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49. 아름드리나무 아래서(4)
구민석은 조용해졌다.
아까 전처럼 흉악한 기운을 내뿜는다거나, 표정이 굳어 있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조금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었을 뿐이다.
구민석은 얼빠진 얼굴로 이산예를 보았다.
“우리가 만났, 다고?”
“저는 기억하실 텐데요.”
이산예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청룡님의 곁에 있던 제 형제들이 기억 안 나십니까?”
“형제들? 아냐, 어린 용은 하나뿐이었… 는데…….”
“제 형들은 모두 용이 된 지 오래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죠, 부회장님. 부회장님은 분명 제 형들과, 어머니와, 동해용왕님을 비롯한 동쪽의 용들을 만났습니다.”
“아니, 잠깐, 잠깐만…….”
구민석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손을 저었다.
용들이 돌린 시간은 일 년 남짓. 그 일 년간 인간들이 기억하고 있는 용들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용들은 원래부터 없던 것이 되어 버리고, 잠실 타워에 있는 동해용왕 또한 유일하게 남은 서해용왕이 대신하게 되었다.
용들과 크게 인연이 없었던 인간들의 기억은 그걸로도 충분히 대체될 수 있었다.
“내가, 난, 동해용왕을? 그러니까, 이목을…….”
“저희 아버지는 서해용왕이십니다. 서해용왕 이목. 동해용왕의 존명은 법민이시지요.”
그러나 이 땅에서 꼬리가 아홉 개가 될 때까지 살아왔고, 사십여 년 전 산함박의 일로 용들을 찾아갔던 여우라면 말이 다르다.
여우는 천장이 되고, 벽이 되었던 용들을 알고 있다. 천장과 벽이 되기 전의 용들을 기억한다.
돌아왔다고 해서 내용물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혼에 벽이 하나 있는 거지. 이산예는 그 유리 벽에 살짝 금을 내자고 했다.
여우 정도 되는, 용에 버금가는 이라면 그걸 깨부술 필요도 없이 계기만 있다면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래. 그렇지. 나는 그를 찾아갔어. 거기서 태연자약하게 자기들이 손을 쓸 수 없는 일이라며 지껄이던 용들을 보았지.”
흐려졌던 눈에 다시 빛이 들어왔다. 이산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셨습니까?”
“자넨 막내아들이로군. 그 새끼 사자.”
이산예는 조금 떠름하게 대답했다.
“네, 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것이냐.”
구민석의 말투가 조금 더 무게 있게 바뀌었다. 이산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억이 나자마자 태도가 바뀌다니. 역시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계셨던 거 아닙니까? 보통 인간들은 그런 이들을 꼰….”
“속세에 물든 건 팀장님인 것 같은데요.”
“왈!”
“얘도 그렇다잖아요”
내 말에 동조해 준 불개에게 간식을 하나 더 주었다. 배가 부르지도 않은지 불개는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었다.
“……그래. 내 기억까지 바꾸었다면 용들에게 필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네.”
이산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뭐?”
이산예의 대답은 구민석이 내심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답을 뛰어넘었는지, 구민석은 그 어느 때보다 깜짝 놀라 했다.
“그 꼰대들이?!”
결국 그 단어가 튀어나오는군. 본인도 비슷한 연배라는 걸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젊은 애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본인 정신도 어려지는 건 아니지.
인간의 입장에서는 여우나 용이나 꼰대인 건 똑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사에 적극적으로 개입 중인 여우가 더 꼰대이지 않을까.
“그 노친네들이 어쩐 일이지?”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여우에게 큰 유감은 없다.
“혹시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이라도 생겼었나?”
일단 여우가 용들에게 큰 유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알겠다.
* * *
“……시간이 돌아왔다고.”
구민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맥없이 웃었다.
“해준 씨에게 기껏 확인까지 받아 놨는데 결국 나는 실패했다는 이야기군.”
거기에 대해서는 참작할 여지가 있다. 여우의 계획은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누구 때문이랴. 당연히 이 ‘몸’의 본 주인의 탓이지.
이산예는 구민석에게 삼삼한 위로의 말을 던졌다.
“부회장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 그럼 뭐가 잘못된 건가?”
“……굳이 따지자면, 운이 나빴다고 할까요.”
이산예는 구민석의 시선을 피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티 나게 굴면 말을 얼버무린 이유가 없잖아.
