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48. 달 세뇨의 밤(5)
그 시대에는 흔한 일이었다.
가뭄이 있고, 굶주린 백성이 있다.
고난을 이기지 못한 어버이가 어린아이를 숲에 버리는 일 정도는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숲에는 마녀가 있다고 알려졌으므로 어쩌면 그 마녀가 아이를 돌봐 줄지 모른다고. 어미는 신께 기도드리며 생각했다. 혹은 아이를 받은 마녀가 비를 내려 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딱히 비극인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냥 그런 삶이었다.
아이를 숲에 두고 돌아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안 풍경에 어미가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보다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존재하는 동화였다면 어미는 아이를 되찾아 가족의 소중함을 알리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현실이다. 숲속의 괴물이 존재하는 세상. 현실은 동화보다 좀 더 냉혹하고 잔인했다. 물론 교훈도 있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격언이 그 증거다.
[내 아이, 내 아이, 내 아이!]
숲으로 돌아간 어미가 발견한 건 목이 없는 딸아이의 몸.
숲속의 마녀 대신, 검은 말을 탄 괴물이 영혼을 거두어 갔다.
목 두 개가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머리를 잃은 몸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콘코바르의 머리에는 아직 이산예가 덧씌운 금고아의 주술이 걸려 있었지만 머리를 찾으려는 몸의 노력은 강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처음 상자를 열었을 때처럼 사내는 창백한 얼굴로 간악하게 웃었다.
“으하, 으하하하하하!!! 거 우스운 악몽도 다 있구나. 인간이란 다 그런 존재지만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할까. 네년 말이다, 네 딸의 이름은 기억하나?”
[네놈이 감히 내 딸의 이름을 묻는 것이냐!]
“그딴 건 줘도 안 가진다, 어리석은 여자여.”
콘코바르는 코웃음 쳤다.
더듬거리는 손이 머리 근처까지 왔다. 작게 차단막을 쳐서 콘코바르를 분리했다. 손요운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들고 있는 종이칼을 한 번 더 아래로 휘둘렀다.
박서원의 조언 아닌 조언도 있었고, 태생적인 요인도 있으니 손요운이 인간의 편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지만 신선비 때만 해도 인간 모습을 공격하는 것엔 거부감을 느꼈었잖아. 도대체 그동안 손요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덤덤하게 손목을 날릴 수 있게 되었냐고.
그래. 정해영 핏줄이 어디 가겠는가. 엄마가 좋아하는 애인데 당연히 뭐 하나 나가 있었겠지.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냐. 네년이 기억하고 있냐의 문제지.”
[…….]
“딸의 이름 기억하나? 기억하고 있다면 네 복수심을 인정해 주지.”
[내, 딸…….]
오늘이 서다흰에게 눈짓했다. 서다흰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콘코바르도 저대로 놔둘 순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저 여자를 끊어 내는 것이다.
[내 딸…….]
여자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다. 푸석푸석하던 금발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하고 죽어 있던 눈에 빛이 돌아온다. 잘린 목이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일은 없다. 여자의 얼굴이 아름답기에 더욱 섬뜩했다.
[그 아이. 이름이, 뭐더라?]
여자는 몽롱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최소한 복수를 논할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야 하지 않겠나? 수백 년이 지나더라도 말이지.”
콘코바르는 신랄하게 말했다.
[나, 는……]
“나를 저주했던 게 그대 하나뿐인 것 같나? 물론 내 머리를 훔친 건 그대가 유일하지만.”
조금은 여자를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잊어버릴 거면 다 잊어버리거나, 기억할 거면 다 기억해야지. 어정쩡하게 나눠 버렸으니 이 모양이 된 거 아냐. 멍청하기는.”
[그으으…….]
“보자, 그대의 영혼을 내어 주진 않았던 것 같고. 그럼 무엇으로 내 몸에 붙어 있었지?”
여자의 얼굴을 향해 내미는 손이 있다. 흐릿한 그림자로 이루어진 손이다.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을 것 같은 고운 손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온갖 궂은일은 다 도맡아 해 본 노파의 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도 아니면 염소의 발굽처럼 보였다.
콘코바르는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아하, 염소. 그래, 내 목 위에 앉아 있는 동안 수확한 영혼을 염소에게 바쳤구나. 네 영혼 대신!”
