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50. 평화의 나라(2)
겨울도 아닌데 찬바람이 분다.
여기서부터는 집안일인 것 같은데 이대로 집에 가면 안 될까. 예로부터 남의 집 일에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송희선은 기가 막힌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서원이에게 듣고 설마설마했는데. 나보고 네 엄마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거, 거기서 엄마가 왜 나와!”
한평화는 당황한 얼굴로 빽 소리를 질렀다. 송희선은 한평화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손바닥으로 등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요 계집애가, 정신이 있어, 없어!”
“아야, 할머니, 잠깐, 잠깐만!”
한평화는 몸을 뒤틀며 할머니의 손을 피했다.
“다 이유가 있어! 이유가 있다니까?!”
그런 한평화와 눈이 마주쳤다. 한평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사람들 앞에서 꼭 이래야겠어?!”
“아직도 입만 살아서는!”
찰싹!
“할머니, 아프다구!”
“당연히 아프라고 때리는 거지!”
찰싹! 찰싹!
“어떻게 된 애가 클수록 말을 더 안 들어?! 주연이가 싫다, 싫다 하더니 하는 행동은 똑같아! 한 번 말하면 하나도 못 알아듣고!”
“백주연이랑 닮았다고 하지 마!”
“이게 오빠라고 안 해?”
“몰라, 안 해!”
“이러니까 닮았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백주연이랑 닮았다고 하지 말라니까! 차라리 서원 오빠랑 닮았다고 해 줘!”
“서원이는 말 잘 들어!”
아무리 생각해도 한평화가 매를 벌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오늘과 이산예, 서다흰이 슬금슬금 내 쪽으로 더 붙어 왔다. 오늘과 서다흰은 그렇다 쳐도 팀장이라는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잠깐 이산예를 바라보고 송희선을 보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만큼 기세가 대단했다.
우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집에 가고 싶어졌다.
“싹이 났으면 할 일 다 끝난 거잖아요? 저희는 가면 안 돼요?”
그 생각은 서다흰도 마찬가지였는지 소곤거렸다. 나와 오늘은 서다흰이 정말 맞는 말을 했다는 눈으로 이산예를 보았다. 이산예는 끙, 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래도 수고해 주셨는데 인사는 하고 가야….”
“할머니! 손녀 아프다니까!! 왜 자꾸 때려!!!”
“넌 좀 맞아야 돼.”
할머니와 손녀는 새파란 연꽃이 핀 호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녀는 서천꽃과 여의주에 싹을 틔울 만큼 뛰어난 원예사고, 할머니는 어마어마한 업을 억누를 수 있는 부적을 만들어 낸 강한 무당이다.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들을 생각하면 대단한 핏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소름 끼치는 방을 만들고 한씨 가문의 대단한 핏줄에 일조한 무당도 손녀 앞에서는 손이 매운 평범한 할머니가 되었다. 서다흰은 꿋꿋하게 주장했다.
“나중에 전화로 따로 인사해도 되잖아요. 할머니와 이야기하는 데에 방해될까 봐 먼저 갔다고.”
이산예의 얼굴을 보니 꽤 솔깃한 제안이었던 듯했다.
서다흰은 그렇잖아도 작은 목소리를 더 낮추며 속닥거렸다.
“그리고 박서원 씨 이름을 저렇게 친근하게 부르는데 저 할머니도 관계자 아니에요? 아까 그…… 한평화 씨? 하는 말도 되게 의미심장했고.”
“…….”
박서원과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는 했지만 그 외의 조력자에 대한 이야기는 손요운과 서다흰에게 자세히 하진 않았다. 이렇게 한평화와 만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미루지 말고 진작 이야기해 놓을걸. 뒤늦게 후회했다.
이산예의 기억을 보았을 때는 한평화의 ㅎ자도 보이지 않아서 아예 생각을 못 했다. 다쳤을 때 꽃이나 주는 줄 알았지. 생각해 보면 그걸 봤다고 모든 일이 그대로 일어나지도 않을 텐데.
“왜! 왜 안 된다는 건데!”
“위험하잖니!”
크게 소리를 친 송희선은 조금 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화야, 저 꽃은….”
“왜!!!”
한평화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송희선의 말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꽃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볼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왜 할머니만 복수하려고 하는 건데!”
