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51. 이룰 수 없는 꿈(2)
“네?”
이산예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늘이 뒤에서 내 어깨를 쿡쿡 찔렀다. 적당히 하라는 뜻이다.
곧 이산예의 표정이 억울하게 변했다.
“아니…. 오해입니다.”
놀리려는 의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기도 하다. 자고로 모든 권력자가 늘 현명하고 책임감 넘친 건 아니었지만, 시간을 되돌린다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실행하고자 했다면 좀 더 생각이란 걸 했어야 한다.
나는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어른이기 때문에 클레임을 걸진 않겠다는 얼굴로 이산예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네?”
“용들도 완벽한 생물은 아니잖습니까. 상황이 급했으니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내가 자기를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산예는 표정을 풀었다. 대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아직 용도 되지 못한 창창한 나이의 이무기의 주름 하나를 늘려 준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아팠다.
이산예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유가 있긴 있습니다….”
“아, 진짜 있습니까?”
“당연하죠.”
이산예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오늘마저 자신의 편을 들지 않을 줄은 몰랐다는 눈치다. 오늘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래도 나를 찌르는 것으로 나름대로 이산예를 감싸 주기는 했다.
“동해용왕님이 천장이 되셨을 때, 그분께서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으면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해준 씨가 이곳에 오게 되면서 모두 틀어졌지 않습니까.”
설마하니 여기서 나에게 책임을 떠넘길 줄이야.
“당연히 기꺼운 일이긴 합니다만, 그로 인해서 벽과 천장이 불안정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습니다. 해준 씨도 들어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유리창 깨지는 소리.”
처음 들었던 것은 난쟁이와 이야기하던 기차 안.
최소한 ‘정해준’은 새날에 입사한 이후 도중에 난쟁이에게 소원을 빌었던 적은 없었나 보네.
아니면 내 ‘세계’의 존재가 이 ‘세계’의 존재에 위협이 되었거나.
“세계가 불안정하니 그 안의 혼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업의 흔적이 남아 뱀이나 박서원 씨가 업을 빠르게 쌓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그러면요, 팀, 장님.”
그 말에 오늘이 입을 열었다.
“언… 제를, 기, 기점으로, 되, 되돌아, 오, 나요…?”
“본래라면 산함박이 잠실에서 사람들을 잡아먹기 직전에 다시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럼, 지, 금, 은요?”
“지금은 어떻게 될지 저도 모릅니다. 해준 씨가 있으니 아예 다 틀어졌으니까요.”
이산예는 내 존재가 기꺼운 일이라고 했는데, 어쩐지 듣고 있다 보니 전부 내 탓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 팀장님께서는 단어 선정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
“불안정해졌으니 회장님 기억도 쉽게 흔들렸던 겁니다. 용들이 모두 달려들어 만든 벽인데, 아무리 꼬리가 많은 여우라고 해도 저항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만약 제가 없었다면요?”
이산예는 잠깐 고민하다가 답했다.
“힘들었겠죠. 해준 씨가 없었다면 흔들리지도 않았을 테니 벽은 벽으로 남았을 겁니다.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벽이요. 그렇게 되면 제가 아무리 용을 써도 무리였겠지요.”
이산예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고마운 변수가 되었다. 그게 ‘정해준’에게도 마찬가지일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정해준’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나’에게까지 흘러왔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다.
“부르죠.”
대뜸 내뱉는 말이었지만 이산예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왜 이야기가 그 방향으로 갑니까?”
“그럼 안 하려고요?”
“하긴 해야죠….”
이산예는 침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누가 모른답니까?”
“…….”
이산예는 불만스런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렇게 꽁해 있어 봤자 어차피 그냥 한 소리에 불과하다. 지금은 그 누구도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지 못한다. 모두가 외길을 따라 걷는 중이다. 특히,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지낸 어린 용은 묘한 데서 인간과 닮은 구석이 있다. 해야 할 일을 두고 미적지근하게 굴거나, 자꾸 미루는 구석이 말이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면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마저 닮아 버렸다.
