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48. 달 세뇨의 밤(6)
“어? 그러니까, 어어?”
새끼 사자는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당황한 주제에 종이인형 너머로 인간 네 명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얌전을 떨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오늘은 부하 된 도리로 상사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매, 맥의, 향로를, 사용, 했, 어요….”
오늘은 정말 상사를 잘못 만났다. 잘 만난 건가? 모르겠다. 야근시키면 다 나쁜 놈이지.
“그걸요? 음, 오늘 씨라면 악몽을 마주치더라도 잡아먹히지 않게 할… 수…… 있긴 할 텐데.”
새끼 사자는 눈을 한 바퀴 굴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산래 팀장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직 어린 티가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 때문인지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새끼 사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혹시, 무, 무슨 꿈을 보았습니까?!”
“어…….”
“오늘 씨와 해준 씨만 온 게 아니라 저 두 사람까지 봤……. 아, 시, 실례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건네는 말만큼은 그래도 공손하다. 집에서 예절 교육을 잘 받은 모양이다.
모친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했던가? 그래. 신라 출신인 아버지에게 배웠더라면 저렇게 자랄 순 없었을 것이다.
이산예는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 도와주셨는데 인사가 먼저지요. 감사합니다.”
봐라. 아빠 없이도 저렇게 잘 자랄 수 있다.
감사 인사를 끝낸 이무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작은 몸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물에 걸렸던 시절의 사진 속 크기로 자랐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대형견 크기가 되었다.
종이인형들은 감격한 얼굴로 이무기의 털을 마구 쓰다듬었다. 결 좋은 하얀 털이 정전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
“악! 그만, 그만해!”
처음 이곳을 왔을 때만 해도 종이인형이나 이산예나 저렇진 않았는데…….
어쩌면 저 새끼 사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어릴지도 모르겠다. 저 대형견만 한 크기가 다 자란 건 아닐 거 아냐. 청룡은 말할 것도 없고 다리화도 저 강아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다.
겨우 종이인형들에게서 풀려난 이산예는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에 상사로서의 위엄이나 이무기로서의 경외는 없었다. 이산예는 우리를 올려 보았다.
“큼, 이 모습으로는 이야기하기 힘드니 제가 둔갑을…… 해야 하는 게 맞겠지요?”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으으으음…….”
어린 사자의 눈이 손요운과 이다흰을 힐긋힐긋 보았다. 그제야 저 이무기가 뭘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이산래 모습으로 둔갑하기에는 두 사람이 걸린다 이거지?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이쪽이 본모습이라서 좀 더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걸 수도 있다.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지만.
손요운은 씩 웃으며 어린 이무기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이 팀장님.”
농담이 아니라 이산예는 1m쯤 뛰어올랐다.
손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특수과 팀장님이시지요?”
어린 사자는 입을 떡 벌렸다. 사자가 아니라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곧 어찌 된 영문인지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꿈!”
그리고 곧장 탄식했다. 종이인형들은 불쌍한 사자의 등을 쓸어 주었다. 정전기가 가라앉질 않는다.
“아아, 그때 일을 봤구나. 그렇죠, 지금 제가 꿀 만한 악몽은 그때밖에 없으니…….”
어린 사자는 풀이 죽은 채 둔갑했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도 어떻게 둔갑했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된다. 드라마 예산이 딸려서 아무런 효과도 없이 인간으로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에서 둔갑은 그러한 것이기에 저쪽에서도 그렇게 표현된 걸까.
새하얀 털을 가진 사자는 새까만 정장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되었다. 나와 오늘에게는 익숙한 모습이다.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는 건 사자일 때와 같다.
이산래. 지금은 휴가 중이니, 이산예다. 이산예는 손요운과 서다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현장에서 몇 번 뵌 적은 있었지요. 저는 특수과 이형상수색팀 팀장 이산래입니다.”
서다흰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목소리가 아까와 많이 다르신데…….”
서다흰의 지적에 이산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산예는 모른 척하며 소개를 마저 했다. 불리한 질문은 들은 척도 안 하는 게 과연 신라인의 핏줄다웠다.
