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93화 (193/202)

# 193

51. 이룰 수 없는 꿈(4)

인생은 타이밍이다.

다른 말로는 운이라고 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성공할 때가 있고, 반대로 실패할 때가 있다. 그 이유가 뭐겠는가? 바로 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해준’은 운이 좋았다. 거래 도중 사기를 당한 적도 없고, 강매를 당하지도 않았다. 오랜 협상 끝에 ‘정해준’도 납득하는 대가를 주고, 받고 싶은 걸 받아 냈다.

물론 이 운이란 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정해준’이 난쟁이와 그런 거래를 한 것 자체가 운이 나빴다고 말할 것이다. 그에 이견은 없다. 다만 ‘정해준’ 자체는 본인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 계획했던 것을 모두 이루고 난쟁이를 불러내는 데까지 성공한 것은 ‘정해준’이었으니까.

“역시 악마는 상종할 것이 못 되는군요.”

손요운이 감탄하며 짧게 말했다. 악마에 대한 주의는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왔다곤 해도 악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손요운도 처음이다. 역시 괜히 악마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정해준’이 악마에게 직접 계약서를 들고 찾아갔던 걸 알고 있다. ‘정해준’의 영혼은 ‘정해준’이 지정한 시점에 가져가는 걸로 되어 있다. 이걸 다 확인해 봐야지.

“그럼, 저, 정확히, 어떤, 소, 소원… 이었, 나, 요?”

난쟁이는 친절하게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그자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고 싶어 했지.”

놀랍지도 않다. 난쟁이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세워 자신의 팔뚝을 툭툭 쳤다.

“수차례 만났고, 이야기할 때마다 구체적으로 소원이 바뀌었네.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알다시피 너무 두루뭉술한 소원이지 않나?”

“그, 그렇죠…….”

“내가 환상을 보여 줘서 소원을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아, 물론 나는 저 염소 같지가 않아서 그런 얄팍한 속임수를 쓰진 않네.”

종이가방이 크게 들썩였다. 악마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지만 모두 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그걸 걱정했지…. 그래서 소원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굉장히 많은 논의를 거쳤네.”

악마를 찾아갔을 때 ‘정해준’이 꺼내 든 계약서를 보면 대충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지 예상이 간다. ‘정해준’이 들고 있던 그 계약서는 심지어 법무법인을 통해 작성된 것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악마에게 들고 가는 계약서라면 완벽을 기리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갔을 테다.

“그래서 찾아낸 합의점이, 그렇네. 과거로 돌아가는 것.”

이젠 놀랍지도 않다. 왜 여기 사람들은 잘못된 걸 고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과거로 돌아가려는 생각만 할까.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고방식인가?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는 ‘정해준’ 말고도 하나 더 있었지. 나는 난쟁이에게 물었다.

“돌아가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을 말합니까? ‘정해준’이 그대로 넘어가는 거였습니까?”

“음, 아냐. 아니네. 10년 전으로, 정신만 돌아가는 걸로 하기로 했었네. 육체까지 가 버리면 금방 무너지기 마련이거든. 과부하를 버틸 만한 다른 힘이 없다면.”

난쟁이는 계속해서 친절하게 답했다. 자신이 일하는 도중 악마에게 방해받은 게 제법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우리에겐 잘된 일이었다.

“그럼 당신은 그 소원을 이루어 주려고 했었고, 실제로 이루어지려던 순간 악마가 영혼을 가져갔다고요?”

“그렇지.”

“소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에 나도 정확히 확인은 할 수 없다만…….”

난쟁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실패한 것 같지는 않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안 되지. 하지만….”

“하지만?”

“도중에 멈췄다는 느낌일세.”

난쟁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산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잠깐 줘 보게.”

그리고 종이가방에서 플라스크를 꺼냈다.

난쟁이는 마개를 조금 풀고 플라스크를 흔들었다. 심통 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염소는 난쟁이와 눈이 마주치자 비굴하게 웃었다.

“염소. 자네가 그 남자의 영혼을 먹어치우지 않고 가만히 놔둔 이유가 뭐지?”

“흐으으응, 나라고 매번 다 먹는 건 아니거든?”

“그 정도로 복잡한 영혼이라면 맛있을 거라며 금방 처먹지 않나.”

