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49. 아름드리나무 아래서(3)
“그 팀장 경력이 화려하더군.”
“혹시 잠실 타워도 여우가 운영합니까?”
“아니, 욕은 좀 많이 먹긴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네. 청룡 담당이 그 친구라는 얘기가 있던데. 일조권 때문에 그리됐다지?”
“그런데 왜 꼭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가깝고 편하잖나. 그런데 단순 담당도 아니고 대리인으로 내세워졌다고? 그 친구 조상이 대단한 공덕이라도 세웠는가?”
“내가 다른 사람 조상님 공덕까지 어떻게 압니까. 그건 직접 물어보세요.”
잠실 타워에 있는 호텔 비즈니스 회의실이다. 전망 자체는 꼭대기에서 보았던 풍경과 크게 차이가 없다. 악마가 없다는 점은 꽤 마음에 들었지만.
구민석은 잠실 타워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을 배경으로 입을 열었다.
“해준 씨는 뭐 아는 거 없나?”
“뭘 말입니까?”
“청룡이 왜 삼족구를 불렀는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렇지?”
구민석은 기대도 안 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기분이 나빴다. 이 여우와 대화하면 항상 이랬다.
“꼭 삼족구에게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삼족구를 강조했을까.”
“괜찮다는 분이 삼족구가 무서워서 동물 단체에 압박을 넣습니까?”
“압박이라니. 우린 결코 티를 내지 않아.”
“아, 네…….”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는 말인가.
구민석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심했다.
“팀장 이름이 이산래라고? 팀장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볼일이 있는 건지 좀 기대가 되는데.”
내 기분에도 아랑곳 않고 구민석은 조금 즐겁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해준 씨가 이렇게 구경하러 온 걸 보면 분명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겠지.”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청룡의 대리인이 시시한 이야기를 하진 않을 거 아닌가.”
그건 그렇다. 구민석은 재수 없게 웃었고 나는 딱 그만큼 띠꺼운 눈으로 봐 줬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구민석에게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재미가 있긴 하다.
구민석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도 궁금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구민석에게 물었다.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음?”
맥의 향로로 이산예의 기억을 보았을 때, 기회가 된다면 꼭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여우 구슬의 소유권을 넘기면 여우는 어떻게 됩니까?”
“…….”
구민석은 가만히 있다가 곧 짙게 웃기 시작했다.
“왜 그게 궁금해졌나?”
구민석이 다리를 꼬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계시가 찾아왔거든요.”
“해준 씨, 혹시 백주연 씨와 친하게 지내나?”
“아뇨.”
“말하는 게 비슷한데…….”
“그런 사람이랑 비교하지 말아 주시죠.”
“주연 씨도 싫어할 거야. 해준 씨는 왜 그런 게 궁금한가?”
“계시가 내려왔다니까요.”
“…….”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동안 회장님도 저한테 많이 물었잖습니까. 하나 정도는 대답하시죠?”
구민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내 의향을 짐작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구민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산함박을 잡고 난 뒤에 박서원에게 자신의 여우 구슬을 건네줄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았겠지. 구민석의 대답이 내가 예상한 것이 맞는다면.
“좋아. 대답해 주지.”
구민석은 입을 열었다.
“용에게 여의주가 있다면 여우에게는 여우 구슬이 있어.”
급하게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여우 구슬을 인간이 손에 넣게 되면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고 한다. 어떤 이는 위대한 학자가 되거나 명의가 되기도 했다.
“용의 여의주가 그들의 깨달음에 대한 증거라면 우리의 구슬은 그보다는 좀 더 직관적이지. 우린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에 따라 구슬의 크기가 달라지거든.”
꼬리가 많은 여우의 구슬일수록 용의 여의주에 버금가는 보주가 될 수 있다.
악몽에서 보았던 구민석의 여우 구슬은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새빨간 불꽃은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붉은색의 작은 구슬이 되었다. 구슬 안쪽에 불꽃이 넘실거렸었다.
박서원은 그걸 받는 즉시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꿀꺽 삼켰다.
“여의주와는 달리 몇 등분을 해서 똑 떼어 낼 수도 있지만……. 그걸 묻는 건 아니지?”
“당연하죠.”
여우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식은땀이 흘렀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탈도 많고 말도 많았지만 어쨌든 잠실 타워는 청룡의 관할 구역이다. 이전 시간과는 다르다. 지금은 청룡이 아들을 돕고 있었으니까.
청룡은 자리를 비웠지만 그의 아들이 대신 납시셨다. 지금이라면 제아무리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라고 해도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못한다.
구민석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금방 기운을 거두었다.
“서원 씨가 얘기해 줄 리가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궁금하군.”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뭐를요?”
“모르는 척하지 말고. 그 이야긴 아영이도 모르는 건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뭐, 됐네. 알아 봤자 해준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텐데.”
분명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대미지는 없었다. 조금 뒤면 구민석의 저 자신만만한 얼굴도 산산조각 날 것이다.
나는 대답을 종용했다.
“그래서 여우 구슬의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면 어떻게 된다고요?”
“어떻게 되기는.”
구민석은 혀를 쯧 찼다.
“오래 묵을수록 크기가 달라진다는 말은 즉, 나이, 생명과 관계된다는 말이네. 쪼개어 나누는 것도 아니라, 여우 구슬의 소유권을 넘긴다는 말은 그런 것이네.”
