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51. 이룰 수 없는 꿈(1)
“저, 한평화 씨.”
“네? ……오해하지 마세요. 전 팀장님 아버지를 그냥 순수하게 마스코트 격으로 좋아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럼요?”
“평화 씨 아버님은.”
“우리 아빠가 왜요.”
“그, 제가 감히 따라 할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한 분이십니다.”
“…….”
“그분은 생명을 구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으셨어요.”
“…….”
“그날 저는 그분께 인사하지 못했습니다. 평화 씨는 이런 말을 듣는 걸 싫어하시겠지만, 그래도 평화 씨의 아버님께 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기요, 팀장님.”
“네.”
“팀장님이 봤던 우리 아빠는 어땠어요?”
“제가 이때껏 보았던 인간 중 가장 빛나는 분이셨습니다.”
어린 용은 해와 달처럼 빛나는 눈으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 * *
TV 속의 목사님이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악마는 플라스크 바닥에 널브러진 채 무어라 구시렁댔다.
“좋은가 봐.”
내 말에 악마는 마구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야기해 주면 한 시간 정도는 다른 채널 틀어 주겠다니까.”
“어린이TV 틀어 주는 거잖아!”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엔 어린이TV에서도 재밌는 거 많이 해.”
“그럼 자기가 보든지!”
“나는 성인이잖아.”
“나도 그런 걸 볼 나이는 지났거든?!”
“그랬어?”
나는 대충 악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악마는 진이 빠져 플라스크 바닥을 청소라도 할 것처럼 굴러다녔지만 플라스크는 청소할 것도 없이 깨끗했다. 나는 악마의 헛수고를 비웃었다.
“이야기하는 게 싫으면 어쩔 수 없지.”
TV 볼륨을 더 키웠다. 좋은 이야기는 크게 들어야 하는 법이다. 악마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세상에 좋은 말씀이 오죽 많아야지. 악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바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교훈이 담긴 이야기가 거짓말 안 하고 굴러다닌다. 내가 고생을 안 해도 악마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너무 많았다.
“좋아! 그래, 알았다고!”
나의 굳은 의지를 느꼈는지 악마가 항복 선언을 했다.
“저 빌어먹을 채널만 좀 바꿔 줘.”
“그래.”
“어린이 채널은 안 돼.”
“그 정도야, 뭐.”
“종교도 안 되고. 자연 다큐멘터리 채널도 안 돼.”
“알았어.”
악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 그래서 나랑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건데, 자기야?”
“별건 아닌데.”
보통 이런 말 하면 별거가 맞긴 했다. 그러나 악마는 내 속뜻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발굽으로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네가 들고 있다고 했잖아.”
“…뭘?”
“이 몸의 영혼.”
악마의 움직임이 멈췄다. 잔뜩 인상을 쓰고 투덜거리던 입이 쭈우욱 찢어졌다. 사람 얼굴도 아니고 염소 머리긴 했지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어쩐지 인간처럼 보여서 더욱 기괴해졌다.
플라스크 안에 가둬지면서 힘을 쓰지 못하는 주제에 저런 재주는 아직 남아 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플라스크를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꺄악!”
아직 못 차린 것 같아서 몇 번 더 흔들어 주었다. 악마는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이, 이렇게 하면 얘기 안 해 줄 거야!”
되도 않는 협박까지 하고.
“그럼 어쩔 수 없지.”
“엥?”
“싫다는데 억지로 시키고 싶지는 않아.”
“에엥?”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내가 미쳤다고 악마와 이야기를 계속하겠는가.
“자, 잠깐만, 자기야.”
악마는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그렇게 나오면 엄청 불안해지거든?”
“평소 행실의 방증이지.”
“자기야!”
악마는 내가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았는지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게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면 그게 악마겠니?”
“악마라고 나쁜 일만 하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야.”