“어쩔 수 없죠. 할 거면 제사가 있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맘이 편합니다.”
더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는다는 점도.
“…괜찮다면 손요운 씨도 불러 주실 수 있으신가요?”
못 할 것도 없어서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우투리는 현재 우리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방패였다.
* * *
악마는 아침부터 시끄럽게 난리를 쳤다. 오늘이 저 염소 대가리가 햇빛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임을 직감한 모양이라 그냥 놔뒀다. 찬송가도 오늘은 틀어 주지 않았다.
“뭐, 뭐야? 인간은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던데 자기, 죽을 때 됐어?”
다시 찬송가를 틀어 줬다. 저렇게 듣고 싶어 하는데.
“꺄아아아아!!”
분명 주님께서도 저 어린양을 아껴 주실 것이다.
난쟁이가 아껴 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렇다. 난쟁이. 그 짜증 나는 면상을 다시 봐야 한다는 사실에 정말 짜증이 났지만 방법이 없다. 이제 와서 악마가 입을 연다고 해도 그 말을 믿을 수는 없다. 최소한 난쟁이는 대가를 바치면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바칠 대가도 정해져 있다.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직장 같은 특수과 연구소에 들어가기 전 주위를 보았다.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둘기들이 바닥을 쪼아대고 있었다. 저게 박서원의 염탐꾼인지 아닌지 경계해야 하는 신세라니. 인생 헛살았다.
“안녕하세요, 해준 씨.”
“팀장님은 옥상에 계세요.”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특수과 사람들이 반겨 줬다. 이 정도면 그냥 여기서 일하는 게 아닌지…? 이제 나에게 줬던 출입증도 거둬 가지 않는 게 그 증거다.
“네, 오늘도 고생하십니다.”
마주치는 특수과 사람들에게 적당히 인사해 주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목 없는 말이 몇 번이나 목이 베였던 그 자리도 지나쳤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이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해 줬다.
“안녕하세요, 오늘 씨.”
미세먼지 없는 하늘이 눈부셨다.
“차라리 지하로 내려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옥상은 너무 트였잖아요. 새가 들을 수도 있고.”
“지, 지하는, 주술, 이, 너무, 마, 많아서…. 오히려, 튀, 튕길, 수도, 있, 어요.”
“설마하니 난쟁이나 되는데 튕기겠습니까.”
“팀장, 님, 이, 오래, 머, 머무르… 셔서, 기, 기운이…….”
“…썩 얌전하게 지내시던 건 아닌가 봅니다?”
“큼, 가끔 좀 너무 위험하다 싶은 것들이 나오면 기운을 풀었을 뿐입니다.”
솔직히 아무래도 좋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청룡의 아드님께서 그렇게 살고 싶다는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나는 이산예에게 들고 온 종이가방을 건네며 물었다.
“그래서 새는요?”
이산예는 하늘을 보았다.
“어디 창이 없는 방에라도 가지 않는 이상 새를 피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 그러니, 아예, 개… 방된, 곳, 에서, 이야기… 하, 하는 게.”
“오히려 새들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말입니까?”
“네, 네.”
납득하지 못할 말은 아니다.
이제야 새를 경계한다고 해서 이미 박서원의 귀에 들어간 걸 어떻게 할 수 있지도 않고. 좋게 생각하자, 좋게.
최소한 박서원이 무작정 산함박 멱을 따서 과거로 가겠다는 일은 없을 테니까. 썩 위안은 되지 않았다.
옥상에 서서 박물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자 손요운도 금방 합류했다.
“물론 제가 필요한 일이라면 도와드릴 거긴 합니다만.”
손요운은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부적 같은 게 된 기분이거든요.”
예리한 지적이다. 손요운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 알아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이 무슨 게임 NPC 같은 말인가.
다행히 우리의 인성이 되신 우투리께서는 내 말을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뜨는 말을 했다.
“이번에는 난쟁이라고요?”
“네.”
