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92화 (192/202)

# 192

51. 이룰 수 없는 꿈(3)

“으으으음?”

멀뚱히 눈을 깜빡이는 악마보다도 난쟁이가 먼저 상황을 깨달았다.

“이게 대가라고?”

“허?”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악마가 괴성을 질러 댔다.

“자,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그게 무슨 소린가.”

난쟁이는 플라스크를 가리켰다.

“그건 자네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도 아니지 않은가.”

난쟁이의 말에 우리는 시선을 교환했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소원의 대가로 무조건 영혼을 받아 가는 악마와 난쟁이는 다르다. 방금 전 이산예가 지적하였듯이 난쟁이에게 주는 대가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게 중요하지 꼭 난쟁이가 지정하는 걸 내어주지 않아도 가능하다.

즉. 난쟁이가 그것을 반드시 받아야겠다, 하지 않는 이상, 잠실 타워에서 나를 빼내기 위해 오늘이 지불했던 묵주처럼 난쟁이가 탐을 낼 만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죠.”

본래라면 내가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이라도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이산예가 나서는 게 좋을 것이라 말했다. 난쟁이의 대가는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그래도 조금은 그 가치 매기기를 짐작할 수 있는 이가 상대하는 게 나을 거라며.

솔직히 말하면 어설프게 알고 있는 이가 사기당하기 더 쉬운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난쟁이에게 금을 잔뜩 뜯어낸 이산예라면 잘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악마가 무력하게끔 가두어 둔 건 정해준 씨가 해낸 일 아닙니까?”

“정확히는 내 덕분이다만.”

“네. 해준 씨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받아 낸 것이지요. 아닙니까?”

난쟁이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대가를 받아 가는 것들을 상대할 때는 수시로 확인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자네가 지불한 대가는 아니잖나.”

“오늘 씨와 해준 씨에게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마, 맞아요.”

“네. 모두 동의했습니다.”

이산예는 당당하게 난쟁이를 보았다.

“인정하네. 그렇지, 가둬 놓고 있는 건 내 힘이나 그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것. 그러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

말장난같이 들렸고, 실제로도 말장난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절차가 중요하다 하지 않는가. 비생산적으로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대가로 이걸 주겠다는 겁니다.”

이산예는 플라스크를 가볍게 흔들었다. 잡고 흔들기 좋게 생기긴 했다.

“4개월, 아니, 이제 3개월 남짓 남았군요. 악마를 풀어 주는 걸 제외하고, 그 기간 동안 악마의 소유권을 넘기겠습니다.”

“……흠.”

이번에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지 않았다. 이렇다 할 반응도 없었다.

그렇지만 씰룩거리는 입가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 수백 년 동안 경쟁해 온 라이벌을 플라스크째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지 않은가. 혹할 만하지. 현대 사회에 들어서는 악마의 영업력이 조금 죽긴 했어도 잠실 타워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꽤 귀찮고 짜증 나는 경쟁자였을 테다.

예감이 좋다. 이번에는 일이 잘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아니아니아니, 잠깐!”

물론 그 과정에 악마는 열심히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당연하지만 악마가 반발하는 것은 이미 예상했다. 물론 플라스크에 들어가 있으니 그 반발도 힘이 실리진 못했다.

“속박된 자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봐라. 우리가 플라스크를 흔들기 전에 난쟁이가 먼저 나서지 않는가.

“나를 어쩌려는 거야! 난 이 거래 반대야!!”

염소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외쳤다.

“그, 그래, 내가 지금은 이렇게 갇혀 있어도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너희 다 죽일 수 있거든?!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다 죽은 목숨이야!”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를 미래의 일로 협박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이 없다. 나는 측은한 눈으로 악마를 보다가 난쟁이에게 말했다.

“최소 조건이 3개월 동안 풀어 주지 않는다는 거지, 그 이후는…….”

“흠흠. 그렇지.”

난쟁이는 어쩐지 흐뭇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왜 날 두고 자기네들끼리 이야기하는 거야?”