“누굴 돼지로 아나? 난 염소야!”

“그리고 자제심이 없는 놈이지.”

“…….”

“이유가 뭐지?”

“아니, 뭐…. 내가 영혼을 가져갔는데도 쟤가 두 발로 걸어 다니잖아. 뭐 때문인지 궁금해서…….”

“자네는 그런 지적 호기심을 가질 만큼 똑똑하진 않잖아.”

오랫동안 동종업계에 종사하면서 악마를 보아 왔던 난쟁이는 신랄하게 평가했다. 악마는 억울한 얼굴을 했지만 무어라 대꾸하진 못했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악마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난쟁이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먹지 못한 이유가 있었군?”

“…….”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게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팀장님.”

“네?”

“시간이 되돌아왔던 그 시점이 언제인지 압니까? 날짜만 알면 됩니다.”

“그건, 그, 12월 22일이요.”

내가 들어온 그 날짜다.

“그렇군요…….”

난쟁이에게 비굴하게 웃고 있던 악마는 날짜가 들리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악마라면 좀 더 능청맞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 열심히 좋은 말씀들을 들려준 보람이 있다.

“야.”

이번에는 내가 난쟁이에게서 플라스크를 건네받았다.

“내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지?”

“저어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너 계약 안 지켰잖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자기야!”

나는 그런 악마를 비웃었다.

“영혼을 가져가는 건 12월 31일 23시 59분 59초로 계약했었잖아.”

“…어머머, 그랬었나아?”

“정신이 과거로 간다는 건 영혼은 이동한다는 소리겠지? 그럼 네가 수거하기로 한 영혼이 네 손을 빠져나간다는 소리고, 과거로 간 영혼이 다시 네 손에 들어오긴 어렵다고 판단했겠지.”

“…….”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손을 쓴 거야.”

“즈, 증거 있어?”

“계약서 썼잖아.”

집을 다 뒤져 봐도 그 재수 없는 통장 말고는 이렇다 할 걸 발견하지 못했다. 악마가 손을 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쪽을 뒤졌다.

그리하여 내 메일함, ‘정해준’의 메일함에서 계약서를 작성할 때 신세를 졌던 변호사와 연락한 메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약서 사본도 물론 있었다.

나는 휴대폰 화면에 사본을 띄워 악마에게 보여 주었다.

“애초에 계약 위반이었다고!!”

악마는 발악했다.

저런 말을 악마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거래를 해 놓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고 꼼수 쓴 거잖아! 상도덕이 없어, 없다고!”

“너도 계약서에 항목 추가하지 그랬냐.”

“그렇지, 그게 맞는 말이지. 나만 해도 몇 번의 불쾌한 거래 때문에 무조건 선불로 바꿨지 않나.”

난쟁이도 한마디 보탰다.

“시대가 바뀐 게 언제인데 아직도 후불을 고집하고 있나? 그러니 이렇게 되지.”

내가 악마였어도 짜증 났을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악마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래. 계약서를 잘 읽고 했어야지.”

“그놈이 저 똥자루 놈이랑 계약을 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아! 이중 계약이라고! 고소할 거야!!”

“그러니까 계약할 때 항목에 추가하지 그랬냐고.”

“계, 계약을, 어긴, 거, 거니까…….”

“가져갔던 건 내놓아야겠군요.”

“그 계약서에 계약을 어겼을 시 페널티는 없습니까?”

손요운이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정해준’은 용의주도한 녀석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있었다.

“페널티도 페널티지만 가져간 것부터 받도록 할까요.”

염소는 바르르 떨었다.

“가져간 영혼을 뱉어.”

“…….”

악마는 앞발을 꼼지락거리며 헤헤 웃었다.

“지금 내가 플라스크 안에 있어서 못 꺼내는데에…….”

머리 굴리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어차피 페널티 때문에 내 종노릇을 해야 하잖아. 플라스크에서 꺼내도…….”

“아니, 아닙니다.”

손요운이 끼어들었다.

“그 계약을 한 건 해준 씨의, 그, 전 영혼이니 빠져나갈 구석이 또 마련됩니다.”

“음…….”

손요운의 말에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확실히…….

확인을 끝내고 악마를 보자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렇겠군요.”

