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82화 (182/202)

182화 49. 아름드리나무 아래서(1)

폭우가 쏟아지던 날, 비를 멈추기 위해 관악산에 오르던 도중 이산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며 한 말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홀로 걸었습니다. 보다 많은 걸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삶을 농락해도 말이죠.’

그건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투정이며, 꿈이며, 희망이었다.

용들의 방관 아래서 인간들은 길을 걸었다.

결국 산함박이 서울을 습격하고 수백 명의 인간을 삼킨 다음에서야 용들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나이 든 영감 놈들은 몸이 무거워서 일어나면 죽는 병에 걸렸다.

수많은 운명들이 그날 뒤바뀌었다. 우습게도 그걸 가장 가까이서 본 건 이산예였다.

‘삼켜졌던 영혼들이 구제받은 건 좋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그다음은요?’

이산예는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시간을 되풀이해 봤자 끝이 정해져 있는 시간입니다. 끝에 도달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까? 그럼 구제받은 인간들은 또 뭐가 됩니까?’

스노글로브 속의 도시처럼 박제된 세상이다. 공항에서 살 수 있는 기념품처럼 유리공 안에 갇힌 세상이었다.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삶은 여전히 그들이 온전히 결정할 수 없었다.

‘금이 가도, 설사 무너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존재의 죽음을 뜻하진 않습니다.’

그런 운명을 지켜본 어린 사자는 믿음과 희망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도 인간은 나아갈 테니까요.’

‘낙관적이시네요.’

‘그것이 인간이니까요.’

진흙탕을 뒹굴고, 때로는 몇 걸음 돌아가더라도.

그래도 인간은 살아남는다. 앞으로 걸어간다.

이산예가 인간의 모습을 고집하며 아득바득 그 속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악마는 용들이 만든 벽이 무너지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가, 가족, 분… 들이, 수거, 한, 이, 인간의, 영, 혼… 때문… 에요?”

“네. 돌아갈 곳 없는 가여운 영혼들이 길을 잃고 헤매게 될 테니까요.”

이산예는 나와 오늘, 서다흰과 우투리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부디 이 시간을 잘 이끌어 주세요.”

믿음은 보답 받고 말 것이라는, 어린아이 특유의 순진함이 그 얼굴에 있었다.

* * *

‘……라는 말을 들어 봤자 말이지.’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내게 없다. 내 입장에서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박서원이 산함박을 죽이고 모든 보주를 넘겨받을 때 그를 찌르고 튀는 것이다. 이산예의 기대나 희망은 솔직히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 않은가?

구민석은 그것들이 모이면 세계를 하나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 하나쯤은 원래 내 세계로 돌려보내 주고도 남겠지.

뭐, 손요운도 알게 된 마당에 눈앞에서 박서원을 찌르게 놔둘 것 같진 않지만.

“자기야!”

……그래도 일단 찌르고 집으로 튀어 버리면.

아니, 아니지. 나는 박서원 같은 놈이 아니다. 이건 잊어버리… 지는 말고, 혹시 모르니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자.

이에 대한 생각은 잠깐 놔두고, 다시 용들에 대한 생각을 해 볼까. 죄라고 생각한 것도 좋고, 뒷수습이나마 해 보려고 했던 것도 좋다. 그러나 그 방안이 좀 잘못되었지 않나. 일단 눈앞의 재앙부터 막아 보면 뭔가 방법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건가? 대책 없이 사는 건 용도 마찬가지구만.

“귀먹었니, 자기야?”

그렇게 생각하면 이산예의 행동도 우스울 뿐이다. 왜 나한테 그딴 기대를 멋대로 걸고 있는 건데? 나는 뭔가 거창한 걸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저 불행하게 휘말린 불쌍한 영혼일 뿐이다.

애초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잘 들어맞아서였다. 이것까지 ‘일어날 일’에 속했다면 할 말은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가 나서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나는 이 세계에 속한 사람도 아니며, 아는 것도 너무 없다.