과연, 구민석이 나를 보았다.
“해준 씨?”
“제 잘못은 아닙니다.”
“……뭔가 있는데, 분명.”
“그러니까 운이 좀 나빴습니다. 타이밍이 안 좋았죠. 물론 정해준 씨도 좀 관련이 있긴 하지만, 지금의 해준 씨는 죄가 없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이산예가 당당하게 말하자 구민석은 의심을 거두었다. 그래도 간간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는 했다.
“내 계획이 실패하고, 모종의 이유로 세계가 무너졌다는 건 알겠네. 용들이 시간을 돌린 것까지.”
구민석은 팔짱을 꼈다.
“삼족구까지 끌고 내 기억을 되살린 건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구민석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말해 보게. 나에게 무얼 요구하기 위해서 왔나?”
맥의 향로를 피웠던 날, 이산예는 형들의 남은 흔적도 모조리 태워 버리고 나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입을 열었다. 홀로 남은 사자는 애도의 시간도 가지지 못했다.
‘우리는.’
멋대로 손요운과 서다흰을 울타리에 넣어 버린 발언이었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이산예의 울타리에는 처음부터 그 두 사람이 있었고, 나와 오늘을 뒤늦게 끼워 넣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기도 했다. 우리는 이산예에게 ‘우리’라고 불렸다.
‘세계를 부숴야 합니다.’
‘……산함박이 이미 부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죠.’
이산예는 가볍게 긍정했다.
‘그걸 용들이 얼기설기 이어 붙여서 얼핏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끔 만들어 놓았고요.’
서다흰이 한마디 보탰다. 이산예는 이것도 긍정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를 보다 안전하게 부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악보대로 곡이 도돌이표까지 연주되면 어떻게 되는지 말했다.
‘처음은 무사히 돌아가겠죠. 이건 끝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니 다시 돌아갈 겁니다. 몇 번이고요.’
스노글로브 속의 세계가 되어 버린다. 그런 세계가 제대로 유지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부품은 마모되기 마련입니다. 혼도 마찬가지지요. 끝없이 반복하다 보면 마모된 혼들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그렇다면 차라리 시간만 돌리는 게 아니라 세계를 모조리 돌려 버리는 편이 낫다.
‘팀장님네 집안 어르신들은 왜 그걸 안 했습니까?’
‘스노글로브가 깨져 버렸는데 부품만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근간이 되는 세계가 멀쩡해야 이걸 옆으로 놓든 거꾸로 놓든 형체가 유지될 수 있는데.’
그래서 이산예는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여우 구슬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의주가 두 개. 오늘이 하나. 이산예의 것 하나. 산함박의 것을 포함해도 두 개가 부족하고, 청룡의 여의주를 더해도 하나가 부족하다.
남은 하나를 어떻게 할 것이냐 물었을 때 이산예가 꺼낸 대답이 바로 여우 구슬이다.
‘어디까지 돌아갈 수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만, 그래도 새로이 모든 걸 써 내려갈 수 있을 정도는 될 겁니다.’
이산예는 어딘지 모르게 들뜬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걸핏하면 인간사에 끼어드는 이들도 없어지겠죠.’
세계가 돌아가든 수복하든 다 좋다 이거야.
그렇지만 나는?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정말로 인간의 시대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그마한 여의주마저 기꺼이 내놓겠다는 어린애를 향해서 뭐라고 말하겠는가. 늘 곁에 있어 주던 어머니와 형들도 모두 잃어버린 저 어린애에게.
악몽 속에서 산함박에게 먹혔던 하얀 털을 떠올렸다. 지하국의 해님과 달님보다도 어려 보이는 작은 남자아이였다. 붉은 기가 도는 하얀 머리카락을 가졌던 아이.
“요구라니요. 무슨 저희가 깡패 새끼라도 되는 줄 압니까.”
이산예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구민석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삼족구까지 데려왔으면서 아닌 줄 아나?”
“회장님 정도 되는 군번이면 삼족구한테 죽진 않을 거 아닙니까.”
“여긴 아영이가 있잖아.”
“딱히 협박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거짓말을 할 순 없으니까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아마도?”
“아니, 전 정말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요, 해준 씨.”
“청룡님이 붙여 준 거 보면 모릅니까. 협박하라고 손에 칼 쥐여 준 겁니다.”
