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95화 (195/202)

# 195

52. 그리워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2)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는 망제라고 불리는 제사가 있다.

망제(忘祭). 혹은 무후제(無後祭).

기리는 이 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설이나 추석처럼 민족대이동이 일어나는 큰 명절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로는 이 세계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위패에 새겨지는 이름이 언제고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으니까.

따로 집 안에서 망제를 치르지 않더라고 제사는 근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상에 향이나 꽃을 바치는 것으로 죽은 이들을 기리는 행위가 끝난다.

나도 그 사이에서 향을 올렸다.

특별히 누군가를 기리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정해준’을 기려 볼까.

사실 이것도 쓸모없는 짓이긴 하지.

“와아아!”

요 근래 잠실을 자주 찾는다. 돌아가면 최소 일 년은 잠실에 가지 않을 것이다. 일 년이 뭐냐. 가능한 한 내 의지로 가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 속을 모른 채 돌아온 청룡을 향해 환호를 내질렀다. 청룡은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힘차게 꿈틀거렸다. 여기에 아들이 있어야 저런 짓을 덜 할 텐데. 그러나 불행히 약속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할 일도 없고 버드나무가 어떻게 되나 보려고 조금 일찍 나왔는데 저런 걸 보고 있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제시간에 나왔지.

“청룡님!!”

“청룡님!”

“여기 봐 주세요!”

비린내 날 것처럼 생긴 거대 미꾸라지가 뭐가 좋다고.

쿠르릉….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청룡은 팬 서비스를 실컷 해 주었다. 잠실 타워 주위를 천천히 맴도는 청룡은 경이로운 풍경이긴 했다.

그러나 내 감상은 처음 청룡을 보았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청룡의 아들과 동료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고, 심지어 청룡의 도움까지 받는 입장이 되어서도.

청룡은 여전히 자연재해다.

청룡을 포함한 용들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자기만족이다. 박서원이 그들에게도 죄를 물었던 걸 잊지 말자.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거미도 그러지 않았던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와아아아!”

청룡은 머리를 지상 가까이 숙였다. 하얀 눈썹 아래에 있는 부리부리한 눈이 내가 있는 곳을 스쳐 지나갔다.

청룡은 석촌 호수 중앙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버드나무를 보았다. 씨앗에서 새싹으로, 어린나무에서 큰 나무로.

그러나 지하국에서 보았던 버드나무를 생각하면 아직도 한참은 어린나무였다. 지하국에 있던 버드나무는 한 그루, 한 그루가 숲처럼 보일 만큼 컸다.

석촌 호수의 버드나무는 보통 나무를 생각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자라고 있었지만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버들의 여의주에서 난 싹이고, 한평화가 피운 숨살이꽃으로도 양분이 부족했다.

청룡은 버드나무를 향해 입김을 불었다. 물안개처럼 번진 숨결이 호수 위로 가라앉았다. 안개에 젖은 버드나무는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쑥 자라기 시작했다. 당연히 환호성도 커졌다.

“저렇게 환호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들떠 있다. 열에 취해 몽롱하면서도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목소리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모든 건 상대적인 거니까요.”

“그렇긴 하죠.”

박서원이 씩 웃었다. 서늘한 얼굴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업은 다 받아 왔습니까?”

“이러다 일찍 죽게 생겼어요.”

“오래 살 생각은 있고요?”

박서원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그러네요.”

버드나무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파란 연꽃이 버드나무 뿌리와 얽히면서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연꽃 사이에 고여 있던 종이배와 연꽃잎 위에 불시착한 종이비행기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연꽃이 사라졌던 것도 잠시, 호수 반대편에서부터 다시 파란 연꽃이 피어났다. 할머니와 함께 도착한 한평화가 연꽃을 피워 내고 있다. 잠깐 성장세가 주춤했던 버드나무는 새로 피어난 연꽃을 먹으며 무섭게 자라기 시작했다.

