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52. 그리워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3)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일.
잠실 타워를 휘감고 있는 청룡을 보았을 때는 자연재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는 재앙이라기보다는, 여름철 종종 내리는 소나기에 가까웠다. 우산을 들고 있어도 흠뻑 젖어 버리는 폭우도, 건물 안에서 바라본다면 꽤 운치 있을 때가 있지 않은가.
쿠우웅…….
끼이익…….
아아악…….
그러나 저건 다르다. 묵직하고 기분 나쁜 소음에 몸이 떨렸다. 죽기 직전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저것은 굳이 따진다면 쓰나미에 가깝다. 어떻게 대비할 수도 없고,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휩쓸리면 죽는다.
저것은 재앙이다.
감히 인간이 대항할 수 없는.
……저걸 잡겠다고?
* * *
거대한 구더기가 쓰나미처럼 잠실로 기어 오기 이틀 전. 구더기 사냥팀이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였다. 청룡과 대기업 부회장과 공무원으로 이루어진 정체불명의 모임이다.
청룡은 대뜸 말했다.
“그놈을 잡아야 하네.”
당연히 그래야지.
저 용은 당연한 소리를 아주 특별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버드나무를 성장시키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놈의 힘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청룡은 버드나무의 양분이 되기로 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한평화가 그걸 돕기로 했다. 새파란 연꽃이면 버드나무의 양분이 되기에 충분하다.
아니, 양분보다는 다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쯧, 씨앗을 줄 거면 진작 줄 것이지. 시간이 부족하지 않나.”
그 와중에 청룡은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내의 친구인 버들과는 아는 사이인지 욕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산예는 투덜거리기만 하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용이어도 저런 건 인간과 다를 게 없다.
“그럼 나무 이야기는 이쯤하고.”
청룡의 눈이 아래를 향한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을 받은 당사자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다음으로 논할 건…….”
“쥐덫에 놓을 먹잇감이지.”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역할.
산함박을 불러들일 미끼. 함정일 게 분명한 버드나무 아래로 기어 올 만큼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필요하다.
“그건 걔가 한다던데. ……요.”
작매는 청룡의 눈치를 보았다. 내 눈치도 봤다.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했던가. 그게 그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작매도 박서원이 시켜서 한 거겠지. 큰 유감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매를 향해 웃어 주었는데 이상하게 더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작매는 허둥거리며 변명했다.
“그, 제가 막… 배신하려던 건 아니고요, 그냥, 그, 아니, 좀, 그렇게 됐거든요, 해준 씨?”
“물론 박서원 씨가 시켰겠죠.”
“마, 맞아요! 다 걔가 시켜서 그래요.”
“까치가 인간의 말을 듣다니. 그건 또 놀라운 일이군.”
“히익!”
작매는 깜짝 놀라며 내 뒤로 숨었다. 이산예는 한심스러운 눈으로 청룡을 보았다.
“괜히 괴롭히지 마세요, 아버지.”
“저 까치가 너보다 수배는 넘는 시간을 살아온 건 알고 있겠지, 막내야.”
이산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서원 씨는 업을 넘겨받고 있는 거지, 까치야?”
“왜 박서원이는 서원 씨고 나는 까치인 거야?”
작매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구민석을 노려보았다. 구민석은 우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크기가 작잖아.”
“종족 차별이야.”
“내 꼬리가 아홉 개인데 어린아이를 귀여워할 수도 있지. 그렇지 않니?”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작매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저 이무기님은 나보다 더 어린데 왜 나만 까치라고 부르냐고!”
“그게 싫으면 너도 아버지를 데려오렴.”
“이이익!”
“큼.”
결국 청룡이 끼어들었다.
“그럼 그 인간이 미끼 역할을 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는가?”
“동의하고 자시고, 반대할 거면 좀 더 일찍 말했어야지. 이미 작업에 들어갔잖아?”
구민석은 청룡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여우에게는 용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다. 정확한 나이는 몰라도 연배는 비슷할 테고. 물론 겉보기 등급에는 할아버지와 아들 정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기에는 나는 이미 너무 이곳에 너무 익숙해졌다. 강원도에서도 이십 대 청년처럼 보이는 백 살 먹은 호랑이가 그보다 몇 살 정도 어린 할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
“그럼 이것도 해결되었고….”