생각해 봐라.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한 게 뭐가 있는지. 그저 살아가기 급급했을 뿐이다. 나는 이곳에 적응하고 싶지 않고…… 적응을 하려고 해도 이곳 사람들과는 태생적으로 다르다는 걸 깨달을 뿐이다.

나는 호랑이가 독립군으로 불리는 세계는 알지 못한다.

나는 허구한 날 요괴가 튀어나오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나는 잠실에 청룡이 존재하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우리 자기,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니? 그게 예의란다!”

“사람도 아니면서.”

호시탐탐 영혼을 노리는 악마가 있는 세계도 알지 못하지.

나는 플라스크를 흔들기도 귀찮아서 턱 끝으로 TV를 가리켰다.

“심심할까 봐 TV도 틀어 줬잖아.”

“누가 저런 걸 봐?!”

“우리 이모는 잘 보시던데.”

TV에서는 목사님이 온화한 얼굴로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잘 들으면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그게 됐으면 내가 진작에 했겠다!”

“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야.”

“자기야, 생각 좀 하고 말하자!”

귀찮아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시끄럽다. 나는 손을 뻗어 플라스크 주둥이를 잡았다.

“자기야, 우리 좋았잖아! 폭력 반대!”

“플라스크 안에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폭력을 써.”

굳이 따지자면 거주지위협 정도 되겠다. 나는 가볍게 플라스크를 흔들었다. 기껏해야 스노글로브 안의 눈이 휘날릴 정도의 강도밖에 안 된다.

물론 악마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꺅! 씨발, 자기야, 나중에 꼭 두고 보자!”

이런 삼류 악당 같은 말이라니. 악마도 한물갔군.

악마의 욕지거리를 흘려듣다가 궁금한 게 생각나서 플라스크를 멈추고 휴대폰에서 눈을 뗐다.

“야.”

“왜, 자기야.”

“네 주식은 인간의 영혼이지?”

악마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으응,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럼 인간이 없는 우주 공간에서 네 힘은 어떻게 되지? 그런 공간이라면 인간의 영혼을 대가로 힘을, 네 말에 의하면 전지전능한 힘을 쓸 수 없잖아?”

악마는 입을 떡 벌렸다.

“자기야, 혹시 미국의 우주국이랑 아는 사이 아니지? 거기서도 정신이 있다면 그런 부탁은 안 들어줄 거야….”

악마는 충격을 영 지우지 못하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호기심을 해결한 대가로 새로운 협박거리를 얻었다. 괜찮은 소득이었다.

플라스크를 내려놓고 그 옆에 놔둔 우편물을 잡았다. TV에서는 여전히 목사님의 따뜻한 말이 나오고 있었다.

악마는 발로 플라스크 바닥을 걷어차며 궁시렁댔다.

“이래서 인간 사이에 SF가 유행할 때 말렸어야 했는데!”

결국 못 참고 플라스크 마개를 잠갔다. 진작 이럴걸. 플라스크 안의 염소는 부루퉁한 얼굴로 철푸덕 주저앉았다. 나는 염소에게 시선을 떼고 우편물을 확인했다. 예상치 못한 내용이 섞여 있었다.

“와.”

나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구민석이 말한 대로, 매년 열리는 후원 행사는 내게도 초청장을 보내왔다.

바로 어제 센터를 통해 연락을 받았다. 나라에서 정중하게 이러이러한 행사에 참가하지 않겠나, 하는 공문이었다. 매년 있는 일이라며, 딱히 강제성이 있는 행사는 아니라고 참석 여부만 확인한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안 간다고 하고 싶은데 구민석의 꼭 참석하라는 말이 걸렸다. 무시해도 될 일이지만 결국 가겠다고 답했던 건 이산예와의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이 시간에 끼어들면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 잔뜩 일어나 버렸지만 그게 일어날 일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청룡이 삼족구를 부른 일도 있으니. ‘드라마’의 주요 인물이 엮이는 ‘일어날’ 일은 확인하는 편이 좋았다. 좋은 일은 없어 보였지만.

