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83화 (183/202)

# 183

49. 아름드리나무 아래서(2)

잃을 게 많은 사람과 잃을 게 없는 사람과 이미 잃어버린 사람들의 사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잃을 게 많았기에 이미 잃어버렸고, 잃어버렸기에 잃을 게 없어진다. 구분은 무의미하다.

모든 인간은 잃을 게 많고, 잃어버린 것도 많았으며, 앞으로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얻게 되는 것 또한 분명 있다.

* * *

까치는 썩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초등학교 입학도 안 했을 얼굴로 하는 행동은 딱 사춘기 청소년이다.

“버들님의 전언이야.”

툴툴거리고 무성의한 반응에 기분이 상하려다가도 액면가가 너무 어린 바람에 김이 새 버린다.

퉁명스럽긴 해도 되도 않는 것에 떼를 쓰진 않으니 미운 구석도 크게 없는 덕분이기도 하다.

“버들님의 전언이라고요?”

“버들님은 위로 올라오시지 않으니까 내가 대신 온 거야.”

욱리는 지하국에서 버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것 같은 버드나무 잎을 뭉친 공을 건넸다. 이제 와서 버드나무 집을 지을 수 있는 씨앗을 주진 않을 텐데. 이걸로 어쩌라고?

떨떠름한 눈으로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공을 보고 있자 욱리가 말했다.

“조카님과 같이 보래.”

“…조카님이요?”

“버들님의 조카님.”

며칠 전 특수과에 복귀한 이산예를 떠올렸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한데. 지하국에서도 위쪽의 상황을 볼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나. 아니면 용이기 때문에 가능한 건가.

용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버들은 청룡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용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고 아래에서 버드나무만 가꾸고 있다지만, 청룡에 버금가게 오래된 용이니 그 힘이 가볍진 않을 것이다. 구두 장군이 꼼짝도 못 할 정도는 되겠지.

그러고 보니 구두 장군이 지상으로 나왔는데 지하국은 괜찮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구두 장군이 버들님 몰래 뒷마당에 구멍을 뚫은 모양이던데. 그날 이후로 요괴가 유의미하게 늘지도 않았으니 버들이 아래에서 요괴들을 처리했을 수도 있다. 지상의 인간은 이렇게 추측밖에 할 수 없다.

“뭐 좀 하나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욱리는 잠깐 고민하다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구두 장군이 어떻게 됐는지 압니까?”

“구두 장군?”

욱리는 아, 하며 아는 척을 했다.

“누님이 데리고 간 인간들이 잡았을 텐데.”

“지하국은 별 탈 없습니까? 구두 장군이 지상으로 올라온다고 뚫은 길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가? 버들님은 별말씀 안 하시던데.”

욱리는 태평하게 말했다.

“난 강 너머로는 거의 가지 않으니까 잘 몰라.”

“그럼 아래는 무사하다는 거죠?”

“무사하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 건데?”

욱리는 비식거렸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까막나라가 사라지고 지하국은 항상 그 상태였어. 지금 지하국이 무사하다고 생각해?”

“모든 기준은 상대적이니까요. 어제보다 오늘이 좋으면 더 나아진 거고, 오늘이 어제보다 나쁘면 그건 망한 거지요.”

어린 까치는 코웃음 쳤다.

“항상 인간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 해.”

그래도 말은 잘한다고 칭찬은 해 주네. 인간을 대표로 까치에게 인정받았다. 쓸모는 없어 보였다.

“버들님이 말씀하시길.”

욱리는 새가 날개깃을 정리하는 것처럼 팔을 들어 두리번거렸다. 한복 자락이 움직임에 맞추어 팔락거렸다.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리래.”

불길하게 들리는 말이다.

“……누구한테 전하는 말입니까?”

“응? 몰라. 잘 모르겠으면 조카님께 전해 드리라던데.”

전령 주제에 허술하기 그지없다.

“아니면 공양물이라도 준비하래.”

“공양물? 어떤 공양물이요?”

“나도 몰라.”

욱리는 그 사실이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하긴, 유감스러운 건 내 쪽이지.

“인간보다는 조카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 버들님께서는 그걸.”

욱리는 내게 준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공을 턱으로 가리켰다.

“후회 없이 잘 사용하라 말씀하셨어.”

그 말을 끝으로 까치는 입을 다물었다. 나라고 할 말이 있을 리는 없어서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겨우 물었다.

“……그게 끝입니까?”

어린 까치는 냉큼 대답했다.

“응. 난 갈 거야. 여긴 인간들이 너무 많아.”

욱리는 자기 일은 끝났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까치로 돌아갔다. 종종거리며 걷던 까치는 어린 외모에도 아랑곳 않고 훨훨 날아갔다. 멀리 날아가는 까치를 보니 이젠 이것도 익숙해지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 * *

아름솔은 청룡과 관련이 많은 행사다. 본래 잠실 타워에 있던 게 청룡이 아니었다고 하면 무려 동해용왕이자 조상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께서 이 행사를 돌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아이들과 놀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습을 딴 인형을 제작하는 대신.

“와아아!”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행사에 참여한 아이들이 품에 인형을 하나씩 안고 깔깔 웃고 있었다. 갓을 쓰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지만 인형 자체는 익숙하다. 청룡 인형이다.

아직도 저 인형은 만들어지고 있는 건가. 공덕이 어쩌고 탑이 어쩌고 하더니 현대사회의 자본주의가 승리했다. 이산예는 자기 아빠 모습을 본떠 만든 인형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라면 엄청나게 싫을 것 같다.

