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53. 그 드라마의 15화(3)
'스님.’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청년이다. 몸을 숨기느라 급하게 구들장 아래에 들어갔던 탓에 무릎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귀한 옷이 엉망이 되었다.
‘배나무가 죽었구나.’
노승(老僧)은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 버린 나무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청년은 멈칫거리며 노승을 따라 배나무를 보았다.
‘…저 때문에 죽은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니요.’
그러나 곧 청년은 말을 바꾸었다.
‘…저 때문이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청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비를 내렸기 때문 아닙니까.’
‘하지만 네게 비를 내려 달라 부탁한 건 나지 않느냐.’
청년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되면 노승의 잘못이라 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진 않았다.
앳된 얼굴에 떠오른 갈등을 읽은 노승은 빙그레 웃었다. 숫자만 따지면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산 아이이지만 용들의 셈으로 치면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딱 떨어지지 않는단다.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 건 그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냐.’
‘그렇, 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그걸 틀렸다 판단하였기에 벼락이 쳤지.’
‘네.’
‘그리고 나는 내 부탁으로 네가 다치는 것이 싫어 너와 이름이 같은 이 배나무(梨木)를 액막이로 썼다.’
새카맣게 타 죽은 배나무는 조금 전만 해도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었다. 어린 이무기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나무의 꽃을 꽤 사랑스러운 얼굴로 보곤 했었다.
‘누가 제일 나쁜 것 같으냐.’
‘…….’
‘네게 무리한 부탁을 한 나? 이치를 거스른다는 걸 알면서도 내 부탁을 들어준 너? 그도 아니면 이 땅에 흉년을 내린 하늘?’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
‘그래. 나도 모른단다.’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승은 인자한 눈으로 이무기를 보았다.
‘옳다 생각한 일이 그른 일일 수도 있고, 그르다 생각한 일이 사실은 옳은 방향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쁜 의도가 선한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노승은 부드럽게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냐?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눈앞에 있는 이를 구하지 않을 것이냐?’
‘……아뇨.’
‘그래. 그러면 되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작은 생명부터 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결과적으로 나쁜 일이 되어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면 되는 거란다.’
청년의 눈이 정처 없이 헤매었다. 언젠가 저 어린 용도 덕과 업, 운명의 무거움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이 용의 운명이니.
다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기에, 노승은 어린 용에게 마저 가르침을 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배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단다.’
청년은 눈을 깜빡였다. 노승은 가만히 기다렸다.
어린 용은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지도 않고 타박타박 걸었다. 까맣게 죽은 배나무 아래에 섰다.
‘피어라.’
벼락에 맞아 죽은 나무가 뿌리부터 푸른빛이 돌아왔다. 잎사귀가 다시 돋아나고, 하얀 꽃이 가득 폈다.
노승은 흐드러진 배꽃 아래에 선 청년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직 물이 없어 고생하는 이들이 많다더구나. 나와 함께 그들을 살피러 가겠느냐?’
‘…제가 없으면 비를 내릴 수 없잖습니까. 스님 혼자 가셔서 무얼 합니까?’
‘그도 그렇구나.’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배꽃 하나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하는 청년의 머리에 떨어졌다. 새하얀 꽃잎이 청년의 정갈한 얼굴과 닮아서, 노승은 서해용왕이 아들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 * *
청룡은 산함박을 꽉 깨문 채 머리를 흔들었다. 포식자가 사냥감을 잡고 완전히 숨통을 끊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질퍽하게 흘러내린 업 덩어리는 호수에 녹아내렸다. 녹아서 잘게 풀어진 덩어리는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호수를 물들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호수는 연꽃과 버들잎에 의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연꽃이 있다는 것만 빼면 지하국의 강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청룡이 입을 벌렸다. 시꺼먼 물과 함께 산함박이 툭 떨어졌다.
“……생각보다 청룡님이 많이 와일드한데요.”
백주하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한평화는 저런 모습도 좋아하려나.”
“인간 모습만 아니면 된다고 했지 않았어요?”
