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201화 (201/202)

# 201

53. 그 드라마의 15화(5)

청룡은 말했다.

‘자네들은 건너갈 수 없어.’

그것이 그들이 걷기로 한 길의 대가였다. 구민석은 내게 여우 구슬을 주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가 손요운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구민석과 박서원, 쌍둥이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정해영이 보던 그 드라마에는 나왔을까?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그 길이 제대로 된 인간이 걸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쌍둥이의 업은 박서원에게 모두 떠넘겼다고 하지만 업이 넘어갔다고 해서 본인들이 죄가 없다고 생각할 성격도 아니다.

봐라.

“잠깐!”

“우리는 왜? 우리도 같이했잖아!”

“자네들의 업은 서원 씨가 건네받았으니까.”

구민석은 덤덤하게 사실을 말해 주었다. 쌍둥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박서원은 쌍둥이를 보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난 안 갈 거야.”

“나도 마찬가지네.”

“그러니까 왜!”

“난 내가 저지른 잘못을 외면할 생각은 없었어. 이렇게 세계 자체가 꼬여 있는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잘됐네.”

오히려 박서원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이쪽의 혼이 저쪽에 스며드는 거잖아? 그건 저쪽에도 박서원이 있다는 말이겠지. 여기 정해준 씨가 그 증거고.”

박서원은 흘깃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내 빈 자리는 못 느낄걸.”

“그걸 말이라고!”

“미친 새끼가! 그래서 여태 입 닥치고 가만히 있었구나!”

백주연이 마구 짜증 내며 머리를 쓸었다. 목덜미가 새빨개질 정도로 화를 내던 백주연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그럼 나도 안 가.”

“…뭐라는 거야?”

“그건 내가 할 소리고.”

백주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번엔 표정이 반대가 되었다.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해진 백주연과는 다르게 박서원이 인상을 썼다.

“나도 안 가.”

“미친 새끼가.”

“너도 안 간다며.”

“너랑 내가 같아?”

“다를 게 뭔데?”

“하연이는!”

“그건 쟤가 갈 거야.”

이번에는 백주하가 인상을 썼다. 백주연은 백주하가 무어라 하기 전에 그 이유도 설명했다.

“연장자잖아.”

…아주 설득력 넘치는 이유였다.

“늙으면 집에 가야 해.”

설득력이 넘치다 못해 백주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백주하가 노성을 내지르기 전, 손요운이 난감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저기.”

“왜요. 지금 가족 문제로 바쁜 거 안 보입니까?”

“바쁘신 건 아는데, 하나 정정할 게 있습니다.”

퉁명스레 대답하던 백주연이 손요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빨리 말하고 꺼지라는 얼굴이다.

손요운은 그 살벌한 눈빛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아까 제 말 못 들으셨습니까?”

“뭘요?”

“서원 씨나 주연 씨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

“싫다 해도 전 다 데려갈 겁니다.”

인간의 영웅은 시원스럽게 선언했다.

박서원과 백주연은 멍청한 얼굴로 손요운을 보았고, 구민석은 결국 박장대소를 하며 쓰러졌다.

* * *

오늘의 여의주와 쌍둥이의 여의주가 모두 내게 넘어왔다. 저쪽과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나였기 때문에 소원을 말하는 것은 ‘내’가 되어야 한다.

교위는 남은 병사들의 갑옷에서 하나씩 떼어 낸 곡식 알갱이를 주머니에 담아서 주었다. 자신의 몫으로는 피리를 건넸다.

한평화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 손에 활짝 핀 파란 연꽃을 올려 주었다. 호수에 있는 것도 파랗다고 생각했는데, 한평화가 작정하고 완전히 피워 낸 숨살이꽃은 숨이 막힐 정도로 새파란 색이었다. 하늘보다도, 바다보다도 더 푸른 연꽃은 화려하게도 폈다.

그 숨살이꽃을 보며 한진열이 다가왔다.

“어쩐지 훈열이가 어제 꿈자리가 안 좋다고 하더라고.”

“……저주하는 겁니까?”

“아니. 인사를 못 했잖아.”

“……그것뿐입니까?”

갑작스럽게 이 일에 끼어든 호랑이치고 한진열은 모든 걸 이해했다.

“저기 있는 이무기는 너무 어려서 못 느끼나 본데, 이 공간은 좀… 특이하거든.”

한진열이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동안 철없는 동네 양아치처럼 보이던 호랑이가 처음으로 그 나이에 걸맞은 노숙함이 보였다. 청년의 생기와 나이 든 이의 지혜가 깃든 눈동자다.

“여긴 온갖 시간이 모이는 곳이야. 아마 몇 번이고 이곳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을 거야. 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어.”

한진열이 코를 킁킁거렸다.