파란 꽃잎이 사라지고 푸른 잎이 물결에 흔들렸다. 손바닥만 한 종이로 만들어진 사자탈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연꽃잎을 밟고 버드나무로 향했다. 청룡은 저것만큼은 마지막까지 반대했지만 아들의 고집을 이기진 못했다.

청룡은 물안개처럼 내뱉던 입김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얼음처럼 시린 바람이 불었다. 거리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나무는 가지를 쭉쭉 뻗어 갔다. 청룡이 다시 지상을 굽어봄과 동시에 그대로 모습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직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호수를 보았다. 연꽃잎 아래에 천천히 움직이는 용이 한 마리 있다. 버드나무의 성장을 위해 청룡은 양분이 되길 택했다.

자라기 시작한 가지는 석촌 호수를 가득 채우며 길게 잎을 드리웠다.

“어?”

“눈이다…….”

군중들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이다. 박서원의 눈에도, 한평화와 송희선에게도.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손요운과 서다흰, 오늘과 쌍둥이에게도 보이지 않는 눈이다.

하지만 이산예는 보고 있을 것이다.

12월 23일. 오전에 잠깐 내렸던 눈을.

겨울바람이 분다.

벽의 틈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폐허가 된 잠실과, 뱀에게 먹혀서 사라진 사람들. 부서진 세계를 이어 붙인 틈새로 부서졌던 흔적이 몰려온다.

오늘이 중양절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자들이 그리움을 받는 날이기 때문에.

청룡은 죽은 적 있는 영혼들의 흔적을 더듬어 틈새를 열었다.

잠실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거리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사람이 타지 않은 자동차는 장난감 블록처럼 도로를 채우고 있었다.

종이 사자가 사라지고 새하얀 털을 가진 어린 사자가 나타났다. 뿔과 비늘이 있는 긴 꼬리를 가진 사자다. 얼굴은 붉고, 긴 털은 윤기가 있다. 사자는 박서원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박서원은 사자를 따라 걸어갔다.

사자는 박서원을 호수로 데려갔다. 박서원은 멈추지 않았다. 호수에 발을 내디뎠는데도 물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물 위를 걸었다. 사정을 모른다면 기적이라고 할 만한 모습이다. 박서원의 발이 닿은 연꽃은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진 채 부서졌다.

한평화가 피워 내는 파란 연꽃들을 발길 닿는 곳마다 모두 죽이며 박서원은 사자와 함께 버드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지하국에 있던 그 어느 버드나무보다 큰 버드나무가 불지도 않는 바람에 흔들렸다. 이파리가 새까맣게 되었다가 다시 푸르게 되길 몇 차례. 박서원은 고개를 번쩍 치켜든 채 웃었다.

“온다!”

오로지 뱀을 위해 마련된 먹음직스러운 먹이들이 독을 품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뱀은 머리를 들이밀었다.

쥐가 쥐약이 든 줄 알고 먹이를 먹는 건 아니잖아?

그만큼 먹음직스러웠기 때문에 뱀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산함박은 그런 존재다.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을 만큼, 굶주릴 운명을 제 손으로 만들어 낸 놈.

* * *

“산함박은 도대체 왜 그렇게 잡아먹는 겁니까?”

산함박을 어떻게 사냥할지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런 얘기가 나왔다. 한반도에 무리를 짓고 사는 영물 중에 산함박의 피해를 받지 않은 이가 없었고, 그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수련 중인 이무기 중에서도 잡아먹힌 이가 있다니 말 다 했지.

그러나 용들 중에서는 없다. 만약 용들 중에서도 작매네처럼 다친 이가 나왔더라면 좀 더 일찍 용들이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

방관이 늘 죄라고 말하지는 않겠다마는, 결국 이렇게 손을 쓸 생각이었다면 좀 더 일찍 했어야 하는 건 맞다.

“그건…….”

이산예는 대답을 망설였다. 이번엔 어떤 대답이 나오든 놀라지 말자. 요즘 굴러가는 꼴을 보건대 산함박이 사실 동해용왕 아들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모릅니다.”

“뭐라고요?”

