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에필로그. 종방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에서 MC가 게스트를 소개했다. 방청객들이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배우들의 뒤에 드라마 타이틀이 그려진 벽이 있었다.
BUILD THE EARTH.
빌어 처먹을 드라마.
“야. 저거 꼭 봐야겠냐?”
“왜!”
“좀 더 생산적인 걸 봐라. 교육방송 같은 거.”
“이것도 충분히 생산적이거든?!”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정해영의 등에 발을 올렸다. 높이가 적당한 게 딱 좋았다.
“발 내리라고!”
“나라도 널 발받침대로 써 줘야지.”
“더러운 발 치우라고!”
“너보다 깨끗하거든.”
“오빠는 존재부터가 더럽거든?!”
“어허, 어디 지엄하신 오라버니한테.”
발에 힘을 주었다. 정해영은 몸을 뒤틀었지만 소파에 앉은 나와 바닥에 앉은 정해영 사이에는 태생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는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지르는 정해영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너 저 드라마 엄청 욕했지 않냐?”
“그건 15화였고.”
“16화도 욕했잖아.”
“음.”
“재방 보면서도 욕했거든, 너.”
“…….”
정해영은 발끈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결말을 그따위로 낼 수 있냐고! 난 용납할 수 없어!!”
“니가 안 하면 어쩔 건데.”
“시청자 게시판 테러할 거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 이미 했잖아.”
정해영이 시선을 피했다.
씩씩거리는 게 좀 불쌍해서 진정할 수 있도록 드라마에 대해 물어봐 주었다.
“15화에 다 죽었다며? 그거 수습은 됐냐?”
“수습이 됐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오히려 더 흥분했다.
“등장인물 대부분을 죽여 버린 건 그렇다 쳐.”
“그래서.”
“내 새끼는 살았으니까 됐거든. 난 내 새끼만 살아 있으면 돼.”
“인성 봐라.”
“다 오빠 닮아서 그래.”
“왜 본인의 부덕함을 내 탓이라고 하냐.”
정해영은 등 뒤로 손을 휘저어 내 발을 마구 때렸다. 그 꼴이 좀 불쌍해서 등에서 발을 내려 주었다.
“어쨌든 내 새끼는 살아서 됐는데, 뭔 이상한 애가 내 새끼를 찌르고 튀는 거야.”
“그러냐.”
“좀 의심스럽게 행동하긴 했는데 그동안 존재감이 없던 놈이 거기서 그런 사고를 칠 줄 누가 알았겠어?! 역시 작가가 미쳤어. 아냐, 어떻게 이딴 대본을 그대로 드라마로 만든 거지?”
역시나. 정해영의 사감을 덜어내고 사실을 추측해 보면 확실히 이산예의 꿈에서 보았던 것이 이 미친 드라마의 16화였다.
“아.”
정해영이 뭔가 불길한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왜?”
“내 새끼 찌른 그 개새끼 인상이 뭔가 오빠랑 닮았어.”
“내가 배우 닮았다고?”
“무슨 미친 소리야. 오빠는 그 배우 발톱 때처럼 생겼고.”
다시 정해영의 등에 발을 올렸다.
정해영은 마구 발버둥 치다가 깨달음을 되씹었다.
“왠지 처음 봤을 때부터 정이 안 붙는다고 했었지……. 배우한테 유감은 없지만 첨부터 느낌이 안 좋았어.”
“그래서 걔가 니 새끼 찔렀다고?”
“그렇다니까!”
“그러고 끝?”
“그러고 루프 되고 끝났어!”
거기까지가 16화였군.
“그게 마지막 화라고! 미친 거 아냐? 미친 거지!”
정해영은 이를 으득으득 갈며 TV를 노려보았다. TV 화면에는 정해영의 내 새끼가 손요운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러면 원래는 배역 이름이 모두 본명이었다고요?]
[네.]
[그래도 재밌었을 것 같았겠어요.]
[작가님은 바꿔도 괜찮다고 했지만, 정작 연기하는 장본인들은 자기 이름 그대로 쓰고 싶어 했었어요.]
[그렇지만 결국 이름 바꿨죠?]