내게는 버드나무와 연꽃향만 맡아졌다. 산함박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음, 모든 건 일어날 일이라는 거지.”

“……제대로 설명할 자신 없으면 빨리 넘기고 가세요.”

“그래, 그래. 빨리 꺼지라는 거지.”

한진열은 어깨를 으쓱이며 담배를 꺼냈다. 담배 케이스였다. 겉면에는 자개로 소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끝에 빨간 술이 매달려 있었다. 저 빨간 술은 송희선이 만든 것이다.

“우리 나무가 만들어 준 거야. 난 아직 미숙하지만, 어린 호랑이들이 다 크지 않은 지금은 남한의 유일한 산주인이거든.”

“남한이요?”

“그래. 내 터전은 북쪽에 있지만, 내 영역은 남한 전체야. 임시직이지만. 그래도 도움은 될 거야.”

나는 담배 케이스를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손요운과, 박서원.

“해준 씨.”

손요운은 교위가 괴테 동상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꺼낸 책 무더기를 내밀었다. 모든 우투리의 역사. 모든 우투리의 기억.

책 꾸러미 가장 위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서책이 있었다. 군데군데 까만 먹물이 묻어 있었다.

“이건 제 기록이겠죠.”

손요운은 쓰게 웃었다. 먹물로 얼룩진 책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먹물의 새까만 색은 산함박의 색과 닮아 있었다.

“이제 해준 씨도 가족을 보러 가세요.”

그 책을 내게 주며 손요운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번엔 찌르지 말고요.”

“안 찌른다니까요.”

나는 픽 웃으며 손요운과 악수를 했다.

그리고 박서원의 차례가 되었다.

“후회 안 합니까?”

“그걸 왜 해요.”

박서원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박서원 씨 데려가려고 호랑이님께서 대가를 지불하시기로 했잖습니까.”

“자기가 좋아서 한다는데 뭘 어쩌겠어요.”

“박서원, 나 다 듣고 있다!”

“원래 늙으면 귀만 밝아진대요.”

“나 호랑이거든? 원래 귀 좋거든?!”

본래는 손요운이 데려가려고 했다. 인간의 영웅은 모두를 구하려고 했으니까.

그걸 거절한 건 박서원이 아니라 한진열이었다.

‘내 가족이야! 내가 데려갈 거야. 신세를 질 순 없지.’

한진열은 청룡과 둘이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뭘 대가로 지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진열은 만족스러워했다.

구민석에게도 손요운은 손을 내밀었지만 여기는 본인이 거절했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발 내 죗값을 좀 치르게 해 줘!’

여우 구슬은 이미 내게 주었기 때문에, 구민석은 남은 꼬리를 바치기로 했다. 어쩌면 저쪽 세상의 구민석은, 아니. 구미호 백과는 꼬리가 하나인 평범한 여우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의 일을 모두 잊어도?”

“그게 내 죗값이라면.”

박서원은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한진열이 박서원을 데려간다 하더라도, 박서원 또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박서원이 죽인 것 중에는 죄가 없는 영물도 있었기 때문에.

박서원은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청룡님이 혹여나 기억을 찾을 수 있다는 그런 기대도 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 기적은 없다고.”

“그래서요?”

“…박서원 씨는 가족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박서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내가 기억이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다른 사람들은요?”

“…….”

“이곳이 시간의 한가운데라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꿈으로 남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죠? 그렇지만 여기에 없는 사람들이 더 많거든요, 정해준 씨.”

“…아.”

“기껏 구해 내 놓고서 기억이 없다고 다른 사람 취급할 거면 이 방법으로는 안 되죠.”

박서원은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도 가족을 보러 가는 거예요.”

그래. 그거면 되었다. 박서원에게는 그거면 된 것이었다.

나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박서원은 싱겁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정해준’처럼 박서원을 찌르는 대신, 그냥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악수가 끝났을 때, 박서원의 여의주가 내게 넘어왔다.

마지막으로, 나는 청룡의 앞에 섰다. 청룡의 등 뒤에서 이산예가 작게 웃었다. 청룡은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채 근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자, 내게 질문을 해도 좋고 부탁을 해도 좋네.”

아사달이 서울에 비를 퍼부었던 날, 청룡이 내게 약속한 것.

나는 입을 열었다.

“청룡님과 다른 용들의 여의주를 주십시오.”

그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아니, 하나가 더 남았다.

“오늘 씨.”

나는 오늘 앞에 섰다. 아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 있다.

“네, 네?”

“생일 선물, 못 주게 됐네요.”

이게 이곳에서의 나의 유일한 미련.

“대신, 부모님이 잘 계신지는 오늘 씨가 두 눈으로 꼭 확인하세요.”

그렇지만 충분하다.

