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50. 평화의 나라(3)
“그렇구나아.”
집에 갈 타이밍을 놓친 나와 오늘, 서다흰은 어색한 얼굴로 커피 한 잔씩을 손에 쥐고 웃었다.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불편한 자리였다.
반면 한평화는 심드렁한 얼굴로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 후루룩 마시고 있었다. 청룡 얘기에 잠깐 눈이 흔들렸던 것도 잠시, 지금은 놀라울 만큼 심드렁했다.
“그야 나는 청룡님이 좋은 거지 청룡님 가족까지 좋아하진 않거든요?”
그래도 앞에 이산예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진 않았다.
“거기 팀장님이 싫다는 게 아니라,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에요.”
한평화는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청룡님은 청룡 모습일 때가 좋아요. 아버지 만나시면 되도록 인간으로 둔갑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겠어요?”
취향도 참 확고하다.
“요즘 통 안 보이시던데 잠실 타워 아예 떠나신 건 아니죠?”
개인적인 궁금증도 해결하고.
이산예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요? 그럼 됐어요.”
저런 삶을 본받아야 한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확인하고 사는 삶.
한평화가 입을 다물자 다시 조용해졌다. 우리야 딱히 말을 할 거리가 없었고 송희선도 여전히 이산예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볼 거면서 왜 부득불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붙잡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커피도 이산예가 계산했다.
“이쪽 아가씨들과는 처음 뵙는군요.”
마침내 송희선의 입이 열렸다. 오늘과 서다흰이 화들짝 놀라 했다.
“아, 그, 트, 특수과, 소속, 오늘, 이라고, 하, 합니다….”
“저는 초능력자 서다흰이라고 합니다.”
“오늘 씨는…….”
손녀가 서천꽃을 피워 내는 혈통이다. 송희선도 오늘만큼 잘 본다면 모를까 못 보진 않을 것이다. 송희선의 눈이 오늘을 향했다.
“…….”
그러나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서다흰을 보았다.
“실례가 아니라면 능력을 물어봐도…?”
“어, 아, 네! 정화, 입니다.”
“정화라고요?”
송희선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방심했다.
“썩 공통점도 없으면서 모으기 힘든 이들을 잘도 모았구나.”
송희선은 얼굴색이 하나도 안 변한 채 혼잣말하는 것처럼 내게 말했다.
솔직히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긴 했지만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침착하게. 정해영의 손위 형제로 살면서 깨달은 인생의 교훈은 삶은 예측불허고, 놀라는 건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침착하게. 정해영을 다룰 때 필요한 요소였다.
“거기에 평화까지.”
“응? 할머니, 난 회장님한테 불려 왔는데?”
“잘도 꼬여 냈지.”
여기에 우투리까지 있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나는 송희선의 눈빛을 감내했다.
“네가 여기에 있는 건 서원이와 쌍둥이들이 아는 그 아이와는 다르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고요.”
“서원이는 네가 뭘 하든 가기로 한 길을 갈 거란다.”
“안 말립니다.”
내가 안 말려도 그리로 걸어가는 길은 반쯤 막혀 있기도 하다. 이제 겨우 싹이 났을 뿐이지만 숨살이꽃을 양분으로 삼은 이상 나무는 쑥쑥 자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민석도 우리에게 여우 구슬을 내놓겠지. 이 세계가 불안정하다는 걸 안 이상 박서원이 무사히 시간을 거스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인간의 셈에도 능한 여우라면 좀 더 승산이 높은 쪽에 걸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정해준’처럼 박서원을 찌르진 않을 테니까.
“각자 열심히 하는 거죠.”
“……그래. 그렇구나.”
송희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와 어린 용님께서 산함박이 보다 쉽게 쌓은 업을 막기 위해 버드나무를 심은 것은…….”
“…자, 잠깐.”
“송희선 씨.”
오늘과 이산예가 화들짝 놀라며 송희선을 불렀다. 송희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죄다 무시하고 좋을 대로 말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두가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이라 여기고 있는 듯하다. 썩 틀린 말도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내용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상하잖아.
“평화에게 말한 것처럼 서원이를 돕는 길은 아니지 않니?”
“엑, 할머니, 진짜야? 뭐야, 팀장님. 우리 오빠 돕는 거라면서요?!”
“어쩐지 내 계산보다 업이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고 했었지.”
어째서 송희선이 이 이야기를 알고 있지?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이산예의 세계나 특수과 연구소에서. 최근에는 잠실 타워에서 구민석과 했던 게 전부다. 송희선이 알고 있을 리 없는 이야기다.