[아무래도… 다른 것보다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다고. 조심하는 게 낫죠.]
[그쵸. 박서원 씨 같은 경우에는 살벌한 기사가 많이 날 수 있잖아요?]
패널의 농담에 박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저놈이 저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싶어서 조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고 보니 그 소문이 있던데!]
[어떤 소문이요?]
[드라마 작가님이 서원 씨 후배라고……]
[아, 그거요?]
[아니, 요운 씨는 왜 빵 터지셨어요?]
손요운은 박서원의 어깨를 붙잡고 큭큭 거리며 웃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긴 한데, 또 사실이 아니거든요.]
[어머, 그럼 뭔데요?]
[후배가 맞긴 한데, 서원이, 서원 씨보다는 서원 씨 동생 친구라고 하는 게 정확해요.]
[그래요? 그럼 동생이 오빠 등장을 늘려 달라고 청탁 넣고 안 그랬어요?]
[말도 마세요. 자기 오빠 빨리 죽이라고 제 눈앞에서 청탁 넣고 그랬어요.]
[아, 그래서……]
패널은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요운은 웃음을 터뜨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건 아니고요. 그건 다음 시즌과 연결되는 떡밥이라서요.]
“헉! 다음 시즌!!”
가만히 잘 보고 있던 정해영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래, 양심이 있으면 시즌 2 내놓으라고!!!”
[시즌 2 나오는 거 확정되었나요?]
[그게 얘기가 좀 복잡한데.]
[아니, 도대체 안 복잡한 이야기가 있긴 한가요?]
손요운이 쓰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빌더쓰가 캐스팅으로 말이 많았잖아요?]
[제작비 캐스팅한다고 다 날려 먹었나 이야기가 많았죠.]
박서원은 좀 더 솔직하게 설명을 했다.
[그으렇죠. 아무래도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아, 혹시 그분들이 계약을 시즌 하나만…?]
[그건 아니고요. 빌더쓰에 나왔던 배우님들은 만약 후속 시리즈가 만들어진다면 그대로 출연하신답니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럼 뭐가 복잡한 이야기인가요?]
[국장님이.]
[국장님이?]
[예전에 은퇴하셨잖아요.]
[그쵸. 저 그분 팬이었는데 일찍 은퇴하셔서 너무 아쉬웠어요. 이번에 짧게나마 복귀하셨었죠? 진짜 좋았어요.]
화면 아래에 국장의 얼굴이 작게 자료 화면으로 나왔다.
…청룡 얼굴이네.
[국장님이 은퇴한 이유를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 막둥이가 태어났대요.]
[…막둥이요?]
[네. 육아한다고 그냥 배우 일 접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하.]
[그런데 국장님이 출연하셨던 드라마나 영화가 너무 옛날 거다 보니까, 막내가 아빠가 배우라는 걸 안 믿는다고.]
[아, 그래서!]
[네, 그래서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신 건데요.]
손요운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박서원도 실실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에 아빠가 나오는 걸 보더니 막내가 엄청 싫어했대요.]
[아니, 왜요? 국장님 되게 멋지게 나오시던데.]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아빠 얼굴 보니까 깬다고.]
[…음. 이해가 되네요. 막내가 몇 살인데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랬던가.]
[아이고, 어리네요.]
국장의 비극에 안타까워하던 패널은 갑자기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혹시 그래서 드라마 다음 시즌 컨펌이…?]
[에이, 국장님이 그렇게 속 좁으신 분은 아니죠. 아니겠죠. 아들 반응에 상처는 좀 받은 것 같은데, 그게 이유는 아니고요.]
[그럼요?]
[복잡한 이유라고 하더니 아예 상관없는 이야기만 하시고 계시네.]
박서원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번엔 진짜 얘기해 드릴게요.]
[진짜죠?]
[사실 컨펌 났어요.]
“꺄아아아아!!!!”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비명이 바로 앞에서 들렸다. 나는 인상을 쓰며 발로 정해영의 등을 꾹꾹 눌렀다.
“야, 지금 밤이야. 민폐니까 조용히 해.”
