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50. 평화의 나라(1)
"남의 씨앗을 싹 틔워 보는 건 또 처음이네.”
한평화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사뭇 경박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두 눈 만큼은 진지했다. 한평화를 자주 만난 건 아니지만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한평화는 이산예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게 자라면 박서원 그 새끼한테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한 거죠?”
“……결과적으로는요.”
“결과적으로? 그거 엄청 못 미덥게 들리는데.”
한평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이산예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산예에게도 이 시간의 최후에 지금 이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도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나만 해도 처음 내가 여의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평화는 두루뭉술한 이산예의 대답은 아무래도 좋았는지 코웃음 쳤다.
“됐어요. 중요한 건 딴 거지. 이게 그 뱀 새끼 목을 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다는 거죠?”
이건 이산예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산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대답했다.
“네. 확실합니다.”
“좋아요, 그럼. 나도 그거 듣고 나온 거니까. 원래 회장님은 우리 할머니한테 말하려고 했다고 했지만 꽃 피우는 건 내 전문이지.”
서천꽃밭의 주인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이산예는 한평화의 말을 정정했다.
“저, 꽃은 아닙니다. 나무입니다.”
“꽃이나 나무나!”
한평화는 버럭 화를 냈다.
“내가 키운 꽃이 몇 갠데 그걸 못 피울까 봐?”
물론 꽃과 나무는 키우는 방식이 다르다. 이산예는 한평화를 부르려다가 말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한평화는 이산예가 뭐라고 말해 봤자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 그럼 그거나 줘 봐요.”
한평화는 이산예가 씨앗을 건네주기도 전에 강탈해 갔다. 공을 던졌다 받는 것처럼 씨앗을 주물 거리던 한평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운이 대단하긴 하네요. 회장님이 왜 우리 할머니한테 가져왔는지 알겠다.”
“평화 씨, 가능하겠습니까?”
이산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만약 힘들면 괜찮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흥. 이 한평화에게 꽃을 가꾸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꽃이 아니라 그러네.
이산예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특수과도 야근이 없다고 들었는데 왜 혼자서 야근하는 직장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얘는 뭐 하는 애예요?”
한평화는 씨앗을 높이 들어 햇빛에 비춰 보며 물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감탄했다.
이승에 없는 꽃을 피워 내는 여자한테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내 눈에는 그저 버드나무 잎을 똘똘 뭉친 공에 불과했고, 오늘에게 물었을 때도 거기서 크게 벗어난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이산예는 난감하게 웃을 뿐이었지만.
“기운이 어마어마한데.”
“귀하신 분이 주신 겁니다.”
“그건 딱 봐도 알겠고. 좀 더 자세한 건 없어요?”
한평화는 이산예를 흘깃 보며 말했다.
“이거 내 기력을 엄청 뺏어 먹을 것 같거든. 무슨 나무인지는 알고?”
“버드나무입니다.”
“버드나무……. 그래서 날 여기로 부른 거구나.”
한평화는 햇빛에 물결이 잘게 부서지는 호수를 보았다.
버드나무는 주로 물가에 자란다.
“몇 가지 더 물어봐도 돼요?”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한평화는 손안에서 씨앗을 굴렸다.
“잠실에 그 새끼가 나타나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박서원, 그 개새끼가 그랬거든. 지하국에서 뱀의 흔적을 봤는데, 존나 더러웠다고.”
그러고는 굳이 나를 돌아보며 확인했다.
“그쵸, 해준 오빠?”
“…네, 뭐.”
“이런 기운을 가진 버드나무라면 그걸 정화할 수 있나 봐요?”
한평화는 이제 양손을 모두 써서 씨앗을 꽉꽉 누르기 시작했다. 한평화가 그럴수록 나는 줄도 몰랐던 나무 이파리 냄새가 짙어졌다. 한평화의 손목을 따라 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하국…. 재밌는 데 많이 가셨네…….”
옆에서 서다흰이 작게 중얼거렸다. 괜히 오싹해졌다.
“하지만 정화하려면 일단 더러운 게 있어야 하잖아? 나무는 혼자서 걸어 다니지 못하고?”
한평화는 음침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변화가 극심하다.
이산예는 한평화와는 그다지 친분이 있었던 적이 없었는지 조금 허둥거리긴 했지만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그 새끼가 여기로 와야 한다는 뜻이잖아?”
한평화는 지금 자기 말에 대답해 주고 있는 이가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해 마지않는 청룡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모르니까 저러겠지.
한평화가 메고 있는 가방에 조그마한 청룡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한평화가 매 줬는지 핑크색 리본까지 달려 있었다.
“자기 힘을 억누르는 나무인 걸 알면서도 여기 올 만큼 그 새끼는 머리가 나쁜가?”
“……탈이 날 걸 알면서도 욕심을 채우는 일이 있잖습니까.”
“그게 이거라고요?”
“네. 먹고 뱉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은 삼키려고 노력하긴 할 겁니다. 그런 놈이니까요. 자기가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곳에 올 수밖에 없을 테고요.”
“그거면 됐어요.”
한평화는 그 누구도 자신을 짓누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당당하게 들었다. 흘러내리는 물은 어느덧 멈춰 있었다.
“우리 오빠가 그 새끼를 잡는 데 조금이라도 안전할 수만 있다면 됐어요.”
아버지의 죽음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소녀는 저승꽃을 피우는 여인답지 않게, 혹은 그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쥐덫이라면 나도 그에 어울리는 미끼를 내놓을게요.”
한평화는 씨앗을 꽉 쥐고 난간으로 걸어갔다. 바람이 훅 불자 마치 숲속에 들어온 것 같은 나무 냄새가 났다.
“원래 그러려고 온 거니까.”