“……그런가요?”
“네.”
“그런 얘기는 나 없는 데서 하지?”
구민석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 이 시간 동안 내가 회사 일을 보면 어린 용, 네 월급만큼은 벌었을 걸세. 그리고 그 돈으로 해준 씨 연봉을 올려 주겠지.”
“올려 줍니까?”
“거 자꾸 이야기가 딴 길로 새지 않나. 얼른 내게 찾아온 용무나 이야기하지.”
“뭐, 별건 아닙니다만.”
이산예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여우 구슬 좀 주실 수 있을까 해서.”
“…….”
“…….”
“끼잉. 낑.”
조용해진 분위기에 불개가 지루했는지 낑낑거리며 내 손을 핥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어차피 박서원 씨에게 줄 생각 아니었습니까?”
“어른에게 예절 교육 좀 다시 받아야겠는데.”
“회장님은 원래 되지 않을 일에는 괜한 노력을 쏟지 않는다는 주의 아니셨습니까?”
“지금 망하라고 고사 지내는 건가?”
“그건 아니고요.”
이산예는 차분하게 말했다.
“좀 더 확실한 방법에 투자할 생각 없으신가 해서요.”
공무원께서는 영업하러 나온 보험직원처럼 웃었다.
* * *
“새끼 사자. 네 뜻은 잘 알겠다.”
이산예의 계획을 들은 구민석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다만 하나 물어보지.”
“네.”
“그 전의 시간을 그대로 밟는다는 말은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요 근래 질리도록 들었던 말이 구민석의 입에서도 나왔다.
“그렇다면 세계를 부쉈다는 그 빌어처먹을 뱀의 위력도 그대로라는 소리 아닌가. 아니, 이미 한 번 업을 쌓아 닦아 놓았을 길이니 더 쉽게 걷고 있겠군.”
“…….”
“그건 어떻게 막을 생각인가? 저번과 같이? 그걸 못 막아서 세계가 부서졌다며? 용들의 벽이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하나?”
“그건.”
“그 점을 해결하고 다시 오게나. 시간에 맞출 수 있으련진 모르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구민석은 우리를 쫓아냈다.
어차피 본인 호텔도 아닌데 억울할 노릇이다. 그러나 나이로도 재력으로도 딸리는 우리는 그 말에 얌전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박서원 씨에게 말하진 않을까요?”
내 말에 이산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러진 않을걸요.”
“그래요?”
“네. 회장님은 나이 든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좀 우유부단한 성격이 있거든요.”
“완고한 게 아니라요?”
이산예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해준 씨 불러다가 그런 질문을 하진 않았겠죠. 해준 씨에게 그 일을 듣지 않았으면 저도 이렇게 무작정 부딪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때 불개가 복도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산예와의 대화가 잠깐 멈췄다. 불개가 이런 반응이라면 저 복도에 누가 있을진 뻔했다.
성아영은 주춤거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저, 제가 여길 지나가야 하거든요?”
“안 무니까 가세요.”
“……진짜요?”
내가 불개의 리드줄을 잡고 흔들자 성아영은 최대한 불개에게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성아영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불개의 고개가 돌아갔다.
“왈!”
“히익!”
“안 물어요. 회장님이 기다리니까 가 보세요.”
성아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개의 시야에서 빠져나갔다. 삼족구가 영험하긴 한가 보네.
복도를 지나가는 직원도 없고, 여우도 없다.
나는 그제야 여태 손에 쥐고 있는 공을 이산예에게 내밀었다. 욱리가 준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공이었다.
버들이 이 공에 어떤 짓을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우는 물론이고 이산예마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팀장님. 이거요.”
“네?”
이산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만 보길래 나는 그 손에 공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뒤늦게 공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산래는 화들짝 놀랐다.
“아까 욱리를 통해 버들님이 주고 가셨습니다.”
“이건…….”
“말씀하시길,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리랍니다.”
“…….”
“아니면 공양물을 준비하든지요.”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요?”
“후회 없이 잘 쓰라는 말도 하셨답니다.”
내 말을 들은 이산예는 길게 탄식했다.
“아, 이런…. 이모님께서는 제게 형들의 힘이 남아 있다 생각하여 이걸 보내셨을 텐데.”
이산예는 당혹스런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제 어쩌죠?”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난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