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97화 (197/202)

# 197

53. 그 드라마의 15화(1)

버들잎이 무슨 봄날의 벚꽃처럼 흩날렸다.

버들잎이란 게 원래 그렇게 날릴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더기 하나 죽이지 못하는 전지전능한 청룡님께서 손을 썼을 것이다. 잎맥에 새파란 빛이 감도는 버들잎은 지상에 수북이 쌓였다. 이 길을 걸어오라는 듯, 버드나무가 손수 카펫을 깔아 주고 있었다.

그렇게 깔린 카펫에 산함박이 닿았다. 치지직, 하고 살이 타는 소리가 들리며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코끝이 아리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비명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구민석이 ‘잘’이라는 대책 없는 대답을 한 게 순식간에 이해가 되었다. 저런 걸 상대하고 살아남은 채로 승리했다면 나 같아도 잘 잡았다 이상으로 답할 수 없었다.

‘정해준’에게 없는 건 그리움이라고 생각했는데 겁대가리도 같이 사라졌던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제정신으로 저놈에게 덤벼들었을 리 없다.

멍하니 굳어 있는 나와는 달리 산함박이 모습을 보이자마자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휘익!”

제일 먼저, 휘파람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갔다.

모인 사람들 중에 활을 쏘는 사람은 없었는데 누군가 했더니 언제 불려 왔는지도 모를 교위가 있었다. 우투리의 충성스러운 병사들.

“저 더러운 놈이 지상을 기어 다니다니!”

교위는 불같이 화를 내며 연거푸 활을 쏘았다. 수염이 숭숭 난 아저씨 모습이다.

그런 교위의 뒤로 괴테의 동상이 볼썽사납게 넘어져 있다. 동상 아래에 구멍이 뻥 뚫려 있고, 나머지 병사들이 그 구멍을 통해 올라오고 있었다.

“쏴라!”

교위는 목에 걸린 피리를 휙 불며 명령했다. 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병사들은 자리를 잡는 대로 교위를 따라 활을 쏘았다. 산함박까지의 거리가 제법 되는데도 화살은 이상하게 멀리 날아갔다.

산함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화살들이 귀찮다는 듯 시커멓게 흘러내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새빨간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입으로 보이는 부분이 커다랗게 꿈틀거리더니 토악질을 해 대는 것처럼 쿨럭거렸다.

툭, 툭, 투둑. 덩어리가 떨어졌다.

“장군님.”

병사들이 산함박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동안 손요운이 다가왔다. 교위는 손요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적은 저 뱀이지요?”

“네.”

손요운의 대답에 교위가 얼굴을 찡그렸다. 손요운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라기보다는 울음을 참는 표정이다. 교위는 코를 훌쩍였다.

“인간을 잡지 않아도 되는 건 처음입니다…. 장군님, 양친께서는 잘 계십니까?”

“네. 두 분 모두 건강하게 잘 계십니다.”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산함박에게 활을 계속 쏘고 있는 병사들도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산적같이 생긴 아저씨들이 우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

“교위님.”

“네, 장군님.”

“뱀을 잡았던 기억이 있습니까?”

“뱀을 잡았던 기억이요?”

코를 훌쩍이던 교위는 손요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책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책이요?”

“역대 장군님의 경험이 기록된 책입니다. 저희는 그걸 보고 배웁니다.”

“……거기에 뱀에 대한 게 하나도 없다고요?”

교위와 이야기하면서 손요운은 기운을 숨기지 않았다. 등에서 깃털 하나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그, 꼭 뱀에 관한 책이어야 합니까?”

교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뱀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서책이 하나 있습니다. 군데군데 새까맣게 먹이 묻어 있는 건데…….”

“그렇군요.”

“잡담은 그만하고.”

구민석이 양복 재킷을 벗으며 다가왔다. 이 여우는 움직이기 불편하게 왜 저런 옷을 입고 온 거지.

좋아. 조금씩 정신이 든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안 된다.

“거기 병사들은 화살을 놈이 아니라 그 앞으로 날려. 창도 괜찮고. 장벽을 만든다는 느낌으로.”

교위는 눈을 찌푸렸다.

“우린 여우의 말은 듣지 않는다.”

“……요운 씨.”

“화살로 장벽을 만들어 주세요.”

“네, 장군님!”

알기 쉬워서 좋다.

구민석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입 안으로 삼켰다. 아직 괴테의 발밑에서 우투리의 병사들이 나오고 있어서일 것이다.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 여우라고 해도 머릿수에서 밀리면 어쩔 수 없다.

구민석의 말을 전달받아 손요운이 교위에게 명령을 내렸다. 교위는 올라오는 병사들을 반으로 나누었다. 콩으로 된 병사들은 활을 쏘았고 팥으로 된 병사들은 창을 던져 댔다.

