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53. 그 드라마의 15화(2)
나무가 오랜만에 집에 왔더랬다.
박서원과 함께 집을 나가고 약 7년 만에 얼굴을 보았다.
강산도 변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마냥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한진열의 나무는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염치가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 아이를 도와주세요, 아버님.’
그 옆에는 한진열이 사랑해 마지않는 증손녀, 한평화도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에 한훈열과 한진열이 어떻게 했냐 하면, 서다흰을 등에 업고 도로를 질주하는 호랑이가 답이 될 것이다. 버드나무 아래서 박서원과 티격태격하며 얘기하던 한진열은 서다흰이 호랑이의 옆구리를 냅다 걷어찬 후에야 다시 달렸다.
“그럼 저 호랑이는 무당과 바리데기가 손을 써 데려온 건가.”
박서원과 한진열이 서로에게 물을 끼얹는 걸 한심하게 바라보던 구민석이 턱을 쓸며 말했다.
“각자 한 수씩 숨기고 있었다는 말이군.”
점차 호수로 다가오는 구더기를 노려보며 나와 구민석의 어깨에 번갈아 손을 올리던 백주하가 그 말에 눈을 찌푸렸다.
“꼭 회장님도 한 수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원래 나 같은 남자는 비장의 수가 있기 마련이야.”
“비자금?”
“…아니,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나.”
구민석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콰앙!
호랑이가 전선에 합류했다. 슬슬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더욱 심해졌다. 버들잎은 여전히 휘날리고 있었지만 악취를 모두 가려 주진 못했다.
산함박의 그림자에 파묻힌 손요운은 다행히 금방 날아올랐다. 빈손이다. 손요운이 놓친 창은 어디 있는지 금방 보였다. 산함박이 움직일 때마다 눈에 박힌 창이 꺼떡꺼떡 위아래로 움직였다. 검은 물이 줄줄 흘렀다.
새까맣고 징그러워서 어디를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 몸통보다는 시뻘건 눈이 좀 더 노리기 쉬운 약점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산함박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산함박이 지나온 길을 따라 끈적이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호랑이 등에서 내린 서다흰은 그 구분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새파란 버들잎 하나가 서다흰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어흥!”
손요운과 백주연은 호랑이를 흘깃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산함박 크기를 줄이느라 뭐라고 할 틈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다. 그래서 그에 논하는 건 비교적 한가한 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가 전부 멈춘 건 아닌가 봅니다?”
“그건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 저 노인네한테 물어봐.”
구민석이 호수 아래의 청룡을 가리켰다.
“비슷한 연배 아닙니까?”
“얼굴을 보라고. 내가 저놈과 동년배로 보여?”
“그거 회장님 얼굴 아니잖아요.”
“무슨 소리야!”
구민석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내 얼굴에 가깝게 바꿨는데! 뒤집어쓰고 있는 이상 백 퍼센트 옮기는 건 힘들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기는 했지.”
턱을 쓰다듬으며 낮게 웃는 꼴이 재수 없다. 구민석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저기서 싸우고 있는 이들은 영화 속 장면 같다. 경험자의 여유인 건가.
구민석은 발톱을 세워 산함박에게 매달리는 호랑이를 보았다.
“시간을 멈춰 놓긴 했을 거야.”
“그럼 저 호랑이는 어떻게 끼어들어요?”
“그 할머니가 손을 썼을 거라니까? 한평화의 꽃을 매개체로 굴렸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크어어엉!!”
“왼쪽!”
백주연이 내 능력을 펼쳤다. 산함박의 꼬리를 맞고 튕겨 나가 그림자에 빠질 뻔한 호랑이가 그림자 대신 보호막 위를 밟았다.
쌍둥이의 능력은 박서원과 쌍둥이들이 가진 한 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초능력뿐만이 아니라 영물의 능력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건 솔직히 좀 반칙이라고 느껴질 정도니까. 제한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감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나도 저런 비장의 한 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와 손요운이 구민석을 끌어들인 것은 그런 한 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꿈에 홀려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지.
아 아 아 아…….
귀를 틀어막고 싶은 비명 소리가 그림자에서 울린다.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손은 인세에 펼쳐진 지옥처럼 바닥을 긁어 댔다. 손에 붙잡힐 뻔한 병사를 구해 내던 손요운이 그 손에 발목을 붙잡혔다.
“크윽…!”
“오빠!!”
“장군님!”
서다흰과 병사들이 손요운을 불렀다. 손요운은 창을 휘둘러 손을 뿌리치고 날아올랐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발목이 보기만 해도 아팠다.
이산예의 꿈속에서 보았던 이 광경에서는 손요운은 조금 지쳐 보이기는 했어도 큰 부상은 없었다. 대신 우투리의 병사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이 죽었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건 교위밖에 없었으니.
