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53. 그 드라마의 15화(4)
“……네?”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요가 번진다.
이미 손요운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나와 구민석은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청룡의 얼굴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표정이다. 그러나 그 얼굴에 당혹스러움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은 홀가분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건 우리가 제대로 짚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청룡에게 어떤 속사정이 있었는지는 상관없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손요운은 한 번 더, 강하게 말했다.
“돌아가는 거요. 어차피 이게 억지로 붙잡아 둔 세상이라면 그 방법도 나쁘지 않습니다. 괜찮죠. 팀장님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손요운은 우울한 눈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다정한 목소리다.
“하지만, 팀장님.”
그런 목소리로 끝까지 팀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우투리의 고집이 느껴졌다.
“돌아가는 건, 시간뿐이잖습니까.”
“……그. 그런, 그렇지요.”
아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딱히 괴롭힐 생각이 있던 건 아닌데. 손요운도 느꼈는지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
“누군가 이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다르겠죠. 하지만 그러면 대가가 달라질 겁니다.”
그건 ‘정해준’이 빌고자 했던 소원이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정해준’의 영혼을 수거하지 못하게 될 거라 직감했던 악마가 한발 앞서 혼을 빼돌리는 바람에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정해준’ 하나가 넘어가기 위해서도 그 많은 대가가 필요했다. ‘정해준’이 아니더라도, 여기까지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누군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건 보통 대가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산예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저 어린 용은 자신이 보았던 미래를 피하기에 급급했으니까.
이산예도 손요운의 말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팀장님은 팀장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끔찍한 구더기에게 잡아먹혔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하다.
그런 기억이 있는데도 인간을 구하고자 했지 않은가. 오히려 어린애치고는 너무 열심히 했지.
아니면 이것도 ‘일어날 일’이었다거나.
일어날 일이었기에 지하국에서 구두 장군이 기어 나온 것처럼 이 또한 일어날 일이기에 이산예가 맹목적으로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팀장님은 열심히 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한 거죠. 그러니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어날 일이든 아니든, 따지고 보면 어린애가 급조한 계획이지 않은가. 당연히 실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걸 보완해 주는 게 어른이 할 일이다.
청룡의 옷자락을 꾹 쥐는 작은 손이 보였다. 청룡은 아들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요운에게, 우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최선을 다할 것인가?”
* * *
‘서원 씨가 아니라 내게 찾아온 이유가 뭔가?’
‘회장님은 가능만 하다면 얼마든지 이곳을 버리고 떠나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쓰레기 같잖은가.’
‘요운 씨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최소한 손요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구민석은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그래서 왜 찾아왔다고?’
‘가정이긴 합니다만.’
손요운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만약 이 모든 게 계속해서 일어난 일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손요운에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표정도 딱 저랬다. 그러나 나와 이야기했을 때와는 달리, 손요운은 그걸 타개할 방법도 함께 제시했다.
인간의 영웅이 선택한, 이 세계가 나아갈 길.
‘해준 씨 덕분에 길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건너가는 건 어떻습니까?’
“와!”
쌍둥이는 어이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대신 배신이라도 당한 과장된 표정으로 구민석을 보았다.
“너무하네, 진짜. 우리가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고요?”
“박서원이면 몰라도 우리한테는 귀띔이라도 줄 수 있었잖아요.”
“아니, 내가 왜?”
구민석은 쌍둥이의 같잖은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다.
“자네들이 뭐가 예쁘다고.”
“회장님 진짜 너무하시네.”
“…이제 정말 마지막인데 부회장이라고 좀 불러 주면 안 되나?”
“마지막이니까 회장님이죠. 원래는 진짜 죽이려고 했었죠?”
“…인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살아 있었으면 죽이려고 했었지.”
구미석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사실은 좀 더 일찍 죽이고 싶었는데, 그 남자도 아들을 끔찍이 아꼈거든.”
그래서 결국 못 죽였다는 소리다.
박서원은 피식 웃었다. 구민석은 그런 박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영웅께서 날 끼워 줄 줄은 몰랐어.”
“그래요?”
“나름 원수 아닌가? 우투리가 날 죽인다고 나서면 죽어 줄 생각까지 했다니까.”
“요운 오빠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그래, 아가씨. 알아. 그렇지만 나는 악당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자네 오빠가 해준 씨와 찾아왔을 때는 솔직히…. 내게만 좋은 제안이 아닌가 했었어.”
“딱히 그건 아닙니다.”
나는 구민석의 말을 정정했다. 오늘에게 손을 붙잡혀서 몸을 돌리지는 못했다. 오늘은 내 손에 이마를 딱 붙인 채로 기도하고 있었다. 여의주를 온전하게 옮기기 위한 작업이었다.
“박서원 씨가 반대하면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회장님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어깨너머로 호랑이를 슬쩍 보았다. 송희선이 호랑이의 상처를 보고 있었다.
“한진열 씨가 올 줄 알았으면 저쪽에도 부탁했을걸요.”
“허. 날 이렇게 홀대하다니.”
구민석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곧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실컷 하게나.”
“다, 다 됐, 어요.”