송희선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한테만 아들이야? 가족이야? 우리 아빠였다고! 내 아빠였는데, 왜 난 못 하게 하는 거야. 나도 복수하게 해 줘.”
한평화는 숨살이꽃을 닮은 꽃이 그려진 원피스를 꾹 잡았다. 파란 꽃이 한평화의 손에 우그러졌다.
“할머니보다 내가 먼저 오빠랑 같이 복수하기로 약속했는데.”
“평화야.”
“오빠가 할머니랑 집 나갔을 때, 나 대신 복수해 주기로 약속했었어. 근데, 근데, 나는 나도 하고 싶었단 말야.”
한평화의 감정에 동화라도 되었는지 호수 위에 잔뜩 핀 숨살이꽃의 색이 더 진해졌다. 송희선은 그걸 눈치챘는지 안색이 새파래졌다.
“왜 할머니만 복수하려는 건데…….”
“할머니가 잘못했어. 평화야, 진정하렴. 우리 손녀, 진정하자. 응?”
“그래서 회장님이 나한테 전화했을 때 진짜 넘 기뻤단 말야.”
“…회장? 그놈이 너한테 전화했다구?”
“할머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 그럼. 듣고 있지.”
저 집안은 결국 손녀 말에 죽고 못 사는구나. 증조할아버지나 할머니나 피는 하나도 섞이지 않았을 텐데 반응이 비슷했다. 비록 파탄은 났어도 가족은 가족이라는 말이겠지.
한평화가 동생을 극성맞게 아끼는 만큼 한평화 또한 집안의 사랑받는 손녀이다. 말투만 좀 고울 뿐이지 복수에 남은 인생을 내던진 한진열의 나무도 떼쓰는 손녀 앞에서는 안절부절못하는 할머니일 뿐이다.
하나같이 안쓰러운 인생뿐이다. 사람 잡아먹는 요괴나 손을 놔 버린 영물들만 아니었으면 평화롭게 잘 살았을 인생들이기도 했다.
한평화는 뾰족하게 대꾸했다.
“할머니, 알겠어? 나도 복수할 거라구. 말리지 마.”
손녀는 할머니의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대못을 박았다. 저런 불효막심한 대화가 드라마에서는 적당히 필터링이 되었길 빌 뿐이다.
아니지, 드라마 내용은 지금이 아니라 이전의 시간이니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건 다행이군.
“평화야…….”
송희선은 기운 없이 손녀를 불렀다. 당연히 손녀가 저런 말을 하면 말릴 수밖에 없긴 하겠지.
“그렇지만 저 꽃은….”
그러고는 갑자기 우릴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이산예를 노려보았다.
“저분이 시키던?”
“응? 누구?”
“저분 말이다.”
“그러니까 누구?”
“양복 입으신 분.”
“저 사람? 아니, 꽃은 그냥 내가 서비스로 피운 건데.”
찰싹!
할머니의 손길이 다시 손녀를 향했다.
“아야! 또 왜 때려!”
한평화는 울상을 지으며 어깨를 문질렀다. 송희선은 할 수만 있다면 이산예의 등짝도 내려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산예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그렇지. 넌 적당히를 몰라. 네 생명을 얼마나 쏟아부은 거니. 몸은 괜찮구?”
“아니, 왜…. 사람 살릴 수 있을 만큼은 안 했는데. 요즘 세상에는 질보다는 양이지.”
“어휴…….”
송희선은 혀를 끌끌 찼다.
“누굴 닮아서는 이리 말을 안 듣지.”
“당연히 우리 아빠 닮았지.”
“…미련해 빠져 가지고.”
“아, 욕하지 마!”
한평화는 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송희선은 그런 손녀를 뒤로하고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나와 오늘, 서다흰은 한 걸음씩 물러났다. 이산예가 배신감이 깃든 눈으로 보긴 했지만 어쩔쏘냐. 저 할머니가 노려보는 건 이산예였다.
살벌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이산예 앞에 선 송희선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드리옵니다.”
“어, 아뇨, 아닙니다. 이렇게 인사 안 하셔도 됩니다.”
이산예는 허둥거리더니 송희선과 똑같이 인사했다. 송희선은 허리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귀하신 분께서 이리 오셨는데 저희 손녀가 실례를 저질렀는지 모르겠군요. 아직 어린아이니 귀엽게 봐 주시길 바랍니다.”