한평화는 난간에 서서 눈을 감았다. 주위에서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거린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가락이 섞여 있다.
그러나 노래는 바람을 타지 못했고, 한평화의 주위만 맴돌았다. 잔잔하고, 따스한. 그러나 어쩐지 겨울의 냄새가 섞여 있는 바람이 불었다.
한평화는 씨앗을 호수에 휙 던졌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이산예는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팀장님.”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씨앗을 보며 서다흰이 소곤거리며 이산예를 불렀다.
“물가도 아니고 호수에 나무가 자라도 괜찮을까요?”
“어차피 신고는 특수과로 들어올 텐데요. 괜찮습니다.”
이산예는 서다흰의 말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면 되니까요.”
“……법적으로 괜찮은 거예요?”
“영험한 신수가 자랐다고 하면 되지요. 거짓말도 아니잖습니까?”
서다흰은 황당한 얼굴로 이산예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산예는 그 모습에 작게 웃다가 다시 호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딱 보아도 인간의 것이 아닌 쪽이 훨씬 좋습니다.”
“왜입니까?”
“그래야 경보를 발동하면 사람들이 순순히 대피해 주니까요.”
한평화가 던진 씨앗은 종이를 접어 만든 배처럼 위태롭지만 천천히 호수 가운데를 향해 흘러갔다. 바람이 등을 떠밀어 주는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씨앗이 지나가면서 생기는 물결 자국을 따라 넝쿨처럼 연푸른 줄기가 자라났다.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는 조금씩 굵어지고, 서로 엉키기 시작하더니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이파리가 자라났다. 그 이파리들은 성장을 계속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수 한편이 연잎으로 가득 덮였다.
씨앗이 흘러가는 자리를 따라 연잎이 물길처럼 자랐다. 연잎 사이사이로 푸른색의 꽃봉오리가 보였다.
“…….”
한평화는 난간에 매달려 푸른 연꽃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한평화의 얼굴에 몰아쳤다. 새파란 연꽃이 활짝 펼쳐졌다.
버들의 여의주가 호수 중앙에 다다랐을 때, 이미 호수 위의 새파란 연꽃은 기기묘묘한 빛을 내며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호수 근처를 걸어 다니던 사람들은 호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산예는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는 건 좋은데, 너무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도 문제군요…….”
청룡의 아들이 인간들 틈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상식 밖의 일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곳 사람들은, 인간과 영물을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만 너무 유한 기준을 부여한다.
“저, 저게, 뭐, 예요?”
가만히 지켜보던 오늘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이산예에게 물었다. 이산예는 새파랗다 못해 빛무리까지 이는 착각이 드는 푸른 연꽃을 보며 답했다.
“숨살이꽃이요.”
잘못들은 줄 알았다.
“……네?”
“죽은 이의 숨을 돌리기에는 약한 기운이지만 숨살이꽃입니다.”
이산예는 숨을 죽이며 호수 한가운데에 도착한 씨앗을 보았다. 씨앗은 물 위를 둥둥 떠서 흘러온 게 거짓말인 것처럼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씨앗의 양분으로 한평화 씨가 피워 낸 것 같습니다…….”
문외한인 나도 잘 알겠다. 신고가 들어오면 대충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겠다던 이산예가 정말로 바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용의 기준으로는 미성년자일지는 몰라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아닐 테니 그나마 다행이다.
뒤에서 무어라 속삭이는지 알지 못한 채, 난간을 붙잡고 씨앗만 노려보던 한평화는 마침내 작게 속삭였다.
“……싹이 났어요.”
감정이 몰아치는 표정만큼이나 목소리 또한 떨리고 있었다. 기이한 열망과, 애정, 혐오. 그 속에는 미세한 기대 또한 존재했다.
“나도 드디어 한몫할 수 있게 됐어.”
한평화는 꽃에 홀린 것처럼 말했다.
“겨우 꽃만 자라게 하는 쓸모없는 재주라서 할머니처럼 대신 부담을 받을 수도 없고, 부적도 만들어 주지 못하고.”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난간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피운 꽃은 다치고 난 뒤에야 쓰이는 거니까. 도와주고 싶어도, 그럼 일단 다치고 오라는 소리가 되어 버려서.”
울음이라도 터뜨릴 줄 알았는데 한평화의 얼굴은 일그러지기만 했을 뿐 건조했다.
“내가 기도 같은 거 해 봤자 소용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한평화는 곧 크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격하게 토해 내던 감정을 이미 훌훌 털어 버렸다는 듯. 밝고, 호쾌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였다.
호수 위의 연꽃을 촬영하던 사람들이 이쪽을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한평화의 원피스에 있는 푸른 꽃이 저 연꽃들을 닮았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다.
“그래도 이제 나도 한 사람분을 했어.”
여우가 이 방법밖에 없다고 했고, 이산예도 동의했다. 하지만 정말 이게 잘한 짓일까. 기껏 호랑이와 할아버지가 억누르고 있었던 복수귀를 하나 더 눈뜨게 한 건 아닐까.
“내 손으로 죽일 힘이 없는 게 항상 아쉬웠는데.”
한평화는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랑 전화 돼요?”
“회장님은 왜요?”
“에이, 그야 당연히 감사 인사 하려고 하는 거죠.”
한평화는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우리 할머니보다 나한테 먼저 전화해 줘서 고맙…….”
“한평화!!!!”
온몸이 저릿하게 울리는 고함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활짝 웃고 있던 한평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마저, 너마저 이러면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짙은 회색 빛깔의 한복을 입은 노부인이 가슴을 내려치며 한평화에게 다가왔다. 한평화는 목을 움츠렸다.
“하, 할머니…….”
송희선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한평화와, 그걸 멀뚱히 바라보는 우리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