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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신념(信念) : [명사] 굳게 믿는 마음 (1)
신념(信念)이란 사전적 의미로 ‘굳게 믿는 마음’이다. 영국의 질적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신념을 지닌 한 명의 힘은 관심만 가지고 있는 사람 아흔아홉 명의 힘과 같다.’라고 했다. 신념이란 바로 의지보다 강한 마음을 말하며 어떠한 주위 환경이나 사람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 강한 마력을 지닌 정신적 힘을 일컬을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은 틀리기도 했다. 신념이 있는 한 명의 힘은 아흔아홉 명의 힘보다 크다. 아니, 수백, 수천 명의 힘보다 크다. 또한, 그 힘은 관심조차 없는 수백만, 수천만이 관심을 두도록 이끌 수 있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다.
신념을 지키는 정의로운 대통령! 이것이 나의 꿈이다.
* * *
나의 아버지는 기자셨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문사 정치부 기자셨다. 워낙 바쁘셔서 며칠씩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 얼굴 보기도 힘들었지만, 항상 수첩과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셨던 그가 너무도 멋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날부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날이 많아졌다. 주변 어른들은 걱정하셨지만 난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했다.
“우리 상우는 꿈이 뭐야?”
“대통령!”
“정말? 왜 대통령인데?”
“꿈은 크게 가지는 게 좋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거잖아.”
나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제일 높으면 뭐가 좋은 건데?”
“음, 이것저것 시킬 수도 있고 사람들이 신하처럼 졸졸 쫓아다니잖아. 우리 반에 싸움 제일 잘하는 민수도 애들한테 막 시켜.”
“그럼 그 민수란 아이가 정말 그렇게 싸움을 잘하니?”
“어, 아니, 그건 아닌데… 음…… 그 아인 덩치도 크고, 그리고…….”
그러고 보니 난 민수가 싸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우리 사이에서 그 아이는 가장 싸움을 잘하는 아이로 인식되어 있을 뿐이었다.
“상우도 그 아이한테 당해봤니?”
“아니, 그 애는 만만한 애들만 건드려.”
“그럼, 그 아이가 친구들을 괴롭힐 때 우리 상우는 뭐 했어?”
“그냥, 있었어.”
“왜?”
“나를 괴롭히지도 않았는데 뭐 하러? 그러다 나까지 괴롭히면 어떡해?”
“그래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아마 그럴걸?”
“아마?”
“응. 아마.”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빙그레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렇구나. 다음에 그 녀석이 또 친구들을 괴롭히면 상우가 한번 나서 보는 건 어떨까?”
“왜, 그래야 하는데? 나한테 그런 것도 아닌데?”
“그건 상우가 직접 겪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음…… 알았어. 그래 볼게.”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의 부탁이었기에 나는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아빠는 우리 상우가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맞서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며칠 후,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상황이 벌어지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학교 앞, 놀이터.>
“야! 그거 내놔봐. 이 대장님이 좀 가지고 놀자.”
오늘도 어김없이 녀석이 늘 괴롭히던 정호의 장난감을 뺏어 들었다.
“시…… 시 싫어! 우리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준 거야.”
획, 정호가 황급히 장난감을 뒤로 감췄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이었다.
“이리 안 내놔? 너, 혼날래?”
녀석이 심술 맞게 생긴 볼살을 흔들며 정호의 손을 비틀어 장난감을 빼앗았다.
“내…… 내 건데…….”
정호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울먹거리며 주변의 아이들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늘 있던 일이기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야, 김민수, 그 손 놔! 그거 네 거 아니잖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생각해도 놀라웠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뭐…… 뭐라고? 내가 누군 줄 알고. 너 죽을래?”
녀석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빼앗은 장난감을 들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쿵쿵. 쿵쿵.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콩닥거렸다.
“너 혼나고 싶어? 어디서 감히 덤벼?”
민수가 어이없다는 듯 내 멱살을 흔들며 게거품을 물었다.