“…이게 이렇게 된단 말이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판단을 잘 내리긴 했다. 나는 우편물을 지긋지긋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원인은 이거다. 고급스러운 종이봉투에 정성스러운 문구로 포장된 편지. 매년 9월 첫째 주 주말에 열리는 후원 행사, 아름솔의 초청장이다. 청룡이 깊이 관여되어 있는 행사라 그런지 정중한 초대문구 끝에는 청룡 그림이 있었다.

얼굴을 쓸었다.

난 구민석이 순전히 본인과 관련된 일 때문에 나보고도 오라고 하는 줄 알았지.

설마하니 ‘정해준’이 10년 전 잠깐 있었던 고아원이 이곳과 연계된 곳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초청장은 ‘초능력자 정해준’이 아니라, 아름솔의 후원 대상이었던 ‘정해준’에게 온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확인하고자 했구나. ‘나’라는 변수가 자신들의 계획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이걸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놈들이 날 부르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손요운과 함께 박서원을 막게 될 줄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둘째 치고 ‘정해준’만 해도 10년 전 그들과 잠깐 엮였을 뿐이다. 박서원과 쌍둥이는 가족일지 몰라도 ‘정해준’과 나는 거기에 장단 맞춰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

초청장을 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최소한 박서원의 떠보기가 누구한테 배운 건지는 아주 잘 알겠다.

여우가 갯과라더니 딱 지 같은 짓만 골라 하고 있다.

* * *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9월에 접어들었지만 날씨는 아직 여름이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잠실로 모여들었다. 얼마 전에 본 기억이 있는 터라 여기에 발걸음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름솔이 열리는 장소가 여기라는데 어쩌겠는가.

그 빌어먹을 드라마의 15화에서 산함박은 호수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어디로 기어들어 왔을지 모르겠다. 최근 들어 청룡이 잠실 타워를 자주 비우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잠실 거주자 아닌가. 산함박이 나타나거든 경보 노릇 정도는 해 줄 것이다. 결국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으니까.

호수 근처라 그런지 어쩐지 더 더운 것 같다. 한평원은 안 왔나. 하다못해 백성찬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걸어 다니는 공기청정기와 선풍기라니. 어울리는 콤비다.

“안녕하세요, 해준 씨.”

그러나 불행히 나에게 인사를 걸어온 건 성아영이었다. 구민석의 조카.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시면 저도 싫어해요?”

“삼족구가 오는 행사인데 왔네요. 회장님은요?”

“부회장님은 VIP시니 여기로 오진 않죠. 행사가 시작되면 잠깐 들리긴 하실 거예요.”

“그래요?”

나는 아까 했던 전화를 떠올리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저번에 성아영 씨와 회장님이 말한 특수과 팀장님 말입니다.”

삼족구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기색의 성아영은 내 말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 중국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일이 해결됐다고 엊그제 복귀했답니다.”

“어머나, 잘 되었네요.”

성아영은 반색했다.

“해준 씨가 만남을 주선할 수 있을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은 게, 이 팀장님도 여기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여기요?”

“네. 지금 불개는 특수과에서 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팀장님은 청룡님 전담이라서, 자연스럽게 삼족구도 이 팀장님이 데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 좋아요. 그렇군요….”

성아영은 잠깐 눈을 찌푸렸다가 언짢은 기색을 지웠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사무용 미소를 지은 성아영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전 삼촌한테 가 봐야 해서요. 해준 씨, 조금 있다가 연락할게요.”

성아영은 휴대폰을 살짝 흔들었다.

“전화하면 꼭 받아요.”

좋아. 이만하면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이제 삼족구가 얼마나 용맹하고, 여우를 잘 제압할 수 있는지 구경하는 일만 남았다.

“까악.”

오늘과 이산예와 함께 만들고, 서다흰과 손요운이 검토한 계획을 되새기고 있는데 익숙하다면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까치 울음소리.

작매인가 싶어서 아래를 보니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 까치가 어쩐지 짜증이 가득한 걸음걸이로 내 앞을 지나갔다. 마치 따라오라는 몸짓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떻게 하려나 싶어 천천히 따라가니 까치는 용케도 그늘진 곳을 찾아내어 사람으로 변했다.

욱리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버들님의 전언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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