“아직?”

어느새 다가온 쌍둥이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구민석은 그들을 흘깃 보고 말했다.

“조금만 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요? 박서원은?”

“빠져 죽진 않을 거니 괜찮아.”

버드나무 아래로 간 박서원은 산함박처럼 시커먼 덩어리를 토해 냈지만 아직 두 발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박서원이 뱉어 낸 업은 호수에 떨어지자마자 새하얗게 녹아내렸다.

“오히려 저기 있는 게 건강에 좋을걸.”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백주하는 기가 차서 웃었다. 그러나 구민석은 백주하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제 할 일만 했다.

“저 꼬마 용이 아빠 힘을 빼서 쓰고 있거든? 저놈의 시선이 서원 씨에게 고정되도록. 그래서 지금 놈의 눈에는 서원 씨밖에 안 보여. 물론 저 화살처럼 몸에 닿는 건 기척을 느끼겠지만.”

구민석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쥔 다음 왼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니 지금 최대한 저놈의 무게를 줄여야 해.”

그리고 오른손으로 만든 주먹을 입가에 가져간 다음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이건 저번에도 통했으니까 이번에도 통할 거네.”

구민석의 요청에 따라 곡식 병사들은 산함박의 머리 앞으로 화살과 창으로 장벽을 만들었다. 장벽보다는 가냘픈 울타리에 가까웠고, 산함박의 크기와 비교하면 결승선 테이프라고 해야 했다.

산함박이 무시하고 밟으면 그대로 으스러질 것이다.

그러나 그 화살과 창의 끝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시뻘건 불꽃은 파란 버들잎과 닿아 푸르게 변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니 갈대밭이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아 아……!

“아아아아아!!”

쿠르릉.

바닥이 울렸다. 불이 옮겨붙은 산함박은 불을 끄기 위해 마구 뒹굴었다. 육중한 몸에 부딪히고 깔린 건물과 도로가 엉망이 되었다.

구민석은 씩 웃었다.

“꼬리가 아홉 개일 때에 비해서는 위력이 조금 아쉽지만 껍질을 태우기엔 충분하지.”

이산예의 꿈에서처럼 구민석의 뺨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이 간 도자기처럼 쩌억 갈라진 얼굴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구민석은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불이 붙은 곳을 잘 보면 굳어서 떨어져 내리는 부분이 있을 거야. 거길 노려. 저 역겨운 껍질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야 하니까. 주연 씨가 도와줄 거네.”

손요운은 교위가 내미는 창을 쥐고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찬란하게 빛나는 화려한 날개가 아무도 없는 잠실 상공을 수놓았다. 흩날리던 버들잎은 손요운의 날갯짓에 밀려났다가 다시 하늘하늘 아래로 떨어졌다.

구민석의 말에 의문이 생겼다. 나는 그대로 백주연에게 물었다.

“선배가 어떻게 도와요?”

“어?”

“박서원 씨는 저기 있잖아요.”

호수를 밟고 서 있는 박서원을 가리켰다. 저렇게 되면 박서원의 능력을 쓸 수 없다.

백주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볼에 있던 점이 없어졌다.

“우리 능력은 좀 포괄적이거든.”

“보통 인간이 자기 몸을 만지도록 허락해 주는 영물이 없어서 쓸 일이 없을 뿐이야.”

“잡아 봤자 현실적으로 쓸 수 있는 능력도 별로 없고. 능력이야 어쨌든 우린 인간이잖아?”

백주하가 나와 구민석 사이에 섰다. 오른손이 내 어깨를 잡는다.

“단순히 초능력을 빌려 쓰는 능력이 아니거든. 그랬으면 공명이나 증폭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되면 전부 다른 능력이라고 봐야 하는데, 그럼 우리 능력이 몇 개나 되겠어?”

“우리 능력은 하나야.”

백주하의 왼손이 구민석의 어깨를 잡았다.

“이렇게 접촉한 이의 몸을, 그대로 덧씌우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지.”

“나는 그 능력을 도플갱어라고 부르는 쪽이 더 낫다고 충고했었네.”

구민석이 덧붙였다. 구민석은 백주하에게도 충고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양손 다 쓰고 있으면 주연 씨가 능력을 복사하지 못하잖나. 지금은 불꽃을 키워야 하니까 내 어깨만 잡게.”

“음, 회장님 능력은 오랜만에 써 보는 거라.”

“여기까지 와서 회장이라고 부르는 건가? 부회장이라고 불러 줄 때도 됐지 않은가?”

“회장님이야말로 여기까지 와서 우기는 거예요? 이제 포기할 때도 됐지 않아요?”

백주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걸음걸음마다 불똥이 튀었다. 발밑에서 불꽃으로 만들어진 작은 여우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다가 사라졌다.