악마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난쟁이는 입가를 비틀며 이산예의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보았다. 이산예가 쐐기를 박았다.

“해준 씨가 빈 소원은 기간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게 당신의 소유로 넘어간다면 다르겠지요.”

“그렇지.”

“자기 소유의 물건을 유지보수 하는 건 소유자로서는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그렇고말고.”

“그 과정에 플라스크의 수명이 더 늘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럴 수도 있지.”

“해준 씨가 당신에게 빈 소원을 번복하는 것도 아니고…. 대가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흠. 대가로 받을 수는 있지. 물론이지. 하지만 그게 충분한가는 다른 이야기지. 그건 질문을 들어 보고 결정하겠네.”

넘어오길 바랐는데 빠져나갔군.

아깝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걸리면 좋을 함정이었다. 넘어오지 않았다고 아쉬워할 건 없다.

플라스크 바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에 악마는 경악했다.

“너네 지금 무슨 살벌한 소리를 하는 거니?”

저런 말이 악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과연 악마는 양심이란 게 없다. 양심이 있다면 저런 말은 못 할 텐데.

“난쟁아, 우리 몇 안 되는 동업자끼리 이러면 안 되지.”

악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난쟁이를 타일렀다. 그러나 난쟁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몇 안 되니까 제거할 수 있을 때 경쟁자를 제거해야지. 나는 내가 독차지하는 시장이 좋네.”

“이 똥자루가!”

“흠, 뭐라고? 플라스크가 너무 좋아서 평생 살고 싶다고?”

“……아아니, 키가 아주 크시다고요, 선생님.”

난쟁이는 심드렁한 얼굴로 소매로 지팡이 장식을 닦았다. 개소리를 하면 들어는 주지만 정말 들어만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악마는 목표를 바꿨다. 코맹맹이 소리가 섞인 간드러진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자기야, 그동안 우리가 보냈던 뜨거운 밤은 생각 안 나니?”

찬송가와 읽어 주는 성경으로 가득했던 뜨거운 밤 말이지.

“날 이렇게 버리는 거야?”

나는 난쟁이에게 악마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려 주었다.

“저 염소가 찬송가를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흠, 찬송가 말인가?”

“자기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쟁이는 내가 한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온 거나 다름없다.

“성경도 잘 듣던데…….”

“호오, 성경까지?”

“에베소서를 좋아하더라고요.”

“에베소서…….”

“가끔 좀 시끄러워지긴 하는데 그럴 땐 어린이 방송 틀어 주니까 또 조용해지더라고요.”

“어린이 방송이라……. 자네에게 있는 동안 문명 생활을 누릴 건 다 누렸구만. 아주 호사스러운 생활이었겠어.”

악마는 나와의 추억을 되새기는지 감동 어린 얼굴로 플라스크 벽을 팡팡 두들기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해 주니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다.

“그럼 대가로 받아들인다는 거지요?”

난쟁이는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이산예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유쾌한 대가를 받아 보는 것도 처음이군. 되도록 후하게 쳐주도록 하지.”

역시 독점 시장은 좋지 않다. 제대로 된 기준 없이 엿장수 마음대로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은 늘어나면 오히려 고마운 상황이다. 이산예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대화를 방해하는 악마를 종이가방에 다시 넣었다. 마개를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게 뭐라고?”

부디 손요운이 사용할 일 없는 부적이 될 수 있기를.

이산예가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내야만 하는 일이다.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이산예는 나를 대신해서 난쟁이에게 물었다.

“정해준 씨가 빌었던 두 번째 소원은 이루어졌습니까?”

* * *

난쟁이는 괴상한 표정이 되었다. 종이가방에 있는 플라스크가 한 번 들썩였다. 소리는 막혀 있어도 의사 표현할 방법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개탄했다. 저런 의지로 좀 더 세상에 이바지할 방법을 찾지 않고 뭘 했나 싶었다.

“저자가 빌었던 소원?”

“첫 번째 소원은 알고 있습니다. 이루어졌죠.”