꿈의 잔재가 넘실거린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이 중 저 여자가 꾸는 꿈이 가장 끔찍한 악몽이라는 소리다.
맥의 향로는 여자의 악몽을 불렀다.
‘바라는 게 있구나? 부? 명예? 사랑?’
악마가 여자에게 속삭였다.
‘아니면 복수?’
동시에 내가 잠실 타워에서 보았던 그 여자도 그림자로 나타났다.
‘내게 바칠 영혼이 또 없니? 그럼 옛날 계약을 조금 수정해 줄게.’
본래 꿈은 가장 비밀스러운 기억이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고, 스스로에게서조차 감추곤 하는 기억.
[아아아아아아!!!!]
여자는 고함을 질렀다. 몸이 있었다면 사지를 뒤틀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이 없는 여자는 기껏해야 반 바퀴 정도를 데굴 굴렀다.
두 악마가 속삭인다.
‘그도 아니라면……. 그래, 영생?’
‘수확한 영혼을 내게 바치지 않더라도 영생을 살게 해 줄게.’
제 손으로 버린 어린 딸을 변명 삼아 여자가 빌었던 소원.
그리고 여자가 그를 위해 바쳤던, 수없이 많은 죄 없는 이들의 영혼.
“허억, 흑, 흐으읍…….”
여자는 땅에 처박힌 채로 서럽게 울었다.
* * *
“저를 죽여 주세요…….”
여자는 서다흰에게 빌었다.
“제발요, 제발 저를 죽여 주세요.”
인간이었을 적은 별 볼 일 없었을 여자가, 지금은 머리만 남은 상태에서도 유창하게 한국어를 사용했다. 요괴나 영물 중에서도 꽤 강대한 힘을 가진 이들만이 가능한 묘기였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여자는 그동안 방문할 일이 없었을 극동의 조그만 나라의 말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만큼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소리였고, 그러기 위해 수많은 영혼을 수확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죽여 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서다흰의 능력으로 기억 저편에 묻어 놓은 인간성을 회복한 여자는 절실하게 말했다.
“죽여 주세요…….”
“어, 어떡해요?”
서다흰은 난감한 얼굴로 오늘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기도를 멈추었다. 그래도 묵주에는 여전히 은은하게 빛이 서려 있었다. 여자의 악몽에 휩쓸리지 않았던 건 오늘 덕분이다.
“가, 강요하지는, 않, 아요.”
서다흰은 울상을 지었다.
“그 말은 저보고 이거 없애라는 뜻이죠?”
“하기, 시, 싫으면, 괜, 찮아요.”
“진짜요?”
“소, 손요운, 씨에게, 부, 부탁, 하, 면…….”
서다흰은 눈을 찌푸렸다.
“결국 없애야 한다는 거잖아요!”
“난 괜찮으니까 무리할 필요 없어, 다흰아.”
“그 종이칼로 뭘 어쩌겠다는 건데?!”
그 종이칼로 여자의 목을 베었다. 장난감보다 못한 생김새지만 그래도 할 일은 다 하는 애였다.
“씨이…….”
서다흰은 다시 울상을 지었다.
“칼로 써는 것보단 제가 하는 게 보기 나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래, 다흰아.”
“지네도 좋아하진 않는데 이것도 싫어…….”
생리적인 혐오감이다. 차라리 창백한 쪽이 보기에는 편했다.
“아아……. 감사합니다…….”
지금은 여자와 연결된 악마도 플라스크 속에 갇혀 있다. 방해하고 싶어도 방해하지 못할…….
잠깐만.
넋 놓고 구경할 게 아니다.
“다흰 씨. 잠깐 멈춰 봐요.”
“네?”
“저 여자한테 물을 게 있어요.”
자신의 이름도, 딸의 이름도 잊어버린 여자는 훌쩍훌쩍 울며 나를 보았다. 저 얼굴로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도끼를 휘둘렀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소름만 돋았다.
“악마가 왜 너와 새로 계약했지?”
“네?”