나는 미련을 가지지 않고 악마에게서 등을 돌렸다. 꼭 악마가 아니더라도 방법은 있다. 악마에게 듣는 것이 빠르고 간편해서 물었던 거지. 애초에 나는 반대했다. 악마라는 놈이 쉽게 모든 걸 털어놓을 것 같냐고.
그러나 내가 제시한 방법은 위험 부담이 크다고 오늘에게 반려 당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는데.
“자기야, 우리 이야기 좀 할까?”
“할 생각 없다며.”
“그 영혼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어디 가려구 그래!”
“어디 있기는. 네가 들고 있겠지.”
“그, 그야 그런데…….”
“얻은 영혼은 먹는 거 아니었냐?”
콘코바르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가 그랬다. 수확한 영혼은 악마가 받아 갔고, 모두 그대로 먹혔을 것이라고.
악마는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돼지 같잖니.”
그 꼴이 같잖아서 플라스크를 재차 흔들었다.
“끄으응, 꼭 먹기만 하는 건 아니거든.”
악마는 플라스크 바닥에 엎어진 채 말했다.
“신기한 건 박제도 하고, 일하는 데도 써먹고…. 탐구 생활도 하지.”
“그러냐.”
내가 알고 싶은 건 ‘정해준’의 행방이 아니다.
시간이 돌아오기 전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이산예라 하더라도 모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산예뿐만이 아니다. 아마 그 자리에 있었던 용들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건 그들이 천장과 벽이 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일 테니까.
왜 ‘내’가 ‘정해준’의 몸에 불려 왔는가.
청룡이라면 알까? 그러나 청룡은 어디서 뭘 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산예의 말에 의하면 저 하늘 어디에 아버지의 존재는 느껴지지만 대답을 바랄 순 없다고 했다.
하지만 역시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안 된다.
“자기야.”
악마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진지한 눈빛으로 다시 나를 불렀다. 자그마한 염소 대가리로 그래 봤자 깜찍하지도 않고 오히려 징그러워서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나 상처받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과 이야기하는 건 무리다. 처음 내가 생각했던 계획대로 가는 게 최선이다.
“자기야!”
괜히 시간만 버렸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니까!”
“할 생각 없댔잖아.”
“그건 그런데, 지금 내 직감이 말하고 있거든? 자기 나에게 또 무슨 지독한 짓을 하려는 셈이지?”
악마가 정답을 말했다.
“우리 대화로 풀자!”
“난 싫다는 애 붙잡고 이야기하는 취미 없어.”
“자기야!!”
진짜 귀찮게.
나는 악마에게 다가갔다. 플라스크 안의 염소는 흠칫 떨며 뒷걸음질 쳤지만 그래 봐야 플라스크 안이다.
“싫다면 됐다니까 왜 자꾸 귀찮게 해?”
나는 대 악마 전용으로 구입한 태블릿 PC를 켰다. 대기화면에는 요 근래 사용 빈도수가 유달리 높은 어플이 하나 있었다. 악마의 얼굴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이거 듣고 회개하자.”
태블릿 PC에서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요즘 세상은 참 편해져서 이젠 배우나 성우가 성경도 읽어 준다. 읽는 게 아니라 읽어 주는 시대. 과학 승리다.
악마는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아악! 또 이거야!!! 자기야, 차라리 TV 틀어 줘! 어린이TV도 괜찮아! 인강도 괜찮아! 아니, 목사님 말씀도 괜찮으니까!!”
악마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 * *
“역시 악마는 못 써먹겠습니다.”
“으, 으음…….”
오늘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죠….”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악마는 악마라는 말이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다물고 있는 대로 의심스럽고, 순순히 입을 열어도 마찬가지로 의심스럽고.”
“끄응…….”
“역시 제가 생각했던 방법으로 가죠.”
“…….”
오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원찮은 표정이었다. 불만은 있지만 대안이 달리 없었다.
나는 그런 오늘을 달랬다.
“저번이랑은 다르니까 걱정 마세요.”
“하, 하지만.”
“어차피 그쪽은 강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정 아니다 싶으면 관두면 되죠.”