‘정해준’이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능력. 요 근래엔 빛을 볼 사건이 딱히 없었지만 ‘정해준’은 요긴하게 써먹었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다른 이들이 자신에게 덤벼들지 못하게 막는 용도로도 써먹었고.

“묻고 싶은 건 두 번째입니다. 정해준 씨는 당신이 말한 대가를 모아 갔잖습니까. 이루어졌습니까?”

“…….”

난쟁이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오른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두 번째? 이무기의 승천을 돕기 위해 빈 것을 말하나? 그건 내 소원을 자네와 저 아가씨가 이루어 준 형태에 가깝지. 그럼 잠실 타워에서의 일? 악마를 가두었지 않나. 어느 쪽이든 이루어졌네.”

“아뇨. 그건 ‘정해준’ 씨가 빈 소원이 아니죠. 해준 씨가 빈 소원입니다.”

“……?”

“소원을 빈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자주 있는 일입니까?”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난쟁이는 ‘정해준’을 알아보지 못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흔적으로 알은체를 했던 건 그다음 번 만남이었다.

‘정해준’은 난쟁이에게 대가를 모아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난쟁이는 너그럽게 기다리겠다 말하였다. 하지만 역사에서 악명을 떨쳤던 난쟁이가 과연 ‘정해준’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내가 난쟁이라면 중간중간 ‘정해준’이 무얼 하고 있나 살펴보기는 했을 것이다. 과연 그리움이 사라지고 목표만 남은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만약, 난쟁이가 보기보다 헐렁한 성격이라 지켜보지 않았다고 해 보자. 그러나 무려 여의주를 모아 오겠다는 인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난쟁이의 위화감은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아니…….”

난쟁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훑어보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차가운 시선이다.

“아니, 잠깐만. 그렇군. 뭔가, 뭔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이 악마는 본인이 정해준의 혼을 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흠.”

“악마가 혼을 빼 가기 전, 그는 여의주 7개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거든요. 불려 가지 않았습니까?”

툭, 툭.

난쟁이의 지팡이가 가늘게 떨렸다.

“기억해 보세요. ‘정해준’은 당신에게 소원을 두 개 빌었습니다. 당신은 그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이가 당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정해준’입니까?”

이산예는 눈을 빛냈다.

“서해의 수호룡 이목의 아들인 제가 보증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입니다.”

“…….”

“잘 생각해 보세요.”

지팡이가 멈췄다.

“한 사람에게서 그리움을 두 번이나 빼 가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지.”

뭔가 잡힐 듯 말 듯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난쟁이를 위해 나는 입을 열었다.

“기차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 기억합니까?”

“음?”

“그때 들었던 유리창 깨지는 소리 말입니다.”

“…….”

“이상하지 않습니까? 겨우 인간의 소원에 듣지 못할 정도로 많은 업이 얽혀 있다는 게.”

중요한 건 이다음이다. 나는 쐐기를 박아 주기로 했다.

“그리고, 뭐가 깨져 나갔는지 아십니까?”

“그야 당연히.”

“당연히?”

“…….”

난쟁이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강제로 지워진 위화감을 깨닫는 순간이다.

“허.”

난쟁이는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그렇게 된 것이었군.”

큭큭 거리던 웃음소리는 곧 우렁차게 바뀌었다.

“누구 짓이지? 어떤 이의 힘이기에 이렇게 세계 자체를 가둬 두는가?”

그러나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지.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난쟁이는 이산예의 손에 있는 종이가방을 가리켰다.

“대가로 그놈을 받아 가겠네. 부족하든 남든 상관하지 말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러시죠. 어차피 대가로 준비한 거니까.”

난쟁이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팡이의 장식이 깡마른 노인의 손에 삐걱거리며 부서졌다. 손요운이 몸을 굳히며 긴장했지만 난쟁이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먼저 질문에 답해 주도록 하지.”

난쟁이는 지팡이의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 몸의 주인은 소원을 이루었네. 하지만 동시에 이루지 못했어.”

무슨 소리야, 그게.

다행히 난쟁이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난쟁이는 이어 말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저 악마 놈이 영혼을 빼 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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