“여자애들 취향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청룡의 회심의 일격을 받은 산함박은 미동이 없다. 숨이 끊겼는지도 모르겠다. 호수에 머리를 박은 채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게 물살에 밀린 건지, 아니면 아직 살아 있어서 단발마를 지르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명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호수는 커다란 버드나무와 새파란 연꽃, 용과 검은 구더기 때문에 도저히 현실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입을 달싹이다가 닫아 버리자 백주하는 의아한 듯 나를 잠깐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끝난 겁니까?”
“…글쎄.”
구민석은 대답을 피했다. 아직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다.
손요운은 교위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를 절뚝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머지 병사들이 손요운의 뒤를 따랐다.
백주연은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상처 때문에 멈췄다. 어정쩡하게 손을 든 채 걸었다. 백주하는 그런 형제의 모습을 비웃다가 품속에서 말린 살살이꽃을 꺼냈다.
서다흰은 재빠르게 손요운에게 달려갔다. 부상만 따지면 여기도 만만치 않다. 서다흰이 손요운의 상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인다.
호랑이는 그런 인간들을 슬쩍 봤다가 호숫가로 다가갔다. 검댕이가 묻은 노란 털이, 노란 머리카락으로 바뀌는 건 금방이었다. 호수 뒤쪽에 있던 한평화가 할머니의 곁에 찰싹 달라붙은 채 다가왔다. 오늘도 옆에 있었다.
호수 중앙에서는 어린 사자가 박서원의 손을 잡고 호수를 폴짝폴짝 건넜다. 다른 건 안 부럽지만 호수 위를 건너는 건 좀 해 보고 싶었다. 이곳에서만 가능한 기적 아닌가.
물론 이 세계에는 겨우 물 위를 걷는 기적이 아닌, 다른 기적이 필요하긴 하지만.
“큼. 크흠. 퉷.”
어느새 청룡은 인간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한평화가 싫어하는 모습이다. 호수를 가득 채우던 청룡의 모습을 본 뒤 저런 할아버지를 보게 되면 김이 샐 만도 하다.
청룡은 입 안이 텁텁한지 헛기침을 잔뜩 하다가 입에 고인 것을 뱉어 냈다. 시꺼먼 색이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어쩐지 호랑이가 발톱으로만 상대한다 했었지.
“큼큼, 그래.”
청룡도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다가왔다.
이로써 모두 모였다.
모두.
모두, 모였나?
새끼 사자는 아버지를 보자 박서원을 놓고 달려와 그 뒤에 숨었다. 그동안 어른인 척하다가 이제 와서 본 모습을 보이기 부끄럽다, 이거지. 말을 붙여 놀려 먹을까 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구더기를 물어뜯은 부친께서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진 않았다.
나는 이산예를 놀리는 대신 오늘과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늘은 나에게는 배시시 웃어 주다가 박서원을 보고는 발을 걷어차는 시늉을 했다. 박서원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에게 자신의 업이 보일까 봐 그동안 얼굴 보는 걸 피했다고 들었다. 오늘은 그 사실을 매우 분해했고,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면 정말로 걷어찼을 것이다.
“자, 그럼, 먼저.”
청룡은 주위를 둘러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누가 꺼낼 것인가?”
“…….”
그렇게 대뜸 말하면 누가 알아들어.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산함박의 여의주 말입니다.”
아들만도 못한 아빠 같으니라고. 청룡은 재차 헛기침을 하며 박서원을 향해 말했다.
“큼, 큼. 지난번에는 자네가 꺼냈지.”
“이번에는 제가 꺼내겠습니다.”
박서원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손요운이 먼저 나섰다. 청룡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떴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모두 동의하는가?”
“도, 동의는, 둘째 치고요…….”
“무슨 일인가?”
서다흰이 용기 있게 나섰다.
“저거, 그, 저, 정말, 죽었나… 요?”
서다흰은 청룡의 눈치를 조금 살폈지만 말을 도중에 멈추진 않았다. 방금 전 청룡이 보여 주었던 위용을 생각하면 서다흰의 담력도 보통은 아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면 두 발로 뛰어다니며 염주 알을 뿌리며 정화를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질문을 하기도 했고.
