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94화 (194/202)

# 194

52. 그리워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1)

정해준이 불쌍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게 동정할 가치가 있냐고 하면 아니올시다.

적어도 나는 그를 가치 폄하할 자격이 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탄생한 피해자로서의 권리다.

“왜 하필 제가 여기로 오게 된 겁니까?”

내가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의문이다.

청룡은 답했다.

“그자의 가장 내밀한 소망이 자네의 세계에 닿아 있었으니까.”

즉, ‘정해준’이 정말로 원했던 곳이 요괴와 영물, 초능력자가 없는 세계였다는 말이다.

“그자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면 그런 세계에 가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르지.”

그리움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해준’에게는 주위를 돌아볼 여유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그리움이 남아 있더라면 혼자 돌아가서 가족‘만’ 살리겠다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뭐… 이제야 그걸 생각해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지마는.

내 세계는 ‘정해준’이 바랐지만 바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던 꿈이다. 아마 그 녀석은 끝까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움이 없는 이란 그런 존재다.

돌아보던 것을 돌아보지 않고, 남은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그에 후회조차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서 달리는 존재.

마지막의 마지막에 서 있던 ‘정해준’은 그런 인간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와 ‘정해준’은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다.

* * *

거리는 중양절 준비로 한창이다. 무슨 크리스마스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거리가 묘하게 들떠 있다.

그래도 거리에서 들려오는 건 크리스마스 캐럴은 아니었다. 오히려 석가탄신일이 생각날 만큼 연등으로 가득해졌다. 솔직히 중양절과 연등이 무슨 상관인가 싶긴 했지만 가로수를 장식한 소원 종이를 보고선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현대식으로 재편성된 명절이니 이것저것 다 갖다 붙였겠지.

초등학생들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해 주세요.’ 소원 종이를 보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이 지났지만 다시 차례 음식 준비로 떠들썩해졌다. 이번에는 잠실 타워에 푸른 연꽃과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어서인지 석촌 호수에 소원을 적은 종이배를 띄우는 사람도 많았다. 대부분의 종이배는 연꽃잎에 걸리거나 호수에 가라앉았지만 간혹 몇 개는 버드나무 아래까지 닿았다. 버드나무는 그새 많이도 자라서 이제는 제법 나무처럼 보였다.

“딱히 평화롭진 않은데 평화롭군요.”

손요운은 이 시간을 그렇게 평가했다.

연등과 소원 종이, 길거리에서 맡아지는 향냄새. 거기에 더해서 석촌 호수의 물 냄새와 나무 냄새. 은은한 연꽃 향. 사람들 떠드는 소리만 없었다면 나도 동의했을 것이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평화롭다는 말은 맞긴 하다. 그리고 저 호수에서 뱀이 툭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도 하고.

“평화로운 게 낫죠.”

“그야 그렇긴 한데.”

손요운은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지적했다.

“보통 이런 시기를 폭풍전야라고 하죠.”

“그걸 꼭 말해야 합니까?”

나는 혀를 찼다.

“말에는 힘이 있다잖아요.”

“그렇다고 다가올 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요.”

손요운은 싱긋 웃었다.

“친구가 깨어났습니다.”

“친구? 아.”

여우의 장난질에 원인불명으로 혼수상태가 되었던 그 투명인간을 말한다. 여우는 그것 또한 우투리의 각성을 위한 시련이었다고 순순히 고백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손요운의 심정이 어땠을까 짐작해 보다가 포기했다.

“괜찮답니까?”

“네. 미뤄졌던 일도 다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잘되었으면 좋겠군요.”

이 세계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할 말로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잘될까?

솔직히 말해서 회의적이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최악을 만들었고, 다시 우연이 겹쳐서 그를 돌파할 수단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만약 이곳이 잘 풀린다 해도, 그게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이어질 수 있을까?

역시 뭐가 어찌 되었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게 정답이었다.

“해준 씨.”

손요운은 멍한 얼굴로 석촌 호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해준 씨 일도 잘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집에 갈 수 있을 겁니다.”