자신을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산함박은 나타났다. 무엇을 준비하든 자신이 전부 삼킬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새 성큼 가까워진 산함박의 모습을 보면 그런 자신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손요운과 백주연, 호랑이와 병사들의 손에 살덩이가 많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여전히 거대했고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끔찍했다. 입에서 침인지 토사물인지 모를 덩어리들이 툭툭 떨어졌다. 몇 명씩 무리를 나누어 산함박의 남은 눈을 공격하던 병사들이 그 입에 삼켜졌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싶군.”
구민석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하나 줘요?”
“오, 있나?”
그러나 구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됐어. 서원 씨가 보거든 아주 팔자가 좋다고 뭐라 할 게 뻔하네.”
“인간 하나 무서워서 안 피우는 겁니까?”
“무서운 건 아닌데 사람 성질을 살살 긁는 게 귀찮단 말이지.”
“…담배를 피우든 말든 팔자 좋은 건 마찬가지인데요.”
백주하가 구민석의 어깨를 꽉 눌렀다. 구민석은 껄껄 웃더니 정색했다.
“좋아. 그럼 우리도 슬슬 나서 볼까.”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
“회장님이 하는 건 기껏해야 어깨를 제공하는 것밖에 없잖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말하니 하는 게 없어 보이지 않나.”
“맞는 말이라면서요.”
자신들이 쌓은 업을 박서원에게 모두 넘긴 백주하와 백주연과는 다르게 구민석은 자신이 전부 감당하기로 했다. 인간사에 끼어든 죗값이라 할 수 있다. 순전히 공감과 동정으로 죽은 인간의 이름을 뒤집어썼다. 내용물은 여우일지 몰라도, 그로 인하여 관련된 인간들의 운명이 모조리 틀어져 버렸다. 작게는 죽은 아이의 부모부터, 크게는 대한민국의 초능력자들과 우투리까지.
이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든 구민석은 자신의 죄를 책임지기로 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고 백주연에게 힘을 쓰게 한 것도 그 일환이다. 인간의 껍질을 벗고 여우의 본모습으로 돌아가면 구민석은 틀림없이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죗값을 치르는 게 아니라, 도망에 불과하다.
“……왔군.”
산함박이 버둥거리며 흘러내린 그림자가 바로 코앞까지 흘러내렸다. 속이 메슥거린다.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 소리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가위!!!”
백주연이 고함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백주하가 내 어깨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나도 손을 뻗었다.
어찌 되었든 ‘정해준’이 소원을 빌어 얻은 이 능력은 마지막까지 유용하게 쓰인다. 그럼 됐지. ‘정해준’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모로 가든 쓸모만 있으면 됐지. ‘정해준’도 산함박을 잡을 때는 유용하게 썼었고.
우투리가 위로 날아올랐다. 언제 활을 받아 왔는지 이번에는 위에서 활을 쏘았다. 산함박은 공격이 날아오는 곳을 보며 공격자들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백주연이 구민석의 불과 내 능력을 번갈아 가며 쓰며 산함박을 방해했다.
이제 거리가 이만큼 가까워졌으니, 나도 가세할 수 있다.
신체 강화 능력이 하나도 없는 인간의 몸으로 산함박의 앞에서 뛰어다닐 순 없으니 거리가 가까워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도 도망갈 수 있는 구석이 없으니까.
“큭!”
백주연이 펼친 보호막이 병사들을 감쌌다. 그 위로 내가 서다흰까지 감싸며 보호막을 덧대었다. ‘정해준’의 능력은 ‘정해준’의 혼에 반응하여 내가 혼자 펼쳤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리고 백주연의 능력까지 합쳐지자.
“막았다!”
“어흐응!”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었다. 광화문 광장에 구두 장군이 나왔을 때처럼 호랑이는 보호막을 밟고 위로 크게 뛰어올랐다. 아래에 넘실거리는 그림자는 서다흰이 힘을 써 정화하고 있었다. 서다흰이 몇 등급 능력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버들잎의 보조를 받은 서다흰의 주위로 따스한 금빛이 파도처럼 번졌다. 빛에 닿은 그림자는 말라비틀어진 채 재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붉은 술을 단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염주 알이 붉은 술의 끝에 매달려 함께 휘날렸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입에서 단내가 물씬 났다.
청룡이 분리한 잠실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태양은 여전히 머리 위에 떠 있었다. 태양만 있을까, 태양의 반대쪽에는 달도 함께 떠 있었다.
“씨발, 저 새끼는 왜 안 죽는 건데!!!”
백주연이 고래고래 악을 써 댔다. 능력을 가져오는 게 무제한은 아니었던지, 구민석의 불을 계속해서 쓰고 있던 양손이 덜덜 떨렸다. 붉게 달아오른 손은 멀리서 봐도 아파 보였다. 백주연은 구민석의 능력을 사용하여 빠르게 움직이며 뒤로 물러났지만, 착지할 곳을 잘못 골랐다. 그림자 웅덩이에서 뻗어 나온 손이 백주연을 향해 아우성쳤다.