반쯤은 예상했고, 예상했기 때문에 굳이 확인하고자 했던 말이 구민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우가 생을 포기한다는 뜻이지.”
* * *
“안녕하십니까.”
이산예는 콧잔등 위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올리며 인사했다.
“특별수사과 이형상수색팀의 이산래라고 합니다.”
구민석은 아무 표정 없이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해준 씨에게 듣기로 날 만나고 싶다 하셨다던데.”
“그렇게 들었습니까?”
악수를 거절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산예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10년 사이에 어린 용은 인간 세계 공무원의 잔혹한 대우에 완벽하게 적응해 냈다.
“전 구민석 회장님께서 저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셨다 들었는데요.”
이산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부회장님이시죠.”
적응을 해도 너무 잘 해 버렸다.
“하하, 어린 친구가 농담도 잘 하는군.”
“나이가 그렇게 어리진 않습니다만.”
이산예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했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천 년도 넘게 사는 영물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절대치가 아니라 상대치로 따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이 얘기할 때마다 교묘하게 피해 가던 이산예를 생각하면서 나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봐 주었다. 불과 몇십 년 전에 고기잡이 그물에 걸렸던 귀하신 몸이지 않은가.
“물론 꼬리가 아홉 개, 실례. 여덟 개인 분에 비하시면 갓난쟁이나 다름없는 나이긴 하지만요.”
구민석의 미소에 금이 갔다. 나는 내가 이 자리에 있겠다고 한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빠의 위세를 등에 업은 이산예는 여우의 눈빛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구민석도 여우를 잡는다는 삼족구가 옆에서 헥헥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이산예가 오기 전 직원이 차려 준 음식 중 강아지가 먹어도 될 만한 걸 추려 삼족구의 입에 넣어 주었다. 불개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간식을 받아먹었다.
“이산래 팀장님께서는 생각보다 훨씬 잘 보는 모양이군. 아니면 청룡님께 들었나?”
“그분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시어 이런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아빠를 욕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불개를 쓰다듬으며 구경했다.
“그렇게 잘 보는 눈을 가졌는데 왜 그리 꽁꽁 숨어 있었나?”
“그야 인간 세상에는 회장, 부회장님 같은 분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이산예는 꼬박꼬박 구민석의 호칭을 정정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예의 바르고 정중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는데 정말 싸가지가 없었다. 그동안 외모와는 달리 사근사근하게 대하기에 속았다. 역시 이산예도 청룡의 핏줄이다.
나는 내 손등을 핥는 불개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준 후 간식을 하나 더 주었다.
“속세에 그렇게 많은 분들이 계시는 줄 저도 내려오고 나서야 알았지 뭡니까.”
“……이산래 팀장님께서는 말을 참 재밌게 하시는군.”
“그렇습니까?”
“불가에 귀의라도 하였는가? 말만큼이나 기운도 독특한데.”
“인간처럼 지내시다 보니 감이 많이 녹슬었나 봅니다, 백과님.”
구민석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기세가 흉포해졌다. 내 곁에 늘어져 있던 삼족구가 벌떡 일어나 여우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느냐.”
이산예는 싱긋 웃으며 삼족구에게 손을 저었다. 삼족구는 안절부절못하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아버지? 누구?”
여우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주제에 불똥이 튀면서 그림자처럼 여우 꼬리를 만들어 냈다.
삼족구가 엉덩이를 들썩들썩거리더니 다시 일어나 여우를 경계했다. 자신의 숨을 끊어 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노려보고 있음에도 구민석은 기세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한때 꼬리가 아홉 개였던 여우에게는 사실 삼족구 정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막 들었다.
이산예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그야 청룡님이시죠.”
“…………뭐?”
구민석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꼿꼿하게 서 있던 여우 꼬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흐트러진다. 파밧 하고 튀던 불똥이 움직임을 멈췄다.
“서울에서 10년 동안 지내면서 제 이름을 소개할 기회가 없었는데, 요 근래 이상하게 자주 말하게 되는군요.”
“잠, 깐.”
이산예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내밀었다.
“거두절미하고, 부회장님께서 아는 이름만 말할까요? 서해용왕 이목의 아들, 이산예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내밀어진 손은 무시당했다.
“…….”
“…….”
짧은 시간 사이에 구민석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구민석은 나를 흘깃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용들같이 속 좁은 놈들이 별거 없는 인간을 대리인으로 지정하는 일은 없을 텐데 뭔가 이상하다고 했지.”
이산예는 부친과 가족 친지들께서 속 좁은 놈으로 지칭되는 되는 현실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용들에 본인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죠.”
“설마 아드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지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그러라고 눈을 가리고 있었으니까요.”
“청룡님의 솜씨인가?”
이산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어머니가 대들보를 세우고 한강에 자리를 잡았던 형이 기운을 보태 주고 있었습니다.”
“……형?”
구민석의 얼굴이 묘해졌다.
“청룡님에게 아들이 또 있던가?”
이산예는 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느긋하게 불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우리가, 이산예가 구민석을 만나러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희는 오 형제거든요.”
“……오 형제?”
“기억 안 나십니까? 사십 년 전, 부회장님이 동해용왕님을 찾아오셨을 때 저희 형제들을 모두 만나 보았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