“그 뱀의 업을 정화할 수 있다는 소리는 서원이의 업 또한 정화된다는 이야기잖니. 서원이 성격이라면 버드나무가 어쨌든 뱀이 나타나면 잡으러 갈 테고.”
송희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버드나무 힘 아래에 있는 서원이라면 어린 용님께서 힘을 쓴다면 서원이의 여의주를 빼낼 수 있으시겠지요.”
“…….”
“서원이가 무력화되면 쌍둥이는 쉬울 테고.”
“할머니.”
한평화가 불안한 눈으로 송희선을 불렀다.
“나 저 나무 키우면 안 됐던 거야?”
“그건 아니란다. 저건 키웠어야 했어. 그래야 다른 사람이 다치는 일 없이 그 뱀을 잡을 수 있으니까.”
이제 서다흰도 송희선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송희선은 왜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야?
“하나만 확신해 준다면, 서원이는 너를, 어린 용님을 위해 움직일 거란다.”
체구가 작고, 목소리도 작다. 그러나 허리는 꼿꼿했고 움츠러드는 법이 없다.
송희선은 나와 이산예에게 물었다.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입니까?”
“…….”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산예는 대답했다.
“네.”
“그래요. 그럼 됐습니다. 서원이가 제 목숨을 과거에 내던지지 않는다고 하면 쌍둥이는 그저 좋아라 할 테니 그 아이들도 힘을 보태 주겠죠.”
이산예는 송희선의 말에 잠깐 멈칫하다가 물었다.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뇨, 중요합니다.”
“…그렇군요.”
송희선은 아직 식지 않은 커피로 목을 축였다.
“간단합니다.”
송희선은 창밖으로 비치는 하늘을 보았다. 높기만 한 가을 하늘이다. 새하얀 구름 아래로 마침 몇 마리의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갔다.
소나무처럼 청량한 목소리가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낮말은 새가 듣는 법이지요.”
* * *
까치 한 마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훌쩍 날아 들어왔다. 그 뒤를 쫓아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와 참새 서너 마리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베란다로 들어왔다.
“깍? 까악?”
“까아악! 깍!”
“짹짹, 짹, 짹짹짹.”
집의 주인은 멀쩡한 인간이다. 인간은 팔짱을 낀 채 베란다 문에 기대어 새들의 기이한 모습을 구경했다.
“까악!”
갑작스레 까치가 역정을 냈다.
“까아아악…….”
까마귀는 풀이 죽어 머리를 수그렸다. 까치는 까마귀의 머리를 쪼는 것처럼 위협하다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짹짹짹짹!”
참새들은 신나서 지저귀기 시작했다. 인간의 귀에는 그게 꼭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베란다에는 크고 작은 화분이 많았다. 녹음이 우거진 화분과는 조금 동떨어진 구석에, 아무것도 없이 흙만 채워진 화분 세 개가 덜렁 있었다. 그 앞에서 새들은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다.
까치가 인간을 보며 울었다. 그는 익숙하게 그릇에 물을 채워 바닥에 내려놓았다. 까마귀와 참새는 목을 잔뜩 축이고는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날아갔다.
“까아아악.”
이야기를 끝낸 까치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인간의 어깨에 올라탔다.
“까아악. 까악? 깍.”
“시끄러워요.”
인간이 눈을 찌푸렸다.
“할 말 있으면 인간으로 둔갑하고 말하세요.”
“에이, 매정한 놈 같으니라고!”
“멀쩡한 입 놔뒀다 뭐 합니까?”
“그쪽도 내 입이거든?”
박서원은 코웃음 쳤다.
“부리가 아니라?”
“너 길 걷다가 새똥 맞는다.”
“판사님께서 그런 지저분한 일을 사주해도 되는 겁니까?”
“판사님이라 부를 거면 그만큼 취급을 해 주던지. 그리고 아직 아니거든?”
“예비 판사보다는 온갖 날것들의 판사가 좀 더 있어 보이잖아요. 나도 사 자 직업 친구 가지고 싶은데.”
“지금 우리 아버지보고 빨리 은퇴하란 거야?”
“빨리 권력자가 되라는 거죠.”
“말이라도 못 하면….”
작매는 투덜거리며 신발을 베란다에 대충 벗어 던지고 거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집은 조용했다.
작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쌍둥이는?”
“동생이랑 잠깐 나갔어요.”
“그래? 흠, 역시 이 집은 간식이 많단 말야.”
작매는 거실 테이블 위에 있는 과자를 뜯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송 할머니는?”
“응. 근데 늦었어.”
“그건 알아요. TV에도 나오니까.”
박서원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석촌 호수 가득 피어 있는 새파란 연꽃이 TV를 가득 채웠다.
