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49. 아름드리나무 아래서(5)
이산예는 다시 구민석이 있는 비즈니스 룸으로 돌아갔다.
“뭐, 뭐야? 왜 다시 돌아왔어?”
조카와 오붓하게 앉아 악당 같은 포즈로 이야기를 나누던 구민석이 화들짝 놀랐다. 딸 같은 아이라더니 남들 있을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퍽 다정해 보였다. 성아영도 옆에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산예는 그런 구민석에게 대뜸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공을 내밀었다.
“이거, 싹 틔울 수 있습니까?”
“뭐?”
“싹을 틔울 수 있냐고요.”
“이게 뭔데?”
이산예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일까. 구민석은 떨떠름한 기색을 여실히 보이면서도 이산예가 내민 버드나무 잎을 살펴보았다.
“씨앗인가? 이걸 키우려면 힘이 제법 많이 들 것 같은데…….”
구민석은 금방 결론을 내렸다.
“본래 모습이라면 모를까 이 상태로는 무리네.”
“아니, 이름도 은행나무에서 따왔으면서 왜 못 합니까!”
“이 상태로는 안 된다니까!”
“그 껍데기를 벗으면…!”
벗으면 구민석은 기껏 피하고 있던 업에 눌려 죽는다. 이산예도 그걸 떠올리고 말을 멈췄다.
구민석은 피식 웃으며 이산예에게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공을 돌려주었다.
“나에게 그러지 말고 스스로 해 보는 건?”
“제힘으로는 무리입니다.”
“훌륭한 아버님이 계시잖은가.”
이산예는 조금 갈등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곧 그리움을 받지 못하는 자들의 힘이 세지는 시기지 않습니까. 그걸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바쁘십니다.”
“음… 그래. 이 팀장 말대로 이런 세계라면 확실히 그날이 위험하긴 하겠군.”
구민석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이산예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건 뭐기에 그러나?”
“죄를 지은 용이 제일 먼저 가꾼 나무입니다.”
구민석은 화들짝 놀라며 그 공을 다시 보았다.
“그게 여의주라고?!”
저게?
난 내가 계속 쥐고 있던 공을 보았다. 저게? 여의주라고? 진짜?
“그 용은, 그래.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들었지만 이번에 서원 씨가 지하국에서 만났다고 했었지. 그렇지, 용이면 여의주가 있을 수 있어.”
구민석은 빠르게 중얼거렸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말인 것 같았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화를 내다시피 외쳤다.
“하지만 그게 왜 지금 자네 손에 들려 있나?!”
“저희 어머니 친구분이시거든요. 저에게는 이모님 되십니다.”
“요즘 용들은 조카한테 여의주도 맡기고 그러나?”
“써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네가 뭐가 예쁘다고?”
구민석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산예는 화를 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로 숨을 좀 고르다가 대답했다.
“저를 예쁘게 봐 주시긴 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그럼?”
“공양물을 준비하라고 하셨거든요.”
“…….”
구민석은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성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삼촌을 보았다.
“아까 해결하라던 문제가 있었지 않습니까. 이거면 충분합니다.”
이산예는 자신의 이모가 준 여의주를 꽉 쥐었다.
“이거라면 산함박의 독기를 정화해 줄 테니까요.”
* * *
“하지만 결국 싹을 틔우는 게 문제라는 거죠.”
여우와 용과 뱀이 아무리 지랄을 하고 다녀도 인간 세상은 톱니바퀴처럼 굴러간다. 그게 정해진 순서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며칠 동안 잠잠하다 했는데, 오늘도 요괴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이런 꼬라지인데도 서울 집값이 내려가지 않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신라인의 후예들은 다 간이 부어서 미친 걸까? 아니면 단순히 다른 지방도 같은 상황이기 때문인가?
나는 서다흰에게 물티슈를 건네며 말했다.
“그 문제는 회장님이 알아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반쯤 넘어온 거 아니에요?”
서다흰이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엉망이 된 바닥을 짚고 있느라 더러워진 손이었다.