모두 청룡의 대답을 기다렸다. 청룡은 턱을 매만지며 허허 웃었다.
“그게 중요한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저것은 이미 운명을 다하였네.”
호수의 버드나무는 산함박을 향해 가지를 기울였다. 버들잎에 닿은 산함박의 몸은 물에 닿은 물감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청룡은 그동안 지겹도록 들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네.”
“……그건.”
“저것이 운명을 다하는 건 일어날 일이네.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날 일이지.”
“그럼 우리가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멸할 것이었습니까?”
“그건 아니지.”
청룡은 고개를 저었다.
“일어날 일이란 것은 당연히 그 일을 위한 노력이 기반이 되어야 하네. 회사에 출근해서 가만히 숨만 쉬면 돈이 들어오는가?”
“……흠.”
“요즘 인간 세상에서는 들어오기도 하는군. 예시가 잘못되었어.”
아니, 그런 부분까지 디테일을 살려 주지 않아도 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아들었다.
그러나 보기보다 인간 세상에 해박한 청룡은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다고 해야 할 일이 알아서 되지는 않지 않는가.”
좀 더 뼈아픈 비유가 던져졌다.
“노력이 있기에 결과가 있는 법. 자네들이 노력했기에 산함박의 운명이 다하는 결과가 탄생한 것이네.”
“…….”
“그러니 자네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
아마 박서원과 쌍둥이는 그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백주하가 박서원의 어깨를 두드리고, 백주연은 박서원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박서원은 신경질을 내며 두 사람을 떨쳐 냈지만 어쩐지 힘이 없는 손짓이었다.
“일단 저걸 가져오게. 그래야 진행이 되니까.”
청룡이 산함박을 가리켰다. 손요운은 이가 빠진 교위의 검을 들고 절뚝절뚝 걸어갔다. 아직 여력이 있는 교위와 서다흰이 따라갔지만 손요운이 사양했다. 그건 손요운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손요운은 비틀거리면서도 천천히 산함박의 머리까지 올라갔다. 따로 위치를 말해 주지 않아도 손요운 또한 꿈속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검을 치켜든 채 그대로 서걱서걱 칼질을 했다. 산함박이 크게 몸을 뒤틀었다.
호수가 다시 시커멓게 물들었다.
푹. 손요운은 망설이지 않고 구역질 나는 살덩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몸을 안쪽으로 깊숙이 넣어서 그런지 마치 새까만 살덩이에 오색빛깔의 봉황의 날개가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다시 호숫가로 돌아온 손요운의 손에는 칠흑처럼 검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웁…!”
볼 수 있는 오늘은 입을 틀어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송희선도 새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돌렸다. 한진열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 반응이 아니더라도 그게 불길하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이산예의 꿈에서는 꿈이었기에 느끼지 못했던 불길함이다. ‘정해준’은 저것까지 손에 넣어 돌아가고자 했었지.
“그럼…….”
청룡의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세계가 무너지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 새끼 사자의 목소리다.
산함박의 검은 구슬과 구민석의 여우 구슬. 그리고 나와 오늘, 박서원과 쌍둥이에게 있는 여의주에 본인의 것까지. 거기에 기둥과 벽이 된 용들까지.
그것들을 대가로 이산예는 세계가 무너지는 ‘일어날 일’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계획엔 고려하지 못한 점이 있다. 이산예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
손요운은 청룡의 뒤에 있는 어린 소년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손요운이 조금 올려다보는 모습이 되었지만, 소년을 바라보기에는 충분했다.
“팀장님.”
“어……. 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팀장님도 그랬고, 청룡님도 그러셨잖습니까.”
“……네.”
그 말은 용들만 한 것이 아니다. 악마도 같은 말을 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산함박을 잡는 동안 내내 말없이 굳어 있던 손요운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손요운은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무너지는 걸 피해 돌아간 세계에서, 이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