서다흰에게 한평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던 것을 반성해서, 이번에는 손요운에게 꽤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차피 박서원도 알고 있는 이야기니 손요운도 알고 있어야 공평하다.
박서원과 그 주위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손요운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그 이야기에는 손요운 본인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누구와는 달리 손요운은 하해와 같이 너른 마음으로 모든 걸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그 사람들에게도 내 도움이 필요했나 보군요.’
여우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 손요운은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하죠. 나도 사람인데.’
그렇지만 소방관이었던 우투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은 신념이 깃든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걸로 차별을 두면 세상에 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나 같으면 다 때려치우라고 단청으로 쳐들어갔을 텐데. 확실히 우투리는 다르다.
‘저는 그 일의 유가족이 아니지만 주위에는 몇 명 있거든요. 평원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소방관 동기 중에 그런 애가 있었거든요. 박서원 씨와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닮았죠.’
‘……어떤 부분이?’
‘가족은 구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다니는 친구였거든요.’
그러니 내가 어쩌겠는가. 그냥 박수만 쳐 줬다. 정해영은 이런 앨 놔두고 왜……. 됐다. 누굴 좋아하든 간에 집에 돌아가면 걔 등은 내가 발 받침대로 쓸 것이다.
“해준 씨.”
아직은 조금 더운 감이 있는 바람이 불었다. 중양절이 되면 이 날씨도 이제 가을 날씨가 될까. 잠실 타워에 용이 있는 세상이라도 이상 기온을 해결해 주진 못한다. 쓸모없다.
이산예의 부름에 나는 끝이 닳은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멋들어진 글씨체로 쓰인 이름. 룸펠슈틸츠킨.
용들을 제외하고 이 세계가 돌아온 것을 아는 존재는 악마가 유일하다. 당연히 그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금방 깨달았다. 적어도 이전 시간에서 ‘정해준’은 벅벅 긁어모은 여의주로 소원을 이루고자 했다. 그 소원이 무엇인지, 이루어졌는지 실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혼란의 중심이 되기는 했다. 그리고 그 태풍의 눈 같은 놈을 지금은 악마가 가지고 있다.
그것이 악마를 시간의 흐름에서 빗겨 나가게 해 준 것이다.
“소원을 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쟁이는 기꺼이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바람이 두 번 정도 더 불었을 때, 옥상 한가운데에 깡마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정해준’에게는 난쟁이를 통해 빌고자 했던 소원이 있었다. 난쟁이는 대가로 여의주 혹은 그에 준하는 보주 7개를 원했다.
세상이 흔들려 여우가 위화감을 깨달았다면 난쟁이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흠흠, 요 근래 이렇게 나를 자주 찾아 주는 이들이 없는데 무척이나 기쁘군.”
난쟁이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누가 소원을 빌고 싶다고?”
“…….”
이산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납니다, 난쟁이.”
“큼, 흠. 자네가? 뭐, 또 금이나 내놓으라고 그러는 건가?”
……도대체 목포에서 뭘 어쨌길래 난쟁이가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이산예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 질문? 흠, 좋네, 좋아. 그런 것이라면 대가는 좀 가벼워지지. 다음 소원으로 이어지는 종류라면 상담이라 해 줄 수도 있지. 어떤가?”
“아뇨. 딱히 그런 종류는 아닙니다.”
난쟁이는 노골적으로 아쉬운 표정을 했다.
“그럼?”
“대가부터 먼저 지불하도록 하죠.”
“흠? 미안하지만 대가는 자네가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네.”
“가능한 거 압니다. 오늘 씨의 묵주를 당신이 원한 건 아니었잖습니까?”
“……흠.”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어 번 걷어찼다.
“억지로 떠넘기는 건 아니고요. 당신이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그렇다 해도 질문과 무게가 맞지 않으면 더 요구할 것이네.”
“물론이죠.”
이산예는 아까 내가 준 종이가방에서 대가로 지불할 것을 꺼냈다. 난쟁이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이거면 어지간한 질문에는 충분할 거라 생각되는데요.”
플라스크 안의 염소가 눈을 끔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