다. 위스키 괜찮지?”
허구한 날 신림동 고시촌 놀이터에서 소주에 새우깡 끼고 한탄하던 놈이 위스키? 키핑?
후후, 사법시험 합격이 좋긴 좋구나.
어이가 없었지만, 장수 끝에 어렵게 합격해 으스대고 싶은 마음을 꺾어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그러자.”
띠리리링.
그 순간 정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상우야, 잠깐만 나 전화 좀……. 네네. 선배님! 네… 네… 정말요? 당연히 가야죠. 네… 네…….”
정훈이 휴대전화를 양손으로 받쳐 들며 밖으로 나갔다.
“이거 상우야, 미안한데 어쩌지? 오늘 같이 못 마시겠다. 기수 선배가 오늘 집합을 걸었어. 너는 이 바닥을 잘 모르겠지만, 여긴 한 번 찍히면 완전 X 된다. 그나저나, 어떡하지?”
자리로 돌아온 정훈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허락받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래, 그렇게 해. 난 상관없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술기운을 빌어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 진짜 괜찮은 거냐? 그럼, 나는 간다. 다음에 또 보자. 계산은 내가 이미 했다.”
“그래.”
* * *
벌써 12시, 이미 버스도 끊어진 시각이다. 주머니를 뒤져서 나온 돈은 고작 3천 원. 여기서 우리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 적어도 만 이천 원은 나온다.
할 수 없지. 걷자. 하루 이틀이냐?
후회하냐?
자문했다.
아니! 휘어지느니 차라리 부러지겠다.
결코, 독립운동 같은 거창한 걸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러셨기에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걷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대문 앞이었다.
“엄마, 나 왔어.”
“많이 늦었네. 밥은?”
분명 내가 떨어진 걸 알고 계실 텐데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 밥을 안 먹었겠어.”
꼬르륵.
그 순간 배꼽시계가 요동쳤다. 사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밥 차려 줄 테니까 기다려.”
그걸 모를 리 없는 우리 엄마다.
“근……데, 엄마!”
“왜?”
“아…… 아냐. 아무것도.”
“녀석, 싱겁긴. 얼른 들어가 씻기나 해.”
“알았어요.”
그 순간 엄마가 신고 있는 짝짝이 양말이 시야에 들어왔다.
“엄마, 양말 없어? 궁상맞게 짝짝이가 뭐야?”
나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가 어때서, 멀쩡하기만 하는구먼.”
“그냥 그런 건 버려!”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
틱, 틱, 틱.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더니 모니터가 환하게 밝아졌다.
[2006년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명단]
엄마가 합격자 명단을 확인한 후 깜빡하고 컴퓨터를 끄지 않으신 게 틀림없었다.
그래. 차라리 부러지자!
* * *
“이기적인 놈, 지 엄마가 뒷바라지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불효막심한 놈.”
“우리 집안에 판검사 하나 나오나 했더니.”
내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떨어진 것이었다. 사법시험을 포기한 내 결심에 관한 주변 반응은 싸늘했다.
“엄마 미안해.”
“뭐가?”
“그냥, 미안해서.”
나는 죄인처럼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쓸데없는 소리 한다.”
“엄마, 만약에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뭐라고 하긴, 엄마랑 똑같으셨겠지. 아버지도 잘했다고 하셨을 거야.”
“진짜?”
“그럼, 그나저나 앞으로 뭘 할 거야? 생각해둔 건 있어?”
“신림동에서 학원을 하는 선배가 있는데 그쪽 일 좀 해보려고.”
“그래? 잘됐네.”
“다 됐다!”
엄마가 다리미를 내려놓고는 칼같이 각이 잡힌 양복을 들어 올렸다.
“아무거나 입고 다니지 말고 이거 입고 다녀. 사람은 옷매무새가 단정해야 대접받는 거야.”
“엄마? 진짜 괜찮은 거지?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엄마 호강시켜 줄게.”
“정말? 듣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야!”
엄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제길, 차라리 등이라도 한 대 시원하게 때려주지!
<신림동 XX 법 학원.>
학교 선배, 진수 형이 운영하는 법 학원을 찾았다. 진수 형은 1차 시험을 두 번이나 붙었지만, 매번 2차 시험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고배를 마셨다. 이후 방향을 틀어 학원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나름 성공 가도를 달렸다.
“너 완전 유명인사던데? 하긴, 사시 역사상 1, 2차 수석 한 놈이 떨어지긴 네가 처음일 거다. 하여간 학교 때부터 꼴통 짓만 골라서 하더니 사고 제대로 한번 치는구나.”
진수 형이 고용 계약서를 내 앞에 내놓았다.
“…….”
“짜식, 실실 쪼개긴. 거기 당구장 표시하고 자세히 읽어봐. 나중에 속았다고 소송 같은 거 걸지 말고.”
내가 말없이 웃자 진수 형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형이 알아서 했겠지.”
나는 계약서를 대충 훑어본 후 미련 없이 도장을 찍었다.