“아무도 모릅니다.”

당황하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그럴 수도 있지. 모를 수도 있다. 용이라고 해서 척척박사가 아니겠지. 하지만 용이잖아? 왜 모르는 건데?

“아버님께서는요?”

“제가 안 물어봤을 것 같습니까?”

어릴 때 아빠랑 같이 안 살았다며.

물론 사이가 나쁘다는 소리는 안 했으니 물어봤을 수야 있지. 그럴 수야 있는데…….

왜 모른다는 건데?

아니다. 짜증 내지 말자.

“천 년 넘게 사신 분이 왜 모른답니까?”

“아버지 말로는, 그러니까… 어느 날 자연 발생했다고.”

“……그거 팀장님이 애라고 그냥 얼버무린 거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한데.”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한 것부터가 글렀다. 그러나 이산예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고요.”

이산예는 내 미덥지 않은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온갖 군상의 인간과 영혼을 마주해야 하는 공무원답게 익숙하게 무시했다.

“그냥 생겼대요.”

“그냥요?”

“네. 어느 날 갑자기.”

“이무기가 타락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이산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자연 발생이 아니잖아요?”

“아무도 그 뱀이 어떻게 새까맣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의미의 자연 발생이죠.”

“…아, 네.”

“정신 차려 보니 새까만 게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죄 없는 영혼들을 잡아먹고 있었대요. 처음엔 누가 잡아먹었는지도 몰랐죠. 힘없는 이들부터 하나씩 먹혔다고.”

어둡게 깔린 목소리가 비 오는 날 괴담을 읊어 주는 중학교 담임 같았다.

“그 전에 그게 이무기였는지, 용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능하네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죠.”

오히려 순순히 인정해 버리니까 민망해졌다.

나는 이산예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면 왜 잡아먹는지도 모릅니까?”

이건 알겠지 싶어서 물어본 거지만 갑자기 나타났을 때부터 새까맣다고 한 걸 보면 모를 가능성이 크다.

“네.”

이산예는 즉답했다. 봐라.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뭡니까?”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산예는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제가 어머니께 다 배우질 못해서…….”

젠장.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이산예는 씩 웃었다.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와서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해요.”

“이야기요?”

“주로 잡아먹혔던 가족들이 많았던 영물들 사이에서요.”

쥐나, 토끼, 새 같은 비교적 크기가 작은 영물들이 수군거리던 소문이었다.

“회장님처럼 아내를 잃었다거나… 오늘 씨처럼 부모님을 잃었거나. 음. 할머니나, 여동생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누가요?”

“산함박이요.”

“그럼 복수라는 소리입니까?”

“그냥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요.”

이산예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지 말로는 엄청 옛날에 돌았던 이야기래요. 요 몇백 년 동안은 그냥 태어날 때부터 미쳐 있는 놈이라는 설이 인기가 있대요.”

“영물들이라고 해서 고상한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닌가 봅니다?”

“해준 씨가 그동안 보아 왔던 영물들을 떠올려 보세요. 고상했습니까?”

나는 강원도의 한진열을 떠올리며 이산예를 보았다.

“…절 보진 말고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이산예는 찝찝한 얼굴로 날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산함박이 왜 다른 이들을 그렇게 잡아먹는지는 모릅니다. 살아남은 목격자 덕분에 놈이 더 강해지려고 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해져서 뭘 하려는지는 저도, 아버지도 몰라요.”

자연 발생한 재앙이라는 점에는 용들과 같다. 이무기가 타락한 것이 강철이. 처음 저놈에 대해 들었을 때만 해도 강철이라고 했었다. 그동안 뱀이라고 불렀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저걸’ 두고, 지금도 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산예와의 대화를 되새기던 걸 관두고 앞을 보았다. 귀를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걱거리는 비명처럼 들렸다.

새까만 덩어리가 꾸물거리며 아무것도 없는 도로 위를 기어 왔다. 시커먼 오물에 닿은 자동차들은 순식간에 부식되어 무너졌다.

그건 뱀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구더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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