모친께서는 당나라 출신인가? 거기도 평은 안 좋긴 하지. 당나라군대라는 말이 왜 있겠나.
“서해용왕 이목과 남해용왕 적안홍성제왕 오윤의 딸, 오경의 다섯째 아들 이산예라고도 합니다.”
신라와 당나라의 합작품은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다시 한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산예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향해 인사했다.
* * *
이산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오늘에게서 콘코바르의 머리를 건네받는 일이었다.
“이놈은 이곳에 계속 봉인해 둘 겁니다.”
이산예의 말에 맞추어 종이인형들이 움직였다.
“그 기원은 이 땅의 저승사자들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머리를 잃은 몸은 손쉽게 제압되었다. 집에 있는 도끼도 좀 처리해 주었으면 하는데.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오래된 이야기죠. 긴 세월 동안 머리가 바뀌고, 바뀌고, 바뀌면서 그들도 바뀌었죠. 수확한 영혼들을 잡아먹는 것으로.”
“그렇게 목소리를 내리깔아도 안 돼요, 이무기님. 인간으로 치면 나이가 몇인가요?”
“……그러니까 그걸 왜 궁금해하십니까, 서다흰 씨?”
“아니, 사자였을 때 목소리가 너무 어려서……. 특수과 팀장님이 설마하니 이무기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심지어 어리다니.”
서다흰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사기당한 기분이야…….”
“도대체 뭐가요?”
“우리 센터 초능력자 몇 명이 특수과 팀장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수군거렸는데……. 종족…… 나이가…….”
당연히 이산예는 기막혀했다.
“그 사람들은 일 안 하고 그런 얘기만 합니까?”
“우리 애들 유능하거든요? 이무기님처럼 자고 있지 않았다고요!”
서다흰은 말하면서 무언가 깨달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특수과 팀장이 집안일 때문에 휴가 냈다고 들었던 게 분명 한 달 전쯤…….”
물론 이산예가 잠이 든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나도 무관하진 않다. 오히려 나 때문에 이산예의 경계가 무너졌던 게 크다.
그러나 서다흰의 화살이 내게 꽂히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모르는 척하며 서다흰과 이산예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게 돌아오기 전의 시간에서는 일상이었을 지도 모른다.
“큼, 그 얘긴 그만하지요.”
“그래요. 이무기님께는 큰 뜻이 있으시겠지요.”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습니까, 다흰 씨?”
서다흰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없죠. 저희 현장 말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서다흰은 차갑게 말했다. 이산예는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시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은 이산예 한 명뿐이다.
“그렇지만 이무기님한테 이야기를 좀 들어야 할 것 같아요.”
서다흰의 눈이 나와 오늘에게도 서늘하게 꽂혔다.
“그리고 굳이 요운 오빠까지 부른 것도 분명 다른 속셈이 있던 거겠죠?”
“……속셈이랄 것까지야.”
“그럼 아닌가요?”
아니라고 하기에도 뭣하지. 손요운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건 사실이니까.
“오빠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또 선한 일이야 어쩌구 하지 말고.”
“난 그 말밖에 할 게 없는데.”
“그 쓸모없는 눈깔 당장 파 버려!”
서다흰이 신경질을 냈지만 손요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이건 이것대로 무서웠다. 표정이 평소와 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무기님께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산예가 나와 오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무기에게 이런 눈빛을 받는 날도 오고. 나도 참 많이 컸다.
이산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 꿈은 어디까지 봤습니까?”
나는 즉답했다.
“난쟁이를 부르는 것까지요.”
“……아주 수상해 보이는 부근에서 끊겼군요?”
“그러니까 빨리 제 무죄를 증명해 주시죠.”
“맥의 향로가 켜져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이산예는 볼을 긁적였다.
“손요운 씨와 서다흰 씨는 괜찮으십니까? 이건 두 분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이무기님.”
가만히 웃고만 있던 손요운이 말했다.
“……그건 아니지만.”