“정신 차려요!”
“…땡큐!”
보호막으로 백주연을 겨우 받아 냈다. 백주연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인사를 던지고 다시 위로 튀어 올랐다. 구민석이 함께 불꽃을 만들어 내며 보조하고 있었지만 인간 껍질 때문에 이쪽은 한계가 있었다. 구민석의 여우 구슬은 쓸 때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 껍질을 벗어던질 수 없었다.
그래도 산함박의 크기는 많이 줄어 있었다. 구민석의 비유를 사용하면, 이제 한 4층 빌딩 정도 되는 크기다. 산함박에게서 떨어진 업 덩어리는 잠실 곳곳을 부식시켰지만 서다흰이 어떻게든 정화를 해 내고 있었다.
해 내고 있었었다. 서다흰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저, 저, 이제, 무, 리……!”
처음 얘기했던 것보다 훨씬 무리했다. 서다흰은 창백한 얼굴로 내 뒤에 앉았다. 안전만 따지자면 송희선과 한평화가 연꽃을 피우고 있는 호수 뒤편이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이 문제다. 차선은 보호 능력자가 있는 이곳이다.
“고생했어요.”
서다흰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희미하게 웃었다. 잠실에 강림한 산함박에게 제일 먼저 잡아먹힌 이들 중 하나였던 서다흰은 아직 살아서 이렇게 웃고 있다. 손요운에게 그것보다 더한 동기는 없을 것이다.
손요운의 오색찬란한 날개도 지금은 빛을 많이 잃었다. 검은 오물이 묻어 있고, 산함박에게 물어뜯긴 왼쪽 날개는 오히려 초라할 지경이다. 손요운은 우투리 각성이 오래되지 않아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한 용마 대신 강원도에서 온 호랑이의 등을 타고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박서원은 여전히 버드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처음에 쓰던 검은 모두 부러져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박서원은 그 대신 잡아먹힌 곡식 병사들이 쓰던 주인 잃은 창과 검을 사용했다.
“…….”
박서원의 옆에서 초조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새끼 사자가 무어라 입을 열었다. 산함박의 울부짖음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어떤 말인지는 눈치챘다.
“선배.”
“어? 아, 됐어?”
“네.”
구민석도 알아들었다. 손에 입은 화상 때문에 제대로 불을 피우지 못하는 백주연을 대신해서 구민석이 최후의 불을 피워 냈다. 삿된 것만 태우는 여우의 정화의 불이다. 서다흰이 구민석의 손을 잡고 젖 먹던 힘까지 불어넣고 있었다.
하늘에 날리는 버들잎처럼 새파란 불꽃을 본 우투리와 한진열, 곡식 병사들은 약속대로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박서원이 후퇴를 도왔다. 여기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새끼 사자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얀 머리털이 휘날린다. 품이 넓은 하얀 옷이 머리카락과 함께 펄럭였다. 한복처럼 보이기도 했고, 중국 전통 복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어린 사자는 노래를 불렀다. 손에 쥔 건 염주가 아니라 오늘이 준 묵주다. 기원의 힘이 듬뿍 담긴 매개체.
“서역에서 유사 건너 만 리길 오느라고, 털이 모두 떨어지고 먼지조차 묻었구나.”
정화를 하며 서다흰이 뿌렸던 염주 알과, 박서원의 부러진 검에 매달려 있던 염주 알이 사자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데굴데굴 굴렀다. 짓밟히고 더러워진 버들잎 위를 구르던 염주 알이 멈추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염주 알에서 작은 새싹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머리를 흔들면서 꼬리마저 휘두르니, 온갖 짐승 어른 되는 네가 바로 사자던가.”
새싹은 호수의 버드나무처럼 금방 자랐다.
담쟁이덩굴처럼 가느다랗고 쭉쭉 뻗어 간 새싹은 산함박을 향해 자랐다.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생겨서는, 산함박이 아무리 털어 내도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옭아매었다.
푸른 잎이 시야에 가득 찬다. 호수의 연꽃잎과는 다르다. 봄 내음이 물씬 날 것 같은 색이다. 이파리 사이로 금색과 파란색 꽃이 활짝 피어났다.
“크아아아아!!!”
산함박이 몸을 뒤틀었다. 덩굴이 닿자 살이 탔다. 저 덩굴도 버들잎처럼 정화의 기운을 가득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호수에 거의 다다랐던 산함박은 고통에 몸을 뒹굴다 호수로 굴러떨어졌다.
콰아아앙!!!
그리고 호수에서 버드나무를 피우며 숨을 죽이고 있던 청룡이 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