괘씸죄로 플라스크를 좀 더 흔들어 주었다.

“그럼 어떡하죠?”

“그건 내가 해결해 주도록 하지.”

“……대가가 필요합니까?”

“아니, 어차피 그 악마의 소유권은 내게 넘겼지 않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으니 맞는 말이다. 나는 다시 플라스크를 난쟁이에게 넘겼다. 난쟁이는 플라스크의 악마를 보며 씩 웃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취미로 해 두지. 그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해 줄 수 있네.”

역시 이름부터가 불길한 악마보다는 난쟁이다. 이쪽이 사회화가 더 되었다. 소원을 빌 일이 생기면 난쟁이에게 상담부터 받아 보자. 운이 좋으면 훨씬 남는 장사를 할 수도 있다.

“나흘.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돌려주도록 하지.”

“아니, 잠깐! 자기야, 우리, 우리 다시 이야기하지 않을래? 나도 많이 양보할게!”

악마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난쟁이가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악마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방법인 모양이다.

나는 악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악마에게는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 그걸 다 걷어차 버린 건 악마였고.

“자기야!”

시끄러워라.

“자기야!! 지금 날 이렇게 보내면 후회할 거야!”

새삼 느끼지만 악마의 어휘력도 별게 없다.

“나중에 땅 치며 울기 전에!!”

“저치들은 이미 자네에게 볼일이 끝났다네. 현대 사회의 거래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내 몇 번 말하지 않았던가?”

“씨, 씨발, 똥자루, 너도 후회하게 될걸?!”

“우리 같은 삶은 그런 불확실한 미래를 꿈꾸지 않지 않은가. 눈앞의 즐거움이면 충분하네.”

악마는 다시 타깃을 바꿨다.

“멍청이들아! 내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악마가 상당히 절박하다는 건 잘 알겠다.

“이곳이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준다니까?! 이건 진짜야! 원하면 계약서를 가져와도 돼!”

“그래 봤자 대가는 영혼이잖아.”

“다 같이 망하는 것보다는 한두 명 망하는 게 낫지 않아? 인간들은 다 그러던데!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잖아!”

어디서 배웠는지 나쁜 것만 배웠다.

나는 악마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의외로 맞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악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어?”

악마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늘이 내 옆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난쟁이는 그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대한 빨리 다시 오겠네.”

“이, 이 멍청이들! 무슨 수를 써도 이곳은 무너질 거야! 그렇게 될 거라고!!”

악마가 최후의 발악을 했다.

“그때가 되어서 후회나 실컷 해라!!!”

악마에게 저주받는 삶이라. 꽤 충직한 삶이었지 않은가.

난쟁이가 플라스크를 들고 사라졌다. 옥상 위에서는 따뜻한 햇살과 청명한 가을바람이 함께 어우러졌다.

이산예는 산뜻하게 말했다.

“잘 해결되었네요.”

오늘 일만 보면 그렇긴 하지.

“해준 씨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도 알겠고요.”

“네, 네.”

“…그렇습니까?”

“악마가 왜 시간의 흐름을 빗겨 갔겠습니까?”

“…정해준 씨의 영혼을 들고 있어서?”

“네. 그리고 악마가 정해준 씨의 영혼을 들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돌아왔을 때 그 백의 혼이 비게 된 겁니다. 딱 그 하나를 제외하곤 모든 것이 되돌아왔는데 말이죠.”

“그래. 바로 그것 때문이지.”

파란 하늘에서 할아버지 하나가 둥실둥실 내려왔다. 그 할아버지는 [오늘의 청룡님] 블로그에서 매일같이 ‘오늘도 청룡님은 안 오셨네요ㅠㅠ’ 하고 우는 원인이었다.

“빈 육체에는 혼이 필요했고, 그 몸의 본래 혼과 관련이 깊은 곳에서 억지로 혼을 가져왔네. 그 반동으로 우리 용들이 세운 벽 바깥의 세계가 한 번 더 무너졌고, 자네의 존재 때문에 벽 안쪽까지 위태로워졌지.”

청룡은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웃었다.

“나는 그대를 이곳에서 쫓아내려고 했네. 그래, 자네가 버릇없는 원숭이의 가짜 복숭아를 먹기 전까지는 가능한 이야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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