“너…… 네 것 아니잖아. 정호한테 돌려줘.”
무서웠지만 이 상황에서 약해질 수는 없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대항했다.
“어휴…… 진짜 이게… 어휴!”
녀석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녀석은 주먹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할 뿐 차마 때리지는 못했다.
어? 뭐지? 에이, 모르겠다!
나는 ‘이 순간이 기회다’ 싶어 온 힘을 주먹에 모아 녀석의 얼굴에 어퍼컷을 날렸다.
퍽, 꽈당!
녀석이 내 주먹에 맞고 바닥에 쓰러져 널브러졌다.
“너…… 너. 이 씨!”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는지 녀석이 말을 더듬었다. 심장 박동이 마구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녀석이 덤비면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기에 바닥에서 짱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스르르, 하지만 이내 내려놓았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녀석과 맞설 만반의 준비를 했다.
“어? 피…… 피 나! 우 앙!”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일어나 덤빌 줄만 알았던 녀석이 코피 몇 방울 흘린 걸 보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뭐야 저거?
겉모습과는 다르게 별것 아닌 녀석이었다.
“내놔!”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녀석의 손을 비틀어 장난감을 뺏었다.
“정호야, 이거!”
나는 당당하게 정호에게 장난감을 돌려줬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뿌듯함이었다.
“와! 와! 상우가 이겼다!”
“민수가 울었어!”
그제야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싸울 때 울면 지는 것이라는 점이 그들만의 불문율이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구경만 하던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와 환호했다.
“얼레리 꼴레리.”
“울었대요. 울었대요.”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민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얼마 전만 해도 꼼짝도 못 하던 녀석들이…….
내가 이겼다. 아니, 우리가 이겼다!
그 이후로 녀석은 더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독재자가 사라진 우리 반엔 평화가 찾아왔다.
그땐 아버지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건 반에서 제일 싸움을 잘했던 아니 제일 했을 거로 생각했던 녀석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면 그에게 시달림을 당했던 정호나 상수 같은 사람들이 불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힘없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용기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 이후,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성적표에 석차가 표기되기 시작한 이후로 난 단 한 번도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저놈은 나중에 뭐가 돼도 될 거야.”
“우리 가문을 빛내 줄 놈이야.”
명절 때면 집안 어른들이 입이 닳도록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 봄, 나의 우상이셨던 아버지는 뜻밖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당신이 쓰시던 만년필 한 자루만 남긴 채…….
아버지 전 정의로운 대통령이 될 거예요. 지켜봐 주세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마냥 슬퍼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시던 용기 있는 사람, 옳다고 믿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 사람, 그런 대통령이 되겠다고 그의 영전에 다짐했다.
대통령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죽을 듯 공부했다.
“넌, 무슨 공부하고 웬수 졌냐? 무슨 공부를 그렇게 지독하게 해? 책을 아주 씹어 먹어라, 씹어먹어!”
“그냥, 하는 거야.”
결국, 난 서울대 법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물론 수석 합격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남들처럼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할 처지는 되지 못했다. 게다가, 반찬 가게를 운영하시던 엄마의 벌이로는 세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도 벅찼다.
그래, 일단 입이라도 하나 줄이자!
그 상황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은 군대였고 1학년을 마치자마자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2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학업을 마쳤고 이후 사법시험을 준비해 2년 만에 합격했다. 물론 1차 2차 모두 내 이름이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그때 내 나이 27살이었다.
“아이고, 우리 상우가 수석 합격을 했대. 장하다. 장해!”
“3차는 머리에 노랑물만 안 들이고 가면 붙는다는데 이제 판검사는 떼놓은 당상이야.”
그 당시 아무도 내가 판검사가 될 것이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 * *
“상우야 잘하고 와.”
엄마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다녀올게.”
파리도 미끄러져 낙상할 것 같은 구두. 나는 물끄러미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 나보다 더 긴장한 듯 보였다.
“촌스럽게 왜 이렇게 광을 내?”