[다음 달부터 촬영 들어가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욕을 했던 그 캐릭터가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박서원 씨가 연기한 박제영이 언제부터 음험한 속내를 숨기고 있었는지!]
[손요운 씨, 그러면 되게 나쁜 놈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아, 하긴 나쁜 놈은 아니었죠. 마지막에 뒤통수 맞은 호구라면 모를까.]
[이러기에요?]
[이러깁니다.]
손요운과 박서원은 투닥거리며 장난을 쳤다. 낯선 광경이지만 동시에 즐거워 보였다.
손요운에게는 기억이 있겠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기미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인간의 영웅이었던 소방관과 저기서 장난치고 있는 배우를 연결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이건 이것대로 평화로운 세계의 상징 아니겠는가.
TV 속에서 손요운과 박서원은 여전히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빌더쓰 시즌 2에서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풀리겠군요!]
[그러지 않을까요?]
[솔직히 거기서 끝내는 건 너무했어요. 저도 보다가 비명 질렀다니까요?]
[끝났으니까 얘기하는 건데, 연기한 저희는 어땠겠어요.]
[마지막 화 대본 받았을 때 서원 씨가 작가님한테 달려갔다니까요? 진짜 이렇게 끝나냐고.]
[그건 15화 때 했어야 하는 일 아닐까요?]
[당연히 그때도 했죠.]
박서원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러려니 하는 거예요. 저만 이상한 사람 됐다니까요?]
[다들 작가님을 믿었던 거죠.]
[믿을 게 따로 있지!]
사람 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더라도, 도시 한복판에 나타난 괴물에 의해 수많은 생명이 죄 없이 스러질 일도 없고,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울부짖을 일도 없다.
적어도 저 세계의 누군가는 꿈꿨을 세상이다.
누차 말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시즌 2는 언제부터 방영하지? 기사 안 떴나? 미쳤다, 미쳤어. 내 새끼 이야기 나오는 거면 분량도 많겠지?”
정해영은 휴대폰을 쥐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헉, 내 새끼가 주인공이면 어쩌지? 나 그럼 진짜 죽을지도 몰라. 오빠, 알았지. 내가 죽으면 사인은 내 새끼 이름을 써 줘.”
“아주 지랄을 해라.”
정해영은 왜 점점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거지. 어렸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기어 다니면서부터 정신이 나간 것 같다. 도대체 쟤는 뭐가 문제일까.
“근데 오빠.”
“왜.”
“이 더럽고 냄새나는 발은 이제 좀 치워 주지 않을래?”
“네 더럽고 냄새나는 등을 받침대로 써 주는 착한 발이잖아. 고맙게 여겨라.”
“아주 지랄을 해요.”
정해영은 등을 마구 뒤틀다가 몸을 앞으로 옮겼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쫓아갈까 하다가 귀찮아서 발을 내렸다. 정해영은 TV에 나오는 박서원의 얼굴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그때, 진동으로 해 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라도 온 줄 알고 무시했는데 재차 울리고 있었다. 정해영은 바닥에 있는 내 휴대폰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
“오빠, 전화.”
그 말에 휴대폰을 보았다.
“그냥 번호만 떠 있는데? 이 시간에 누구야?”
“나도 몰라. 줘 봐.”
정해영이 휴대폰을 주었다. 010으로 시작되는 열한 자리 번호.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다. 하지만.
끝자리가.
끝자리가, 알고 있는 숫자다. 절대 잊지 않기로 맹세했던 숫자.
1221.
12월 21일.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겨우 잡았다. 정해영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지금은 정해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쟤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고요한 침묵이 익숙하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작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해준 씨, 인가요…?”
긴가민가한 목소리다. 아는 숫자. 아는 목소리. 이제는 더 이상 더듬지 않는다.
나는 겨우 말했다.
“……나, 그. 생일 선물, 늦었는데.”
“아.”
연말 연초라 친구 놈들과 약속이 많았던 것 같지만 알 게 뭐냐. 이 약속은 그보다도 먼저 잡았던 약속이다. 무려 9월부터 있었던 약속이라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덩달아 같이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받고 싶은 거 생각해 놨어요?”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