“그 괴물의 목을 자르는 일뿐이었다면 저는 크게 필요 없었을 겁니다.”
“…….”
“하지만 해준 씨는 저에게 도와달라고 했죠.”
인간의 영웅을 움직이게 하는 단 한 마디.
“정말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뭡니까?”
곁에 있는 오늘이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였다.
지금 시간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손요운은 오늘의 원수를 죽여 준 이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복수 같은 걸 꿈꾸는 성정은 아니지만 그것에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득도한 인간도 아니고, 어찌 그러겠는가.
악몽 속의 잠실에서, 손요운은 곡식 병사들과 박서원 패거리와 함께 산함박을 잡았다. 산함박에게 삼켜졌던 이산예와, 막내를 살리려는 용들의 보조가 있었다곤 하지만 그것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꿈은. 꿈이 아니라 정말 있었던 일이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면 이번에도 손요운은 산함박을 죽일 것이다.
이산예는 손요운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오늘도 침묵을 유지했다.
서다흰은 손요운의 눈치를 보았고, 손요운은 대답을 종용하진 않았지만 빛나는 눈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이건 제 어머니가 저에게 물려주신 겁니다.”
이산예는 품속에서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꺼냈다. 종이인형들의 눈썹이 축 처졌다.
“많은 게 담겨 있지요.”
“지난번처럼 난리 나는 거 아닙니까?”
“그때와 달리 제 목을 노리는 놈은 없잖습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이산예는 말을 흐렸다. 이로 염주를 꿴 실을 끊어 낸 이산예는 염주 알을 하나씩 바닥에 떨어뜨렸다.
염주 알이 떨어진 자리에서 새싹처럼 꿈의 잔재가 하나씩 피어올랐다. 흐릿하긴 했지만 여자가 불러낸 꿈의 잔재보다는 훨씬 선명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이산예는 그리움이 잔뜩 담긴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제 어머니와 형들, 그리고 동해용왕 어르신과 그 가문분들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용은 청룡과 다리화뿐.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한반도가 용들의 땅이라 불린 이유였죠.”
얼핏 보아도 두 손가락을 넘어가는 수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목소리가 함께 말하기도 하고, 이어지는 대화가 동시에 들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목소리들에 정신이 없었지만 들릴 것은 똑똑히 들렸다.
‘이건 우리 잘못이에요.’
‘허, 정녕 그리 생각한단 말이오?’
‘당숙, 숙모님께서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소. 처음 그놈이 인간을 잡아먹었을 때 우리가 벌을 줬어야 했소.’
‘천벌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지 않더냐.’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해하는 걸 막는 게 어떻게 천벌이 돼! 그건 당연한 일이지!’
‘박 형이 잘 말하셨소. 하다못해 쥐를 잡아먹었을 때…….’
‘여우가 돌아 버린 것도 당연하지. 아내가 잡아먹혔을 때 우릴 찾아왔었잖아. 그걸 돌려보낸 게 누구였더라?’
‘크흠. 그렇다고 우리가 사사로이 힘을 쓸 순 없지.’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되었잖습니까?’
‘어어어, 잠깐, 저거 서해용왕님네 막내 아닙니까?’
‘아이고, 저걸 어째!’
이산예는 계속해서 염주를 한 알씩 떨어뜨렸다. 이건 이산예의 악몽이 아니다. 이산예에게 남겨진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기억이었다.
염주에서 기억이 흘러나왔다.
‘저 인간들이 저 작은 애를…!’
‘박 형, 인간들 욕할 시간에 힘이나 좀 불어넣으쇼! 애가 죽게 생겼잖소!’
구민석의 말마따나 어르신들이 엉덩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힘을 넣어 주고 있었다. 이산예는 어두운 표정으로 기억을 바라보았다.
‘이거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왜?’
‘아니, 저 인간들이 보주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죽으면 그 보주를 저놈이 삼킬 텐데 그럼 큰일 아닙니까.’
‘쯧, 인간들은 죽게 내버려 두어라. 저기, 붉은 술의 칼을 휘두르는 놈이 제일 먼저 잡아먹은 게 누군지 아느냐?’