물티슈로 아무리 닦아도 영 찝찝했는지 서다흰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글쎄요……. 제가 그쪽 사람들을 좀 아는데, 앞에선 잘 웃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웃으면서 사람 뒤통수를 때리고 있더라고요.”
“……사이 안 좋아요?”
“안 좋은 건 아닌데 좋은 것도 아니고……. 안 좋던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아직 돌아가지 않은 초능력자 몇 명이 다가왔다.
이다혜는 신기한 걸 다 본다는 눈으로 나와 서다흰을 보았다.
“뭐야, 너네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특수과에서 일 때문에 몇 번 얼굴을 봤었거든요.”
“특수과? 아, 다흰이 너 요즘 거기 간다고 했었지.”
구민석이 알아본다고는 했지만 이쪽도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정화 능력자인 서다흰은 버드나무와 파장이 비슷하다. 아주 작더라도 싹이 트기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자랄 거라고, 요즈음 이산예와 서다흰은 싹 틔우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도 가끔 가서 지켜봤는데 솔직히 말해서 크게 진전은 없었다.
“다흰이 너도 특수과 가는 거 알면 백성찬 그 새끼는 또 시끄럽겠네.”
불개 한두 마리도 아니고, 심지어 귀하신 삼족구까지 있는 이상 특수과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특수과에 인연이 없는 백성찬으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다혜는 골치 아픈 얼굴로 투덜거렸다.
“이제 날씨 추워지면 문자에 시달릴 거라고 벌써부터 아주 귀찮아.”
“문자요?”
“불조심 문자.”
이다혜는 혀를 쯧쯧 찼다.
“불 능력자들은 다 같이 받는 건데 뭘 혼자 받는 것처럼 찡얼대나 모르겠어. 하도 심심하다, 너무 하지 않느냐, 집에서 일 안 하는 백수 취급한다고 난리니까 새날에서 강사 시키는 거 아냐.”
“……그런 거였습니까?”
“덕분에 다른 불 능력자들한테도 날벼락이지 뭐. 문자 오는 게 좀 귀찮을 뿐이지 휴가철이잖아. 백성찬이 하도 징징거리는 바람에 마냥 놀기 눈치 보인다고.”
이다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었다. 짜증 나는 백성찬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다며 이다혜는 대화의 방향을 강제로 틀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요즘?”
“아니, 딱히 그건 아니고요, 언니.”
서다흰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무 키우는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나무?”
나무는 나무지.
“집이 좀 삭막한 것 같아서 녹색 비율을 높이려고 하거든요. 서다흰 씨는 왠지 모르게 식물을 잘 키울 것 같은 이미지라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아, 뭔지 알 것 같아. 다흰이 좀 그런 이미지지. 우리 세빈이랑은 다르게.”
이다혜의 뒤에서 얌전히 웃고 있던 이세빈은 자신에게 불똥이 튀자 화들짝 놀라 했다.
“난 왜요, 언니!”
“넌 키우는 족족 죽인다며.”
“그, 그건 그런데…….”
미래를 보는 능력도 식물의 생장에는 소용이 없었다.
……가만, 잘 찾아보면 식물과 관련된 초능력도 있을 것 같은데. 씨앗으로 안 보이기는 하지만 씨앗이라고 하니 그런 초능력도 통하지 않을까. 여의주라서 안 되려나?
“키워 본 적 없으면 다육이 같은 것부터 시작하지 그래? 물도 많이 안 줘도 돼서 키우기 쉬워.”
“그렇긴 한데, 뭔가 좀 정성을 들여야 하는 걸 키워 보고 싶어서요.”
이다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 귀찮은 짓을 왜 해?”
“……그것도 그렇긴 한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는 사람에게 수경재배를 추천받아서 그것도 한번 생각 중입니다.”
“다육이 키워, 다육이.”
“왜요?”
“내가 보기에 해준이 너도 뭘 키울 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아.”
“……저 이래 봬도 애완동물은 꽤 키워 봤는데요.”