이산예는 팀장이었을 때 콘코바르의 머리채를 잡아 휘둘렀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여자를 걷어차지 않는 게 내 마지막 노력이다. 이 여자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죽어 나간 수많은 영혼을 생각하면 짜증만 솟았지만 이미 진창에 빠져 바스러질 영혼이다.
여자 위로 내 그림자가 길게 졌다.
“옛날 계약을 수정까지 해 준다잖아.”
꿈의 잔재가 말했던 내용이다.
“왜? 그럴 이유가 있었어? 너한테?”
“아, 그건…….”
여자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콘코바르의 머리를 들고 이산예가 걸어 둔 금고아 주문을 보수하고 있던 오늘이 이쪽을 보았다. 종이칼에서 종이인형으로 돌아온 인형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손요운도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계속 일으켜야 한다고…….”
찬송가 메들리에 시달린 악마에게서 겨우 들을 수 있었던 말이 떠올랐다.
‘일어난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
“저 이무기를 공격하는 게?”
“최소한 움직이지 못하게는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그게 ‘이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가슴은 뜨거워졌고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악마가 했던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악마가 했던 말 또 없어? 뭐든 생각나는 걸 말해.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같은 거.”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인간의 영혼이라니!’
잠실 타워 전망대에서 악마는 즐거워하며 말했다.
‘정해준’과 ‘나’는 다르다. 내가 이 몸에 들어와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어느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같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놈과 나는 완전히 다른 타인이다.
적어도 악마는 돌아온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 악마가 ‘정해준’의 영혼을 들고 있다.
‘정해준’은 새날에 입사하면서 박서원과 재회한다. 아마 손톱을 먹은 쥐 때문에 박서원과 마주쳤을 때 ‘정해준’은 ‘나’와는 다른 말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먼저 알아보고 태연하게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사라진 기억이 돌아오면서 박서원이 자신을 수상하게 여기게 될 걸 알면서도.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박서원을 배신하기 위해 곁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내 인성이 ‘정해준’보다 더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정해준’이 아니니까 ‘정해준’이 한 일을 할 수 없을 뿐이다. ‘정해준’이 아닌 ‘나’에게 박서원이라곤 겨우 반년 전 처음 만난 짜증 나는 회사 동료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덕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로 인해 이 세계는 이전의 시간과 완전히 달라진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자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악마님께서 무척이나 기대하고 계셨으니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요?”
즉, ‘나’는 이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속한다.
“…그렇겠지.”
내가 이곳을 완전히 망쳐 주길 바란다는 악마의 말.
인간들의 영혼이 잔뜩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악마의 말.
이산예의 꿈에서 보았던 잠실의 모습. 손요운의 품 안에서 죽은 서다흰.
나는 여자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다흰 씨, 마저 하세요.”
“……네.”
서다흰이 만들어 내는 금빛이 진해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한 빛이다. 가장 해가 높이 뜨는 시간에 쏟아져 내려오는 태양 같은 빛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하고 화사한 금빛.
시간이 돌아오기 전에는 저 빛에 구원받았을 영혼들이 있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저 여자처럼.
“우리 딸, 엄마가…… 갈…….”
빛이 사그라졌을 때, 여자는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콘코바르가 먹어 치운 딸과 정화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자의 영혼이 재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최후에 그렇게 믿고 있었다면 그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의 믿음의 힘이다.
“……오늘 씨.”
나는 나지막하게 오늘을 불렀다. 콘코바르를 붙잡고 있던 오늘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이 팀…… 큼, 이무기는 어떻습니까?”
“아, 어…….”
오늘에게 물을 것도 없었다.
“머리를 흔들면서 꼬리마저 휘두르니.”
노랫소리가 들린다.
주위를 맴돌던 손바닥만 한 종이인형들이 물을 준 것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본 것처럼 종이인형들은 노래를 부르며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금색 공을 던지고, 가면을 쓴 이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노래를 부른다. 침입자들에게는 한없이 사나워질 수 있는 종이인형이지만 하얀 사자를 볼 때는 봄날보다도 따스한 햇볕이 되었다.
“온갖 짐승 어른 되는 네가 바로 사라젼가.”
바람도 없는데 새하얀 털이 움찔거린다.
새끼 사자는 하품을 크게 하며 졸린 눈으로 형들의 종이인형들을 보았다.
“……뭔가, 악몽을 꾼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