‘아뇨…?’
‘현무다. 저 인간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다.’
‘……가족이 죽지 않았으면 조용히 살았을 운명 아닙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산함박을 일찍이 잡았더라면 저 인간은 아무도 먹지 않았을 겁니다.’
이산예의 손이 미끄러졌는지 염주 알이 우수수 떨어졌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당숙.’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냐? 왜 인간들끼리 싸워? 서양 난쟁이와 악마는 또 왜 부르는 거고?!’
‘이거 안 되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말려도 전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은데…….’
이산예가 떨어뜨리는 염주에 맞추어 종이인형들이 하나씩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산예에게 오는 부담을 종이인형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이런, 이대로 가면 서울이, 이 땅이 문제가 아니게 돼!’
‘만물에 금이 가 버린다!’
‘무너진다, 아아, 무너져 버린다!’
우왕좌왕하는 용들 사이로 묵직한 음성이 내리꽂혔다.
‘우리의 죄다.’
‘…그런!’
‘관망하는 것은 때로는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죄가 되는 법.’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중후한 목소리의 용은 고개를 돌렸다.
‘이 형이 기둥이 되시오.’
‘……김 형, 설마.’
‘나는 하늘로 올라가 천장이 되겠소.’
‘저는 하늘을 달려가 벽이 되겠습니다.’
천장이 되겠다는 용이 멈칫했다.
‘이홍아,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뇨,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이건 우리의 죄입니다. 이대로라면 모두 무너지고 말 겁니다. 할아버지의 힘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버티기 힘드시겠지요.’
동해용왕의 손자가 말을 끝내자 용들 사이에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나 곧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반대편으로 달려가 벽이 되겠소.’
‘벽은 사방에 있어야 하지 않나? 난 북쪽을 맞지.’
‘저는 남쪽 출신이니 남쪽으로 가지요.’
‘한 겹으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다들 좀 움직입시다.’
‘대왕께서 천장이 되신다니 거기에 한몫씩 거들면 충분할 겁니다. 당숙께서는 어찌하겠소?’
‘……에잉, 다들 하는데 나만 빠질 수 있겠느냐.’
‘죄가 아니라며?’
‘그런 거 묻지 마, 이 녀석아!’
염주는 몇 알 남지 않았다. 이산예는 남은 다섯 개의 염주를 천천히 떨어뜨렸다.
‘세계만 지탱한다고 전부가 아니지요. 저와 제 아들들은 돌리겠습니다.’
‘돌리다니?’
‘세계를 이어 붙인다 하더라도 이미 구멍이 크게 나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두면 먹힌 이들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벽 안의 인간들은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막내는 어리니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니 조금 전 넣어 준 힘은 거두지 않을 겁니다. 그 힘이 없어도 충분히 돌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 우리 막내가 위험한 짓 못 하게 잘 봐 주세요.’
‘저번처럼 그물에 걸리게 하지 말고요.’
마지막 염주 알이다.
‘소예, 그 아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들을 도와 길을 찾으려고 하겠죠. 당신도 가능하다면 그 길을 함께해 주세요.’
남해용왕 적안홍성제왕 오윤의 딸, 한반도 서해용왕 이목의 부인이자 이산예의 어머니인 오경은 남편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 * *
곡의 마지막에 도돌이표가 있습니다. 도돌이표를 만난 연주자는 곡을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겠죠. 악보를 따라서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만약 연주자가 도돌이표를 따라 처음부터 연주하는 와중에 악보대로 연주하지 않으면 곡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연주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무너져서 엉망이 된 소음일까요?
…….
기적적으로, 아름다운 즉흥곡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같지만 완전히 다른 하나의 곡이 완성되는. 그런 즉흥곡이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일어날 거라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믿어야지요. 그 길밖에 없는데.
“저는 그 길이 만파식적이 될 거라 믿습니다.”
종이인형들이 모두 불타 사라졌다. 홀로 남은 사자인형은 구슬프게 울었다.
그게 꼭 이산예가 우는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