“애완동물은 배가 고프면 낑낑거리기라도 하잖아. 식물은 아주 달라요.”
이다혜는 혀를 끌끌 찼다.
“사실 최고는 따로 있지.”
“네?”
“키우는 데 손도 안가고, 항상 예쁜 거.”
“그런 게 있어요? 뭔데요, 언니?”
나보다는 이세빈이 눈을 반짝 빛내며 이다혜에게 물었다.
이다혜는 눈을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조화.”
“에이, 그건 키우는 게 아니잖아요!”
“왜?”
이다혜는 뻔뻔하게 말했다.
“사랑과 관심만 있으면 키우는 거지.”
그리고 더욱 뻔뻔하게 덧붙였다.
“어릴 때 학교에서 안 배웠어? 인형한테 이름 붙이고 사람처럼 대하지 말라잖아. 다 왜 그러겠어?”
역시 이런 나라에서 교육과정도 그대로일 리가 없지. 나는 이다혜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휴대폰을 보았다.
“충분한 사랑만 있으면 뭐든 키울 수 있다니까?”
“……언니, 어릴 때 인형 제령한 적 있죠?”
“뭐? 없거든?”
“아닌데. 꼭 제령한 적 있는 사람이 하는 소리인데, 그거.”
이세빈은 뾰로통한 눈으로 이다혜를 보았다. 이다혜는 코웃음 치며 이세빈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악, 언니, 나, 머리!”
한참 이세빈을 괴롭히던 이다혜는 고개를 들어 나와 서다흰에게 물었다.
“나랑 세빈이는 이대로 밥 먹으러 갈 건데, 너희도 같이 갈래?”
“고맙지만 괜찮아요.”
서다흰이 뭐라고 하기 전에 내가 거절했다.
“다흰 씨, 이 팀장님 호출이에요.”
[오늘 : 회장님이 방법을 찾았대요.]
서다흰은 눈치 빠르게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정식 공문도 아닌, 나를 통한 호출.
우리 사이에 짧게 흐른 긴장감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다혜는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밥은 먹고 해야지. 특수과는 원래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불러?”
“…….”
“……미안. 우리도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구나.”
이다혜는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요. 다 얻어먹고 다녀요.”
“그래?”
“네. 그럼 저흰 가 볼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너희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이다혜와 이세빈과 헤어진 후 서다흰과 장소를 옮기며 오늘에게 마저 메시지를 보냈다.
[정해준 : 연구소로 가요? 아니면?]
[오늘 : 잠실로 바로 오면 될 것 같아요.]
[오늘 : 저희도 이제 이동해요.]
[정해준 : 어떤 방법인지는 들었어요?]
[오늘 : 못 들었어요. 그치만.]
그다음 메시지가 오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아무 말 않고 기다렸지만 오늘의 답장은 그다지 시원하지 못했다.
[오늘 :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그냥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 * *
잠실 땅은 저주받은 게 틀림없다. 여기 집값이 어쩌고 간에, 내가 그렇다면 그렇다. 애초에 청룡이 자리 잡은 것부터가 불길한 징조다.
용은 상서로운 존재라고? 그건 그 사람들에게나 그렇겠지.
내가 이곳을 좋아하든 말든, 그래도 이곳은 활기찬 곳이었다. 사람들로 가득한 곳. 직장인들, 주민들, 방문객들. 다양한 표정의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갔다.
잠실 타워의 뒤쪽에는 호수가 있다.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잘 어우러졌고 심지어 호수에 비친 잠실 타워의 그림자마저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우리는 저 호수에 씨앗을 묻을 것이다. 산함박이 잠실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일어날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다면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화의 기운이 듬뿍 담긴 여의주라 하더라도 여의주는 여의주. 힘에 눈이 먼 뱀은 그걸 삼킬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잠실에 한 번쯤은 찾아올 것이다.
“…….”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호숫가에 한 여자가 난간에 기대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파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그러모으며 여자는 몸을 돌렸다.
“내가 싹을 틔워야 하는 씨앗은 누가 들고 있어요?”
한평화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