* * *

버드나무 아래에 난쟁이가 서 있다.

청룡은 길만 열어 주었고, 난쟁이가 자력으로 넘어왔다. 이 상황에서까지 영업 의지가 남다르다. 내가 어떤 소원을 빌지는 이미 알고 있는데도.

난쟁이는 여전히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자네는 운이 좋아. 오늘이 마지막 영업일이거든.”

“하긴 요즘 좀 불경기죠.”

“…폐업은 아니고. 그냥, 다른 일을 해 보기로 했네. 취미 생활도 좀 하고.”

“그러십니까?”

“악마도 여기 있는데. 보겠나? 아주 길길이 날뛰고 있다네.”

“시끄러우니까 됐어요. 딱 좋게 작별인사를 하고 왔는데 기분 잡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 어쩔 수 없고.”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러나 푹신한 버들잎 덕분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난쟁이가 입맛을 다셨다.

“소원을 빌겠나?”

“네.”

나는 난쟁이가 주었던 플라스크를 열었다. 꿈쩍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던 흰 쥐가 마침내 코를 씰룩이며 눈을 떴다.

플라스크 주둥이를 기울이자 흰 쥐는 잠깐 멈칫거리다가 플라스크를 기어 나왔다. 손바닥 위를 간질거리는 작은 온기에 그냥, 웃었다.

‘정해준’은 그가 생각한 최선의 행동을 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버드나무 아래라면 나쁘지 않다. 결국 그는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손바닥 위에서 멈칫거리던 흰 쥐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긴 꼬리가 살랑거린다. 흰 쥐는 그대로 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소원을 빌겠습니다.”

나는 ‘우리’의 가족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 * *

……이 틈새에서만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군.

우리가 시간을 읽을 수 있는 건 지금뿐이니.

아직도 내 생각은 그대로네. 차라리 내가 천장이 되고, 자네가 기둥이 되는 게 낫지 않겠나.

그건 이미 이야기가 끝났지 않나.

자네가 멋대로 끝내 버렸지. 이 땅의 수호룡은 자네잖나. 그리고 보게. 나는 이미 수없이 실패하였네.

이 세계는 여전히 숨 쉬고 있지 않은가? 그럼 실패가 아니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계속 실패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이게 최선이라고 믿네.

……다음번에는 내가 천장이 되도록 하지.

고맙네.

이 순간이 지나면 나는 중양절이 될 때까지 이 대화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거네. 그러니 한 번 더 말하지.

이번에도?

이번에도.

그래, 얼마든지 말하게나.

자네는 정말 몹쓸 친우야.

자네는 정말 믿음직한 친우지.

그럼 다음 과거에서 보게나.

어쩌면 이번이 끝일지도 모르지. 희망을 가지자고.

……우리의 기다림이 끝날 수 있기를?

이번에는 부디 인간이 스스로 운명을 자아낼 수 있기를.

* * *

머리가 아팠다. 쓸모없는 꿈을 꾸었다.

‘정해준’의 기억이 각오했던 것보다 강렬하다. 미친놈. 그리움도 없고 겁대가리도 상실했고, 그냥 정신머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모양이었지.

“오빠!!”

근 일 년 만에 듣는, 그러나 어제도 들었던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일어나! 밥 먹어!”

속에서 울컥하는 뭔가가 있었다.

“밥! 밥! 먹! 어!!”

이불을 들추는 손이 있다.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씨발. 그동안 개같이 그리웠던 개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정해영.”

“왜?”

“잠깐 돌아봐 봐.”

“왜?”

“뭐 묻은 것 같아서.”

정해영은 별 의심 없이 등을 돌렸다. 이렇게 멍청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려나.

나는 잠깐 각도를 쟀다. 오랜만에 해서 잘 될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찰싹!

“악!”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미쳤나! 아침부터 왜 지랄이야!!”

찰싹!

“엄마!! 정해준이 나 괴롭혀!!!!”

“얘는 또 오빠 이름 막 부르지!!”

부엌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정해준! 너도 동생 그만 괴롭히고 나와!”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운 목소리였다.

밥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방 하나 딸린 12평 오피스텔이 아니라, 방 네 개, 욕실 두 개의 비밀번호 9298의 43평 아파트.

감상에 흠뻑 젖어 있지만 아직 하나 해결할 일이 있다.

“야.”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방을 나가는 정해영을 둘렀다.

“왜!”

“너 그 보는 드라마 있잖아.”

“응? 왜? 볼려구?”

“아니. 내가 미쳤냐.”

“……그럼 왜?”

“그거, 제목이 뭐냐?”

정해영은 눈을 깜빡이다가 별 이상한 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빌드 더 어스! 영어로!”

기운이 쫙 빠졌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쓸었다.

씨발, 제목이 스포일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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