“…….”

“이쪽 세계의 일에 강제로 휘말린 거 아닙니까. 난쟁이에게 원래의 혼을 돌려받으면 그냥 가세요.”

내게 그럴 각오가 있다면, 청룡은 자신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말을 던졌던 처음과는 달리 직설적인 말이었다.

애초에 나는 ‘정해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불려 왔던 영혼이니 ‘정해준’의 혼을 악마에게서 돌려받으면 충분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나는 손요운의 말에 입을 비틀며 웃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나만 돌아가라고요?”

“운 나쁘게 휘말린 거잖습니까.”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거기다가….”

“거기다가?”

“이대로 돌아가면 꿈자리가 사나워집니다.”

손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 게임을 시작하면 아무리 망작이라고 꼭 엔딩을 봐야 하거든요.”

여기가 게임은 아니지만 정해영은 자기 생각대로 드라마가 안 풀리면 망작이라고 가열하게 까 내렸다. 예의상 그 말에 맞장구치면 나에게 오만 짜증을 다 내긴 했지만 그럴수록 그 빌어먹을 드라마가 망작이라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그 드라마는 도대체 마지막 화로 어떻게 수습하려고 했던 걸까.

손요운은 내 말에 수긍했는지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해준 씨.”

“네.”

“저도 요 며칠 동안 생각해 봤었는데요.”

“와!”

손요운은 말을 멈췄다. 호수 가까이서 환호 소리가 들렸다.

종이배가 마땅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사람들은 소원을 적은 종이로 비행기를 접어 날렸다. 그중 하나가 버드나무에 닿았다.

손요운은 잠깐 그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 팀장님이 말하는 것처럼 시간을 돌리는 게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럼요?”

손요운은 입술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할 일도 없어서 종이비행기를 던지는 사람들을 보며 기다렸다.

조금 지루하다고 느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손요운이 입을 열었다.

“해준 씨. 혹시 구 회장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진지하게 말하는데, 구민석은 부회장을 고집하기보다는 그냥 회장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 * *

“정말 괜찮은 거예요, 할머니?”

백주하는 걱정을 영 멈추지 못하고 송희선에게 거듭 되물었다. 귀찮게 느낄 법도 했지만 송희선은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오히려 당사자 중 하나인 박서원이 진저리를 쳤다.

“그만 좀 물어!”

“아니, 그래도…….”

“한 번만 물으면 됐지. 백주연도 안 하는 짓을 왜 네가 하고 있어?”

“난 또 왜?!”

손자 같은 동갑내기 아이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자 송희선은 빙그레 웃었다.

투덕거리던 동갑내기 아이들은 송희선이 찻잔을 건네고 나서야 얌전해졌다. 새하얀 자기 찻잔 안에는 푸른 연꽃이 물에 잠겨 있었다. 심신이 안정되는 좋은 향이 났지만 백주연은 되레 불안한 얼굴로 송희선을 보았다.

“이거 진짜 마셔도 되는 거예요?”

박서원은 한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백주연을 보았다.

“넌 가만히 잘 있다가 왜 또 그러는데?”

“아니….”

백주연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연꽃을 보았다.

“이거 한평화가 피운 거잖아.”

“근데?”

“걔가 네 앞에 서면 내숭 떠는 거 알지? 아, 할머니 손녀 욕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도 아시잖아요. 걔가 좀… 성격이 불같은 거.”

“그런 말 하는 주제에 그동안 다른 꽃은 잘도 먹었다?”

“난 네가 내 입에 억지로 처넣은 거 말고는 먹은 적 없거든? 네가 다 먹었지.”

백주연이 형제의 지원사격을 나왔다.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먹은 건 먹은 거지.”

“입에 억지로 쑤셔 넣는데 어떻게 해?”

“돼지 새끼냐? 입에 넣으면 넣는 대로 다 처먹고? 그 정도 사리 분별 안 되는 애한테 내가 심했네. 미안하다.”