이거 너무 대충대충 하는 거 아닌가? 그냥 각개전투 아냐? 기껏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곤 딱히 영양가 없는 것들뿐이다. 이미 알고 있거나, 이미 해 버려서 무를 수도 없는 이야기.
최연장자가 아무렇지 않아 하니 뭐라 할 수도 없다마는.
“그놈을 잡는 방법에 대해서는…….”
작매에게 꽂혔던 청룡의 눈이 구민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구민석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경험자로서 뭔가 의견이 없나?”
“지금과 상황이 다른데 무슨 의견이 있겠어.”
구민석은 턱을 매만졌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때도 어떻게 잡았는지 신기한 노릇인데.”
“아니, 그래도 잡았잖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구민석은 내 말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잡을 수 있었으니 잡았겠죠. 지난번엔 어떻게 그놈을 잡았습니까?”
“음.”
구민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잘?”
도대체 이 남자는 어떻게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을 굴리고 있을까? 휴대폰 업계에서는 세계 1위를 다투고 있다며? 사실 구민석은 얼굴마담이고 실무진은 따로 있는 건가? 그래. 그럴 수 있겠군. 그게 더 가능성이 높은 말이야.
“아니, 그렇게 보지는 말고, 해준 씨.”
구민석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생각을 해 보라고. 해준 씨는 그걸 직접 보지 않아서 쉽게 말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싸움에서 체급을 안 따질 수는 없잖아?”
“……그렇죠.”
“인간들이 하는 싸움에서도 그런데 상대가 요괴라고. 그놈은 많이 커. 내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도 솔직히 무리다 싶을 정도야.”
내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산함박의 모습은 이산예의 꿈을 통해 보았다. 꿈속의 잠실과 지금은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으니 크기도 당연히 차이가 있다. 물론 꿈이 더 크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고 해 봤자 10층 건물과 9층 건물 정도의 차이다. 어찌 되었든 크다는 소리다.
“이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이 아니라 개미가 잠실 타워 부수는 소리야.”
구민석의 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잘’이라는 대답은 하면 안 되지. 10층 건물을 잘만 무너뜨린 건 그쪽이다.
“그래서 어떻게 잡았다고요?”
“…솔직히 운이 따라 주었네. 손요운 씨가 잘해 줬던 것도 있고. 우투리의 병사들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거든.”
하긴, 내가 지하국에서 본 곡식 병사들은 강했다. 그게 우투리가 각성하기 전이었으니 각성한 지금은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때도 구두 장군을 상대하면서 덤벼드는 다른 요괴들을 잡았으며, 그러면서도 간간이 우리에게 창을 던지거나 활을 쏴 견제까지 했다. 물론 곡식이었기에 지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 꼬마가 잡아먹혀서 용들이 기운을 잔뜩 불어넣어 줬던 덕분도 있지.”
“큼. 큼큼.”
“어험.”
구민석이 덧붙인 말에 이산예와 청룡이 동시에 헛기침을 터뜨리며 점잔을 떨었다. 참 닮은 부자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은 이산예가 잡아먹히게 둘 수도 없고, 잡아먹힌다 해도 힘을 주어 숨을 붙어 있게 해 줄 용들도 없다. 이건 못 써먹는 방법이다.
꼭 그게 아니어도 지금은 그때는 없었던 버드나무와 파란 연꽃이 있지 않은가. 서다흰도 살아 있고.
그리고 잠실에서 잡아먹힐 사람도 없고.
찔리는 게 많았던 청룡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크흠. 그럼 석촌 호수에서 지내는 망제가 끝나는 대로 거리를 비우도록 하지.”
이게 마지막 단계였다.
시간을 되돌리면서 산함박에서 빼낸 죄 없는 영혼들과 무너진 세계에서 구해 낸 영혼들이었다. 다시 그놈에게 넘겨줄 순 없었다. 어차피 지금 이 세계의 관리자는 기둥인 청룡이다. 살짝 틈새를 열어 잠실에 있는 혼들만 잠깐 거두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그동안 청룡이 힘을 쓰진 못하겠지만 어차피 호수 안에서 나무의 양분이 될 테니 그건 괜찮다.
그래. 지금 시간보다 더 거대했을 산함박도 겨우 다섯 명과 곡식 병사들로 잡았는데 지금이라고 못 잡을까.
꿈이 아닌, 현실에서 산함박을 보았다면 가지지 못했을 자신감이었다. 이때의 나는 몰랐지. 불과 이틀 뒤 후회하게 될 줄은.
“…….”