“할머니? 왜 그래? 이 사람 그냥 특수과 팀장이야.”
한평화가 뒤에서 송희선을 쿡쿡 찔렀다. 그러나 송희선은 손녀를 무시하고 이어 말했다.
“귀하신 분이 저를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손녀에게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이 업은 오로지 저만의 것. 다른 이들은 죄가 없으니 저 하나만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쯤 되면 아무리 한평화라 하더라도 이산예의 존재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이산예는 송희선의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당신께 죄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사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께서 사과하신다면 저도 똑같이 돌려드려야 하니까요.”
한평화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이산예를 보았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이다.
“어린 용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켁! 콜록, 큽, 할머니, 뭐라구?”
한평화는 갑자기 목이 막힌 소리를 냈다.
* * *
이산예가 어린 나이에도 여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뛰어난 위장술로 인간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형들의 힘 덕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의 염주도, 형들의 종이인형도 없다. 그렇기에 이산예의 위장은 완벽하지 못했고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여우가 막상 두 눈으로 보니 금방 정체를 볼 수 있었을 만큼 약해졌다. 그리고 박서원과 쌍둥이를 도와 업을 억누르는 부적을 만들 만큼 강력한 무당인 송희선의 눈에도 이산예의 정체가 비쳤다. 무당은 아니지만 잘 보는 오늘도 이산예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렸지 않은가.
인간친화적인 어린 이무기께서 인간에게는 경계가 약해진 덕분도 있지만. 그건 인간은 아무리 해도 저 이무기를 해하지 못한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 그럼….”
한평화의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아까 이산예에게 했던 자신의 행동을 되새기는 중인 모양이다. 가방에 매달린 청룡 인형이 얄미운 얼굴로 흔들렸다.
“처, 청….”
“여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이산예는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한평화는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네, 저는 그런 아버지를 두었습니다만, 지금은 특수과 팀장일 뿐입니다. 이산래라고 하지요.”
이산예는 송희선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송희선은 공손하게, 그러나 이산예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순 없었는지 경계 어린 눈으로 이산예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산예의 악수를 받아 주는 인간이 드디어 생겼다.
“인간도 아니신 분이 어찌해서 인간들 틈에서 지내시는지…?”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산예는 곧 말을 바꾸었다.
“어떤 의미로는 있긴 합니다만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는 아닐 겁니다.”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가족 문제라고 해 두죠.”
“거기에 우리 손녀가 필요한 겁니까?”
“회장님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민석을 부회장이라고 불러 주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냥 회장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송희선의 눈가가 이산예의 말에 잘게 떨렸다.
“저 나무는 산함박을 불러들일 미끼이자 함정입니다.”
이산예는 호수에 잠겨 아직 새싹도 보이지 않는 나무를 가리켰다.
“저는 다른 용들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건, 저희의 업을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물을 이가 다 사라졌는걸요.”
“그렇다면.”
“최소한 산함박을 잡을 때까지 박서원 씨를 방해할 일은 없을 겁니다.”
“…….”
한평화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할머니와 이산예를 번갈아 쳐다보기 바빴다. 박서원이나 쌍둥이, 송희선이 한평화에게는 아무런 정보를 전하지 않은 걸 그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그 뒤는 어떻게 됩니까? 방해하실 겁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전 시간에 대한 기억이 있는 어린 용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지요.”
“……누굴 말하는 것입니까?”
무당은 이산예의 뒤에 서 있는 나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박서원의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두운 눈빛이었다.
마치 나에게 방해할 것이냐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정해준’은 확실히 방해했지.
이산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인간이죠.”
그 말에 나는 어째서인지 조금 맥이 빠져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인간들이 스스로 택한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아서인지도 모른다.
인간만 있다고 해서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오진 않는다. 내 세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이곳도 마찬가지다. 어디서 태어나는지도 모를 괴물들이 인간을 잡아먹는 세계면서도 인간끼리의 다툼 또한 여전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인간끼리의 다툼에도 종종 괴물이나 영물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걸까. 내 세계에서는 존재조차 불분명한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하였다는 달기도 이곳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구미호다. 봉신연의마저 역사가 되는 세상이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이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인간의 운명을 인간이 결정해야 한다는 소리에도 심드렁할 수밖에 없다.
그것마저도 사실은 인간이 아닌 자들의 자비에 기대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