아니지. 어쩌면 청룡도 저걸 원해서 만든 게 아닐 수 있다. 본래 잠실 타워에 상주하는 용이 문무왕이었다고 하면, 그 용도 빼도 박도 못 하는 신라 출신이니 저 빌어먹을 인형을 만드는 걸 제일 먼저 시도했을 수도 있다. 이산예가 보여 준 기억 속에서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근엄한 모습이지만 속으면 안 된다. 김유신이나 청룡도 겉모습은 멀쩡했다.

동해용왕이 있었던 시간에서는 저 인형도 좀 더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콩알처럼 동그란 눈 인형 말고.

“저기 가 보자!”

“선생님, 이건 뭐 하는 거예요?”

보육원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과 인솔 교사가 내 앞을 지나갔다. 다행히 하나같이 얼굴이 밝았다.

청룡 인형을 꽉 껴안고 웃고 떠들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예전에 보았던 ‘정해준’의 기억이 떠오른다. 오리 인형을 꽉 껴안고 ‘정해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백하연. 아마 그때가 ‘정해준’이 그나마 마지막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시기가 아닐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구석에서 행사를 지켜보고 있으니 기묘한 감정만 자꾸 들었다. 지금은 어떻게 보면 ‘정해준’의 뒷수습을 하고 다니는 입장이니 이렇게 감정적으로 구는 건 적합하지 않다. 그러기엔 내 인생이 너무 박복하다.

“…….”

하지만 화를 내고 싶어도 상대는 이미 없다. 이건 이것대로 짜증이 났다.

아는 얼굴은 곳곳에 있었지만 일부러 다가가지 않았다. 내가 아는 얼굴보다는 ‘정해준’을 아는 이들이 훨씬 많을 테니까.

“왈!”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특수과가 도착했다. 어디 넣을 데도 없어 손에 계속 들고 있는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공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만나기로 했으니 이건 그때 주면 되겠지.

“왈왈!”

“아이고!”

딱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아는 얼굴 중 하나가 버둥거리며 튀어나가서 특수과를 맞이했다. 정확히는 이산래 옆에서 멍멍 짖고 있는 개를 향해 뛰어갔다.

“똘이야!”

백성찬이다. 나는 몸을 더욱 뒤로 물렸다. 아는 사이라고 알려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 이산래의 뒤에 서 있던 손요운이 나를 먼저 찾아냈다.

손요운은 곧장 나에게 다가왔다.

“해준 씨. 구석에서 뭐 하십니까?”

“……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요?”

물론 쉬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로 보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청룡 인형을 들고 뛰어다니고, 초대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한편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체험 활동 부스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구민석이 예견했던 정치인들과 기자들, 그리고 구경하는 일반 시민들까지 한데 뒤섞여 있었다. 구민석이 어떤 술수를 썼는지, 아니면 여우인 정치인들은 다 도망을 갔는지 삼족구는 별 반응 없이 백성찬의 손길을 받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악몽 속의 잠실과는 달리 시끌벅적하고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그래, 뭐. 쉴 만한 곳은 아닐 수 있다.

“평화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이 시끄러운 곳도 고요한 바다가 될 수 있는 거죠.”

손요운이 떨떠름한 눈으로 날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손요운은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

나는 정색하고 답했다.

“아는 사람이 올 것 같아서 피신 중이었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손요운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흐르는 대화법에 절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외, 그 사람들 피하고 있었습니다.”

지레 찔려서 자꾸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게 된다.

손요운은 내가 누굴 말하는지 알기는 하는 건지 냉장고 CF를 찍으면 딱일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원 씨와, 백주하, 백주연 씨요. 아시죠?”

“왜, 이번에도 찌르려고요?”

“…….”

“농담입니다.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됩니다.”

농담을 해도 꼭…….

“세 명 다 오는 걸로 알고 있기는 합니다. 박서원 씨 같은 경우는 매년 어마어마한 액수의 후원금을 전달한다더군요.”

“손요운 씨가 어떻게 그걸 압니까?”

“백주하 씨나 백주연 씨나 소속 센터가 북천이잖습니까. 다흰이가 알려 줬죠. 직원들과도 친하거든요.”

“그거 좀… 괜찮은 겁니까?”

개인정보보호나 그런 부분에서?

“얘길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온다더군요. 그렇잖아도 그 쌍둥이는 백조 사건 이후로 원래도 유명했는데 더 유명해져서.”

백조… 때문이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박서원 씨와는 다르게 그 사람들이 10년 전의 피해자라는 건 많이 알려져 있었거든요.”

“그래요?”

“여동생과 나이 차가 많이 나잖습니까. 여동생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비상근무를 자주 빠졌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럴 수도 있죠.”

솔직히 말하면 그 세 사람과 마주치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 여동생 쪽이 보기가 더 껄끄러웠다.

아무 의심 없이 ‘정해준’을 봐 주는 아이 아닌가. ‘정해준’은 그 아이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정해준’에게 남은 건 목표뿐이었다. 그 녀석은 정말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면 아무래도 좋았던 거다. 그리움이 사라졌다고 해서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 거기에 맞춰서 대충 반응했었을 테지.

“해준 씨는 그럼….”

“아, 잠깐만요.”

성아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수과가 도착한 걸 전해 들은 모양이다.

“해준 씨, 지금 그 사람도 있는 거죠?”

나는 손요운에게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여 주었다. 손요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서다흰이나 이산예에게일 것이다.

“성아영 씨. 지금 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부회장님은 왜요?”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말이 있어서요.”

이번에는 손요운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나는 성아영에게 말했다.

“청룡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대리인으로 이산래를 지정하였으니 삼족구에 볼일이 있는 여우는 그 사람과 이야기하라고요.”

이산예가 청룡과 말을 맞췄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이산예가 청룡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이산래는 눈 깜빡하지 않고 아빠의 이름을 팔았다.

그리고 그런 내막을 모르는 성아영은 수화기 너머에서 무섭도록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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