“잘 생각했어. 그깟 검사 하면 뭐 하냐? 쥐꼬리만 한 봉급에 허구한 날 야근에, 난 하래도 못하겠다. 내가 왜 그 짓을 하려고 발버둥 쳤나 몰라?”
형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 이거 잘만 하면 월 2, 3천은 우습다. 게다가 네놈이 워낙 유명해서 대박 가능성이 농후해.”
진수 형이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언제부터 출근하면 돼요?”
“어? 어, 내일부터 당장 나와. 나와서 다른 교수들 수업하는 거 참관도 좀 하고 분위기 좀 익힌 다음에 시작하자.”
“네! 그렇게 할게요.”
“일단 3개월간 수습 기간은 300 줄게. 그리고 정식 수업 들어가면 5대5 비율제도야. 여긴 한 만큼 가져간다.”
“그렇게나 많이?”
“네놈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거야. 야! 이건 약과야. 나중에 웬만큼만 치면 월 1, 2천은 가져간다.”
“상우야, 쟤는 월 1억 찍어!”
진수 형이 한 남자를 가리키며 목소리 톤을 낮췄다.
그래, 당분간은 엄마만 생각하자!
* * *
우르르, 쾅!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첫 출근 날 아침부터 천둥 번개가 내려치더니 때아닌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버지, 저 잘한 거죠?
삐뚤어진 넥타이를 고쳐 매며 거울을 응시했다.
“그럼, 역시 내 아들이다.”
거울 속 아버지가 환하게 웃는 듯했다.
“상우야, 출근해야지.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많이 막힐 거야.”
“네, 나가요.”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포켓에 꽂아 넣었다.
“비도 오는 데 뭐 하러?”
구두가 반짝반짝 광이 났다.
“그래도 첫 출근인데. 사람의 첫인상은 구두로 결정되는 거야. 잘 다녀와 아들!”
촤악!
엄마가 우산을 펼쳐 건네줬다. 이것도 새 우산이었다.
“비 많이 와. 얼렁 들어가.”
엄마가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나설 기세였다.
“길 조심, 차 조심하고!”
“내가 무슨 어린애야? 들어가!”
나는 손을 휘저었다.
그 이후로, 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마도 울 엄마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거기 서 계셨을 것이다. 그때, 엄마한테 환하게 웃어주기라도 했었어야 했는데…….
조금 일찍 나왔는데도 비가 와서 그런지 거리는 북적거렸다.
때마침 내가 타려던 버스가 정류장에 막 도착했고 건널목 신호등 파란 불이 깜박거렸다.
뛸까? 말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내 몸은 이미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제길, 기다릴걸!
끼이익, 쾅!
미처 나를 보지 못한 트럭 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빗길에 미끄러지며 내 몸을 덮쳤다.
부우웅, 철퍼덕!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바닥에 꼬꾸라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두개골이 깨졌는지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엄마, 미안해!
나는 사력을 다해 옆에 떨어진 만년필을 움켜쥐었다.
“어머, 어머 죽었나 봐!”
“저걸 어째? 젊은 사람 같은데.”
몰려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저…… 아직 살아있어요. 제발, 살려줘요!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봤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점 온몸에 힘이 빠졌고 이내 눈이 감기며 시야가 흐려졌다.
죽었구나!
나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같은 시각, 순천의 한 아파트.>
미끌, 꽈당.
만취한 한 남자가 화장실 바닥에 놓인 비누를 밟고 널브러져 꿈틀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킹 메이킹 시스템을 시작합니다.]
저승사자인가?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굵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저건 뭐지?
촤르르, 그 순간 수많은 카드가 눈앞에 나타났다.
[한 장을 선택하시오!]
같은 목소리였다.
선택? 천국, 지옥 같은 걸 결정하는 건가?
[지명 힌트권]
카드 한 장을 골라 뒤집으니 글자가 나타났다.
지명 힌트권?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목소리는 사라졌고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휙, 팔을 들어 올렸다. 불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산 건가? 죽은 건가?
우선 몸을 만져 보았다. 생생한 촉감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약간 욱신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프지도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내 눈은 양쪽 다 1.5인데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은 건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았다.
“성님! 몸은 좀 괘안허요, 어쩌요? 아따, 조심 좀 허지, 뭔 술을 그라고 자신다요. 함바트라면 대그박 터진 깨꾸락지멩키로 황천길 갈 뻔했다 안 하요.”
두세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잘 보이지 않아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성님? 형님이란 뜻인가? 내가 왜 저 사람의 형님이지?
“성님은 허벌라게 운도 좋은갑소. 으사 선상이 그런디 한 사나흘 거시기하면 괘안하다 글터만.”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
“이거 후딱 쓰쇼, 앵경 없으면 눈 먼 봉사나 진배없응께.”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한 남자가 안경을 내밀었다.
안경? 내가?
엉겁결에 안경을 받아 쓰자 주변이 점점 뚜렷해졌고 남자들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분명 이곳은 병실이었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이나 팔뚝에 새겨진 문신, 우락부락한 생김새로 볼 때 영락없는 조폭들이었다.
“누……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