오늘은 내 손을 붙잡고 싱긋 웃었다.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순간이 왔는데도 오늘은 늘 그렇듯 내게 웃어 주었다.
오늘이 손을 놓자 구민석이 끙, 하며 다가왔다.
“다음은 내 차례인가?”
“구슬을 내놓아도 버틸 수 있습니까?”
“해 봐야지. 지난번 시간에는 좀 버티긴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서원 씨보다야 낫겠지. 그리고 설사 내가 죽더라도 세계를 넘어가는 건 위대한 청룡님께서 어떻게 해 주지 않겠나?”
“그렇게 욕을 하더니 이젠 위대한 청룡님?”
“저 늙다리 손에 달려 있는데 뭘 어쩌겠나.”
구민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청룡은 못마땅한 듯 여우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하지 않겠나?”
누구에게 던지는 말인지 모르겠다. 구민석에게, 혹은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고, 손요운에게, 아들에게 묻는 말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묻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일 수도 있고.
“그게 업이 될지, 아니면 덕이 될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네.”
청룡의 허리춤에는 여전히 아들이 매달려 있다. 청룡은 긴 옷자락으로 아들을 감싸며 말했다.
“덕이 되면 다행이지. 하지만 업이 된다면 자네가 원래대로 돌아간 뒤 자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네.”
“저쪽에는 그런 게 없다니까요.”
“자네의 삶이 아주 비참해질 수 있어.”
“그래서 저도 감당하기로 한 겁니다.”
손요운이 끼어들었다.
“백지장도 맞들어야죠.”
“…백지장 수준이 아니네만.”
“저, 저도, 가, 같이…….”
오늘이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저도요.”
서다흰이.
“몇 번을 말해요!”
한평화가.
“제가 지은 죄는 제가 업고 가야지요.”
송희선도.
“애들이 저러는데 보호자인 내가 어쩌겠어.”
한진열까지.
“저희도 있습니다!”
인간인지 아닌지 뭐라 말하기 힘든 곡식 병사들도 우렁차게 외쳤다.
“…그렇다는데?”
구민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쌍둥이와 박서원을 보았다.
쌍둥이는 피식피식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연이 한 번 더 보고 올걸.”
“수능 엿도 못 사 줬는데.”
그게 그들의 유일한 미련이었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청룡은 다시 한번 물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잊기 위해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이 물이라도 끼얹어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자네들이 정말 60억이 넘는 인간들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세계의 인간의 수 60억. 77억이 넘던 저쪽 세계를 생각하면 이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뻔하다.
당연히 손요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손요운이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저 한순간의 이기심으로 판단하였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네. 독단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차라리 이 땅에서 죽겠다고 하는 이도 있을 수 있겠지.”
알고 있다.
“하지만!”
정적을 깨고 한평화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외쳤다.
“우리 아빠가 살 수 있잖아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목소리였다.
“내 동생이 아빠처럼 될까 봐,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고!”
한질열이 한평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한평화는 자신을 끌어안는 할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
“뉴스에서, 아빠가 죽는 걸 안 봐도 되잖아.”
“…설사 이것이 감당할 수 없는 업이 되어도, 괜찮다는 소리인가?”
청룡은 거듭 물었다.
“자네들의 족적이, 그저 꿈으로 남게 된단 말이네.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전설로 남아 사라지게 될 걸세. 정말로 만족하는 건가?”
“말은 바로 하시오.”
구민석이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전설로만 남게 되는 건 당신네 용들과 우리 여우, 그리고 저기 있는 호랑이 정도겠지. 이들은 인간이고, 지금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야. 오히려 죽은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나.”
손요운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을 되풀이하면서 발이 묶인 이 세계의 영혼이다. 갈 곳을 잃어버린 쳇바퀴를 돌 듯 시간을 돌고 있는 하얀 쥐들.
하얀 쥐가 보았던 것들은 모두 꿈이 된다. 영물이나 요괴, 초능력 따위는 이야깃거리로만 남는다. 하얀 쥐는 그들과 같은 혼, 같은 백을 지녔지만 다른 세상의 인간에게 녹아들게 될 것이다. 그저 짧은 꿈을 꾸었을 뿐이다.
죽었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도 모두 꿈이 될 것이다.
구민석은 청룡에게 물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서해용왕, 그대는 괜찮은가?”
“…….”
청룡이 빙그레 웃었다.
“인간들이 택한 길이라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네.”
“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들도 그렇다는군.”
“그럼 됐네.”
구민석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청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님의 말씀대로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곳에 계속 남아 있고 싶어 할 테지요.”
손요운은 청룡의 질문에 이어 대답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청룡님은 알고 계셨지요?”
“꼭 그렇지는 않네.”
“하지만 부정하시지도 않으시잖습니까.”
“그래.”
“그러니 저는 그들 모두가 미래를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 가길 원합니다. 저는 아주 욕심이 많아서, 거부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모두 데려가야겠습니다.”
손요운은 시원스레 선언했다.
“그 대가는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인간의 영웅은 그것이 인간을 구하는 길이라 판단했다. 이 세계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아무도 이 세계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니 서원 씨와 회장님까지 데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