아직 자신감이 넘치던 내 맞은편에는 지난번 뱀잡이의 주역이 앉아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주역을 담당할 것이고, 본래 내 세계에서는 이 미친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여태껏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손요운은 나와 구민석을 슬쩍 보았다. 시선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얼굴이다.
구민석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고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손요운은 차분히 웃었다.
이게 이틀 전의 이야기다.
중양절의 잠실로 돌아오기 전에, 바로 전날 있었던 이야기도 들여다봐야 한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 오겠다던 난쟁이는 약속을 지켰다.
“추억에 잠겨 있나?”
“내 추억은 아닙니다만.”
난쟁이는 ‘정해준’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앞에 나타났다.
옛날, 이 오피스텔이 한창 지어지던 중 ‘정해준’은 이곳에서 난쟁이를 처음 만났다. 나름 의미 있는 장소이다.
“악마는 어떻게 됐습니까?”
“잘 지내고 있네.”
“잘됐네요.”
비록 악마라고는 해도 안 좋게 지내고 있다면 가슴이 아플 것이다. 나는 악마와는 달리 양심이 있는 인간이니까. 악마에게도 부디 양심이란 것이 생기길.
난쟁이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정장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비싸 보이는 정장에서 플라스크가 하나 나왔다. 때아닌 마술쇼가 신기하기는 했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난쟁이다. 이런 마술쇼 따위야 누워서 떡 먹기겠지.
난쟁이가 꺼낸 플라스크는 악마를 가두는 데 썼던 것보다는 작은 크기였다. 잠실 타워 전망대에서는 빈 플라스크를 줬던 반면, 지금은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다.
“악마에게서 받아 낸 것이네.”
하얀 쥐다. 얼마나 하얀지 은은하게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크기는 작다. 실험용 쥐보다도 훨씬 작은 크기다. 꼬리까지 다 해 봤자 손바닥 정도. 쥐보다는 햄스터에 가까운 크기일지도 모른다. 다만 죽었는지 자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살아 있습니까?”
“혼에 생사의 유무를 따져서 무얼 하나.”
맞는 말이다. 나는 난쟁이에게 더 묻지 않고 쥐를 들여다보았다.
쿵.
심장이 크게 요동친다. ‘백’은 주인을 알아보았다.
홀린 듯 뻗어지는 손을 거두었다. 아직 나는 돌아가는 길을 마련하지 못했다. 혼을 불러들일 순 없다.
“이곳 땅의 인간들은 혼이 쥐의 모습을 하고 있더군. 재밌는 땅이야.”
“모습이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지.”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차며 나에게 플라스크를 내밀었다.
“마개를 열면 혼은 백으로 돌아갈 거네. 본래 혼백은 한 쌍이니까.”
플라스크 안의 하얀 쥐는 미동이 없다.
불쌍한 ‘정해준’. 그러나 이것도 그가 치러야 할 대가이다. 그렇다. 대가이다.
‘정해준’이 선량한 피해자였던가?
피해자라면 피해자일 수 있지만 선량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박서원처럼 대놓고 업을 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업을 쌓지 않은 것도 아니다. 박서원보다 좀 더 행동이 교묘했을 뿐, 그에게도 업은 쌓여있다.
하얀 털과는 달리 회색 빛깔인 꼬리가 그 증거다.
…불쌍한 놈이기는 하지만.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뱀을 죽일 것인가?”
난쟁이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돌았다.
“죽이긴 하겠죠.”
“그 뒤에는? 자네는 돌아갈 생각이지?”
난쟁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팀장님이 말하는 것처럼 시간을 돌리는 게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 않을까요?’
인간의 영웅은 어떠한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고자 했다.
나는 그런 영웅은 되지 못하지만, 모든 걸 버려 두고 떠날 수 있는 현명한 인간도 되지 못했다. 걸어가지 않아도 될 길을 빙글빙글 걸어가는 어리석은 인간만 이 자리에 남아 있다.
“돌아가기는 할 건데.”
돌아가기는 할 거다. 당연히 돌아가야지.
“상담은 무료라고 했죠?”
난쟁이는 활짝 웃었다.
여기까지가 어제 있었던 일이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잠실에 서 있는 현재의 나에게는 ‘정해준’의 혼이 있다는 소리다.
…어떻게 겨우, 여기까지 도달했다.
쿠우웅.
쿵.
아아아아…….
빈 도로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비명 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거대한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잠실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