박서원의 눈이 가라앉은 걸 본 작매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거, 걱정할 수준은 아냐! 기운을 얕게 퍼뜨려서 꽃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고……. 그러니까, 그, 바리데기도 문제없어!”
“평화는 야무진 아이니까 알아서 잘 했겠죠.”
“…그런데 왜 죽상이야?”
박서원이 TV 소리를 낮추었다. 평소에는 쌍둥이와 그 여동생의 목소리로 활기찼던 집이 고요하기만 했다. 리포터는 석촌 호수의 파란 연꽃을 보며 입만 뻐끔거렸다.
그 화면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박서원은 거의 내뱉듯 작매의 말에 대답했다.
“진로 고민 때문에요.”
작매는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냐는 눈으로 박서원을 보았다. 박서원은 작게 웃었다.
“꽤 진지한데요.”
“누가 뭐래?”
“나는 작매 씨처럼 부모를 잘 만나서 새들의 왕이 될 운명은 아니니까…….”
“너 지금 나 꼽 주니?”
작매는 부루퉁한 얼굴로 과자를 입에 쏙 넣었다. 부스러기가 묻은 입가를 쓱쓱 닦은 작매는 다시 박서원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진로?”
“그동안 쌓아 온 게 아까워서라도 버리진 못하겠고. 어차피 버릴 수도 없는 것들이고.”
“흐응.”
“어차피 회장님도 쟤네한테 반쯤 넘어간 것 같고……. 나 참, 여우가 그렇게 귀가 얇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것도 사업하는 주제에.”
“원래 여우는 믿는 게 아니랬어.”
박서원은 TV 속의 파란 연꽃을 가리켰다.
“회장님한테 낚였든 안 낚였든 평화도 꽃을 저렇게나 피워 놨는데 이대로 안 쓰면 아깝잖아요.”
“누가?”
박서원이 잠깐 멈칫했다. 작매는 히죽 웃으며 과자에 손을 뻗었다.
“바리데기는 별생각 없을걸.”
“걔는 이상한 데서 생각이 없어서 그래요. 꽃만 키운 애가 뭘 알겠어.”
작매는 흥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평범한 꽃이 아니긴 하다. 그만큼 피었는데 그대로 시들면 아깝긴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해 줘야지.
“그래서 무슨 진로를 고민 중인 건데?”
“버리기도 아깝고 버릴 수도 없다면 역시 써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박서원의 입가에 걸리는 미소가 불길하다.
‘저놈이 저렇게 웃으면 항상 안 좋은 일만 일어나던데.’
그러나 작매는 현명하게도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방해는 안 할 거야?”
솔직히 할 줄 알았다.
“보다 나은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이라잖아요.”
“…….”
“세계가 부서졌다고도 했고, 시간이 돌아왔다고도 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성이 큰 방법보다는 청룡의 아들이 보증하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겠죠.”
이걸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신념이 확고하다고 해야 할까. 작매는 씁쓸한 기분에 휩싸인 채 그녀의 인간 친구를 보았다.
“작매 씨.”
“왜.”
어쩔 수 없이 작매의 목소리가 불퉁스러워졌다.
“구두 장군이 죽기 전에 그랬잖아요.”
“…응.”
“그 뱀이 땅꾼을 쫓고 있다고.”
“그랬지.”
“항상 그런 놈들은 죽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다니까.”
“…….”
“어쨌든 서로가 서로를 쫓고 있는데, 그놈이 기어 나오는 게 겨울이라고요?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
“설마.”
작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침 평화가 딱 좋은 무대를 만들어 줬겠다, 나도 저 버드나무 아래라면 주하와 주연이 업을 모조리 끌어와도 버틸 수 있겠죠.”
“……박서원아.”
“그만한 업에 여의주에, 버드나무까지. 머리를 내밀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너 그러다 진짜 죽어.”
그러나 그 걱정은 박서원에게 닿지 못했다.
“뱀 대가리 칠 때까지 난 안 죽어요.”
“……좀 더 평화로운 방법은 없어?”
“두 번 쌓이는 업 때문에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요. 너무 계획대로 잘 굴러간다 했었지.”
박서원은 퍽 다정하게 웃었다. 역시 저놈이 저렇게 웃을 때는 안 좋은 일만 일어난다.
작매는 입맛을 다셨다. 쓴맛만 났다.
“다들 자기 좋을 대로 세계를 굴리는데 나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
그래도 작매는 그 말에는 대꾸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무슨 적반하장격인 말인가.
“넌 모르나 본데, 네가 제일 좋을 대로 하고 다녔단다.”
작매는 엄숙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