백주하는 한심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징글맞은 쌍둥이 형제는 그렇다 쳐도 박서원마저 백주연의 장단에 맞추어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건 그렇게 보이진 않아도 저 녀석이 제법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예정보다 이르고, 그렇기에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백주하는 아직도 티격태격 중인 박서원과 쌍둥이 형제를 뒤로한 채 연꽃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식도를 지나 뱃속에 맴돌았다. 백주하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맛 자체는 그냥 평범한 차인데요.”

“평범하게 차로 우렸으니까.”

송희선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건 평화가 새로 피운 꽃이다. 그러니 호수에서 사람들의 추파와 비바람을 맞지 않았으니 걱정 말거라.”

백주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꼭 그런 건 아니었고요.”

“아무리 정화를 하고 있다고 해도 바깥에 있던 거니까. 내가 그런 걸 너희에게 줄 것 같았어?”

“물론 할머니는 믿죠.”

“그런데?”

“한평화 걔는 솔직히……. 음, 아시잖아요?”

송희선은 백주하의 찻잔을 다시 채웠다.

“장난이 심하지.”

“집안 가풍이 좀 많이 자유롭… 잖아요?”

“딱히 그렇다고 생각은 안 한단다.”

“하긴 그 증조할아버지는 TV에서 봤을 때 엄청 꼬장꼬장하게 생겼던데. 그럼 한평화만 그런 걸로.”

“그래도 손주들에게는 많이 유하신 분이란다.”

“그러니까 한평화가…… 큼.”

백주하는 헛기침을 하며 차를 연거푸 마셨다.

“엑, 그 할아버지가 유하다고요? 박서원 쟤는 강원도에 있다가 서울 올 때마다 얼굴에 멍 하나씩 달고 오던데요. 그 덕에 걔가 우릴 개같이 굴렸… 아야!”

대신 백주연이 용케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박서원은 휴대폰으로 백주연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거 내 폰이잖아!”

“내 폰은 바꾼 지 얼마 안 됐어.”

“너랑 나랑 폰 똑같이 바꿨거든?”

“그랬던가….”

송희선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능력만 잘 쓰면 됐지.”

“와, 할머니도 박서원이랑 똑같이 말하네.”

“서원이가 강원도에 있을 때 작은아버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지.”

“할머니한테 뭐라 하는 건 아닌데요, 역시 거기 터가 좀 안 좋았던 거 아닐까요?”

“얘가 못 하는 말이 없어.”

송희선이 혀를 차며 웃었다.

백주하가 두 번째 찻잔도 깨끗하게 비우자 송희선은 아직도 시답잖은 얘기로 투덕거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도 말했다.

“식기 전에 마시렴.”

주전자 가득한 차를 세 사람이서 모두 나누어 마셨다. 파란 연꽃은 물에 흠뻑 젖은 채 찻잔에 남아 있었다.

“그럼 시작하자.”

송희선의 말에 세 사람 모두 자세가 달라졌다.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받던 것이 모두 사라졌다.

“규칙은 지난번에 설명했었지. 기억하지?”

“네.”

믿음직스러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송희선은 영 못 미더웠는지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기본적으로 더위팔기와 같아.”

“알고 있다니까요.”

백주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더위팔기, 허수아비버리기… 또 뭐라고 하셨죠?”

송희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어쨌든 의미만 알고 있으면 되잖아요!”

백주연은 손을 내저었다.

“집중하거라, 얘들아. 서원이가 너희 둘의 허수아비가 된단다. 다른 곳으로 튀지 않게 내가 막을 거다.”

“…네.”

“모든 액은 서원이에게 흘러갈 게다.”

송희선은 소나무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그러나 음울하게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러면 뱀은 서원이를 잡아먹기 위해 여기로 오겠지.”

지난 몇 년 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여전히 이런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포장을 해 봤자 친구를 액막이 부적 삼아 목숨을 버리게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어쩌겠는가. 성은 달라도 백씨네 셋째가 하고 싶다 노래를 부르는데. 형으로서 해 줘야지.

딱!

“뭐야!”

“뭔가 기분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감도 좋지.

백주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