“그래…. 내가 괜히 얘길 꺼냈군. 됐으니까 가서 손요운 씨나 도와주게.”

백주연은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그대로 달려 나갈 것처럼 굴더니 무슨 생각이었는지 다시 돌아와 백주하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

“손 아프다.”

“……씨발 새끼가.”

백주하는 낮게 욕을 읊조리며 주먹을 들어 부딪쳐 주었다. 백주연은 이번에야말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달리는 속도가 인간이 아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불똥이 튀는 인간 따위는 알지 못한다.

구민석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러게 누가 가위바위보에서 지라고 그랬나.”

가위바위보……. 공평하군.

백주하가 신경질적으로 땅을 걷어차는 걸 무시하며 구민석에게 물었다.

“예전에도 이 방법을 썼습니까?”

“비슷하지. 그땐 서원 씨가 싸웠으니 좀 더 상황이 나았고.”

구민석이 버드나무 아래의 박서원을 흘깃 보았다. 박서원은 산함박이 기어 오는 방향을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발밑에 있는 작은 새끼 사자도 똑같은 눈빛으로 같은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잠깐만.

나는 인상을 쓰며 구민석을 보았다.

“박서원 씨가 있어서 좀 더 나았다면 지금은 그 전력이 빠졌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더 위험해진 거 아닙니까?”

“딱히 그렇진 않네.”

구민석은 턱을 쓰다듬었다. 부서지던 피부가 다시 안정되었다.

“계속 말했지만 그때는 이 버드나무가 없었으니까.”

“…….”

“산함박 크기도 그만큼 안 크고.”

“그래 봤자 개미가 잠실 타워 부수는 소리라면서요.”

“개미가 슈퍼 개미일 수도 있지. 왜, 방사능 개미라던가.”

제정신인가.

백주하마저 질겁하는 얼굴로 구민석을 노려보았다. 구민석은 뺀질거리며 웃었다.

콰아앙!!

그러나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시답잖은 잡담도 곧 끊겼다. 먼저 날아간 손요운과 병사들이 산함박과 부딪쳤다. 박서원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긴 했는지 산함박의 꼬리는 엉뚱한 장소를 내려쳤다. 그러나 그 눈먼 공격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거리가 너무 멀다. 내 능력이 닿지 않는다.

산함박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그림자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바닥을 긁어내리는 손에 곡식 병사 몇 명이 붙잡혔다. 붙잡힌 병사들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흐흐흐…….”

아마도 입이지 않을까 하는 구멍이 크게 들썩였다. 웃음소리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가 울렸다. 손요운은 산함박의 꼬리를 피해 크게 원을 그리며 비행하여 위로 올라갔다.

손요운의 아래에서 백주연이 무어라 크게 외쳤다. 손요운은 창을 내다 꽂으려는 걸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주연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맞추어 도깨비불처럼 커다란 불꽃이 주위에 만들어졌다.

곡식 병사들은 그 불꽃에 화살촉과 창을 달구었다. 여우의 불로 달궈진 무기는 산함박에게 그대로 꽂혔다. 손요운의 창에도 불꽃이 피어올랐고, 활활 타오르는 창을 들고 손요운은 산함박의 눈을 향해 하강했다. 눈은 노리기 쉬운 약점이다.

손요운의 날개가 산함박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백주하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구민석이 대신 말해 주었다.

“가위.”

“가위요?”

무슨 의미인가 했는데 백주하는 바로 알아듣고 내 어깨를 잡았다. 저 멀리서 반투명한 하얀 돔이 생겼다. 곡식 병사들을 덮을 만큼 큰 돔이었다. 새까맣게 흘러내리는 그림자가 돔을 덮쳤지만 백주연은 어떻게든 버텨 냈다.

“……왜 가위에요?”

“내가 그거 내서 백주연한테 졌거든.”

화를 내도 되는 부분인가?

“회장님. 손요운 씨는요?”

“기다려. 나도 가려서 안 보여. 저렇게 새어 나오는 걸 보면 눈을 찌른 것 같긴 한데…….”

그때, 구민석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호수 뒤편을 보았다.

“잠깐, 저놈이 어떻게 여길 왔어?!”

“누구요?”

집채만 한 호랑이가 연꽃잎을 밟으며 호수 위를 달리고 있다.

“…서다흰 씨?”

그 호랑이의 등에 서다흰이 타고 있었다.

“어흥!”

호수를 가로질러 곧장 이곳으로 오던 호랑이는 버드나무 아래서 잠깐 멈췄다. 박서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결국 날 도와줄 거면서.”

호랑이는 짜증 난다는 얼굴로 투레질을 하더니 앞발을 휘둘러 박서원에게 물을 끼얹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