왜 좀 더 다정다감하지 못했을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땐 그랬다.
연수원은 호수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신림동보다 훨씬 춥게 느껴졌다. 면접 시각이 다가오자 긴장한 표정의 수험생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로 면접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손에 쥐어진 건 면접시험용 질문지 한 장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옆자리에 있던 안경 쓴 남자는 학원에서 나눠준 두툼한 족보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면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3차 면접은 ‘신호등 게임’이다. 운동회 100m 달리기처럼 1등을 했다고 상을 주는 게임이 아니다. 그래서 미련하게 1등이 되려고 할 필요 없이 아무나 하나 골라잡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면 되는 것이다. 차들이 경적을 울리든 신호등이 깜박거리든 길을 건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었다.
저러니 학원들이 돈을 벌지!
그런데도 저 사람은 횡단보도를 1등으로 건너려는 듯 글자들을 씹어 먹고 있었다.
드디어 면접이 시작됐고 난 시작하자마자 신호등 게임의 중요한 법칙을 위반했다. 남들과 달리, 면접관의 불합리한 질문에 사사건건 대항하며 맞섰다.
“그렇게 튀어놓고 잠이 오세요?”
집단 면접이 끝나고 개별 면접을 기다리며 잠시 눈을 붙였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 있던 한 수험생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네는 최근에 법을 경시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풍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개별 면접이 시작되자 면접관들은 작정한 듯 더욱더 나를 몰아붙였다.
사람들이 법을 경시해? 그건 아니지, 법이 사람들을 경시하는 것이 맞지.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런 생각이 법률가로서 맞는 태도라고 생각하나?”
면접관이 얼굴을 붉혔다.
우리나라의 법률 시장은 분명 조폭과 경쟁 관계에 있다. 법이 더 신속해지지 않고 구시대의 관습에 얽매여 사람들과 멀어진다면 사람들은 법이 아닌 해결사의 손에 의존하는 현상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법원권근(法遠拳近)!
나는 그 옛날 민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안면에도 회심의 어퍼컷을 날렸다. 그런 무모한 나의 행동은 기득권에 대한 불손한 도전이었다.
“뭐…… 뭐?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깜짝 놀란 면접관이 언성을 높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습니다.”
물론 법원권근을 옹호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법 현실이 그러하기에 반드시 현실을 개선하고 법이 서민의 편에 서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나를 불편해 했고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고 더욱더 내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밝혔고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야 했던 면접관은 나의 법률 지식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지엽적인 판례를 들춰내며 저열한 논리로 나를 더욱더 압박했다.
“알았네. 그만 나가보게.”
내가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답변하자 당황했는지 면접관이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벌게진 이마에 올려놓았다.
결국, 심층 면접 대상자로 분리된 나는 좀 더 강도 높은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나의 신념을 불순한 사상으로 간주하며 불편해 했다.
“자네의 사상은 법률가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네. 그런 식으로는 법률가가 될 수 없어!”
목에 칼을 겨누며 협박했다.
“박상우 군! 다시 묻겠네. 여전히 같은 생각인가? 자네의 능력이 아까워서 그러네.”
미전향 양심수들의 귀화를 설득하듯 나를 회유하기도 했다. 그들만의 성 밖에서 의미 없는 짱돌을 던지지 말고 제도권 들어와 그들과 함께 세상을 내리깔아 보자는 것이었다.
“네, 변함이 없습니다.”
바꿀 수 없다면? 아니,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의 충실한 개가 될 수 없었다.
2006년 12월 1일, 1002명의 면접 대상자 중 최종 탈락자 1명은 바로 나, 박상우였다.
이유는 내가 법률가로서의 올바른 자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한 것에 관한 잔혹한 보복이었다.
잘못된 선택이었어! 이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야.
꼴통이라 말해도 좋다. 또라이라 해도 괜찮다!
I will do it my way!
이렇게 처음이자 마지막 나의 사법시험은 끝이 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