“그렇, 긴, 해도.”
“그리고 꼭 내가 안 해도 되잖아요? 위험한 것 같으면 팀장님 시켜 먹죠.”
내가 아무리 말해도 걱정 어린 기색을 지우지 못한 오늘은 이 팀장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에 띄게 안심했다. 조금 상처받았지만 종족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부하 된 입장에서 상사를 너무 부려 먹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난 부하도 아니니 괜찮다.
“저라고 만능은 아닙니다, 오늘 씨, 해준 씨.”
이산예는 겸손했다. 좋은 상사의 귀감이다. 야근시키는 걸 빼곤.
“솔직히 어떻게 될지 몰라서 말리고 싶긴 하지만, 변수를 없애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이산예는 새끼손톱만 한 나무 구슬에 조각칼로 뭔갈 새기고 있다가 쓰게 웃었다. 구슬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눈알이 빠질 것 같은 작은 크기인데 거기에 뭔가를 조각하다니. 용의 새끼는 시력도 남다른가?
이산예는 조각칼을 내려놓았다. 하얀 수건 위에 놓여 있는 구슬에는 꽃이 새겨져 있었다.
“해준 씨가 왜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도 알긴 해야 하니까요.”
“워, 원인을, 알면, 과정, 도, 알, 수, 있으니까요.”
“그게 원인인지 결과인지, 그것도 아니면 과정일지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알아봐야 할 필요는 있다니까요.”
그러나 이산예도 내가 제시한 방법에 영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을 했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팀장님이 아버님께 물어보는 거는요?”
“지금은 아버지가 대답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요.”
그 말을 몇 번째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평화가 석촌 호수에 던진 씨앗이 묘목이 되어 물 위로 빼꼼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청룡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머리를 꾹꾹 눌리다가 물었다.
“도대체 그 용은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게, 곧 중양절이잖습니까.”
이산예는 볼을 긁적였다.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이다. 칠석처럼 내 세계에서는 옛날이라면 모를까 현대에서는 별 의미 없이 지나가는 날이었으나 여기서는 휴일이다.
괜히 쉬는 날로 지정된 건 아니겠지 싶어서 찾아봤지만 크게 뭔가 하는 건 없었다. 기껏해야 나라에서 주관하는 차례를 지내는 정도.
“중양절? 그게 왜요?”
물론 새가 낮말을 훔쳐 듣고, 잠실 타워에 용이 있으며 석촌 호수에서는 여의주에서 싹 튼 버드나무가 자라는 마당에 제사라는 것이 단순히 지나가는 귀찮은 행사는 아니겠지만.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추석에도 특수과는 차례를 소홀히 했다가 노한 조상님과 마주한 사람들의 뒤처리를 하느라 바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추석이 끝나고 서다흰을 보았을 때 반쯤 죽어 가고 있었으니 큰일이긴 했을 것이다.
“중양절에는 망제가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풍습이 있는 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망제는 연고가 없는 영혼을 위한 제사입니다. 조상이나 자손 없는 이들을 기리는 제사죠. 언제 죽었는지 모를 영혼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가끔 어쩔 수 없이 차례를 지내지 못한 이들이 이날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돌아왔다고 해서, 세계가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죠.”
“죽은 이들은 기억하지 못해도 죽은 사실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거죠. 산함박이나 박서원 씨가 보다 쉽게 업을 쌓고 있는 것처럼요.”
이산예는 연꽃을 조각한 나무 구슬을 매만지며 말했다.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혼처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
“죽었던 기억이 있는 혼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제사를 지낼 겁니다.”
“……저, 팀장님.”
“네?”
“정말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하시죠.”
나는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말을 드디어 내뱉었다. 내가 할 말을 예상한 오늘은 차마 말리진 못하고 다른 곳을 보았다.
“팀장님 친지분들 말입니다.”
“네.”
“세상이 무너지는 걸 막는 건 다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뒤처리를 너무 생각 안 한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