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48. 달 세뇨의 밤(4)
종이인형들은 저마다 쥐고 있는 무기를 내밀었다. 무기라고 해 봤자 손톱만 한 금색 공을 안고 있거나 휴지 조각 같은 깃발이 달린 깃대를 흔들 뿐이다. 깃대의 끝에는 창처럼 뾰족한 장식이 달려 있었다.
‘장군님!’
‘우리가 바라는 건 하나뿐입니다.’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이 그 위로 겹쳐진다. 아직 꿈이 끝나지 않은 건가? 아니면 그 잔재?
‘그저 장군님이 행복하게 사셨으면 했는데.’
지하국에서 보았던 교위가 엉망이 된 잠실에 서서 엉엉 울며 말했다. 어린 모습도 아니고 수염이 숭숭 난 아저씨가 우는 모습은 꼴사나웠지만 꺾인 창대는 우습지 않았다.
“해, 해준, 씨.”
“…네.”
흐릿한 병사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부루퉁한 얼굴의 종이인형들이 선명해졌다.
손바닥만 한 종이인형들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 봤자 정말 무서울 리는 없다. 오히려 인형극을 보는 기분이라 서다흰의 감상평처럼 귀엽기만 했다.
오늘은 그 조그마한 종이인형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꿈을 통해 멋대로 침입한 인간들을 경계하던 종이인형들은 오늘을 보자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그런 종이인형들의 표정도 오늘의 품에 있는 새끼 사자를 볼 때는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종이인형들은 서로 모여서 수군거렸다. 한참을 기다리니 금색 공을 들고 있는 종이인형이 대표로 나와서 손짓했다.
“따라…… 오라는 것 같죠?”
예전엔 분명 노래를 불렀는데……. 이산예가 이 꼴이 된 게 종이인형들에게도 꽤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다.
오늘에게서 콘코바르 바구니를 넘겨받았다. 새끼 사자까지 든 채로 바구니를 들고 있는 게 힘들어 보였다. 콘코바르는 지치지도 않고 우렁찬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무시했다.
우리는 종이인형들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며 따라갔다. 종이가 팔랑거리며 걸어가는 게 여전히 꿈속을 거닐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아직 꿈을 헤매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종이인형들은 우리를 숲으로 안내했다. 이걸 숲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무로 보이는 그림이 많으니까 숲이라고 하자. 청룡이 그 사내를 붙잡은 곳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는데 그 사이에 나무가 자라 있었다. 서다흰과 손요운은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구경했고 나와 오늘은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여긴가 보네요.”
철그럭.
철그럭철그럭.
바로 코앞에서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일 앞에서 걷고 있던 종이인형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나무 사이로 공을 던졌다.
[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 미친 것들이! 다 죽여 버릴 거야!]
목소리가 얇다. 이전에도 그리 굵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아예 여자 목소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지, 지금 몸 위에 붙어 있는 머리는 생전에는 여자라고 했다. 콘코바르처럼 주술이 강해지니 괴물로서의 정체성이 약해지고 인간성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죽여 버릴 거라고!!]
콘코바르처럼 혈색이 좋아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성질머리는 확실히 더 사나워진 것 같다.
나는 사슬에 묶여 바닥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여자의 눈앞에 콘코바르의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여자는 콘코바르를 보더니 조용해졌다.
[…….]
나는 콘코바르에게 물었다.
“아는 얼굴입니까?”
“흐음. 솔직히 딱 떠오르는 얼굴은 없네만.”
[네노옴!!!!]
조용한 건 잠깐이었군. 여자는 콘코바르를 보더니 더 악다구니를 써 댔다. 시끄럽긴 하지만 그뿐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이상 무섭지도 않다.
나는 오늘을 돌아보며 물었다.
“바로 시작할까요?”
“그, 그럴, 까, 요?”
[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여자의 주위에 굴러다니는 금색 공을 주운 종이인형은 다시 여자의 머리를 향해 공을 던졌다.
[악! 힘도 다 잃어버린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주제를 모르는 건 꽁꽁 묶여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본인 같았지만……. 자기 몸도 아닌데 붙어 있으면 지능이 저하될 수도 있지. 이해한다. 콘코바르도 사지가 없어서 멍청해지지 않았던가.
“다, 다흰, 씨는, 바로…… 그, 주, 준비, 해, 주시구요…….”
“어……. 저렇게 팔팔하게 살아 있는 놈은 정화해 본 적 없는데 괜찮을까요?”
주로 요괴 사체로 더럽혀진 땅을 정화해 온 서다흰은 불안한 얼굴로 오늘을 보았다.
[정화? 지금 정화라고… 악!]
잘도 이마만 맞추네. 종이인형들의 솜씨에 잠깐 감탄했다.
“하, 할, 수, 있어요.”
서다흰에게 오늘은 단호하게 말했다.
“믿어 주는 건 고마운 말씀이지만…….”
“할, 수, 있, 어, 요.”
오늘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에 서다흰이 오히려 시선을 피했다.
워낙 확고하게 말해서 나도 오늘의 눈에 서다흰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아니면 이 팀장에게 서다흰에 대해서 들은 말이 있거나.
“……하지만 먼저 목을 쳐야 한다면서요? 여기서 뭘로 쳐요?”
오늘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서다흰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오늘은 종이인형들을 보았다. 믿는 구석이 저거였어? 아니, 뭐, 동생이 저 모양이 되었으니 도와주기는 할 테지만. 그렇긴 할 텐데……. 특수과의 주먹구구식 처리방법이 여기서도 빛을 발할 줄이야.
종이인형들은 또 저들끼리 모여서 숙덕거렸다.
이야기는 조금 더 길어졌다. 할 일 없는 인간들은 여자와 콘코바르의 설전을 구경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날 가만히 놔둬!]
“허허,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자네가 먼저 이들을 건드렸던 것 같은데. 본래 인간은 복수하는 존재라네.”
[닥쳐!]
“복수, 음, 복수? 흠, 그래,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를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콘코바르의 말에 여자가 발끈했다.
[네놈이 내 딸을 데려갔잖아!!!!]
“과거의 내가 데려갔던 게 한두 명이어야지. 그래도 지금은 그 시간들을 반성하고 있네. 생명은 함부로 거두어서는 안 될 말이지.”
[죽여 버릴 거야!!!!]
“엄밀히 말하면 나나 자네나 이미 죽은 몸이니 그 말은 옳지 않네.”
[이이익!!!]
콘코바르는 중후한 목소리로 속 터지는 소리를 지껄였다.
“옳지, 보아하니 지금 이 나라엔 악마가 있던데. 염소에게 소원을 빌면 자네의 영혼을 거두어 갈 거네. 그럼 나는 몰라도 자네는 죽을 수 있지 않겠나?”
여자가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콘코바르였다. 그리고 저 여자는 이미 악마와 계약을 했었다. 도중에 여기에 붙잡히는 바람에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지금 악마는 플라스크에 갇혀 있잖아. 계약이 완료가 되어도 저 여자는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이것만 보자면 여자에게 좋을 일만 해 준 것 같네.
물론 정화시킬 예정이지만.
이야기를 끝낸 종이인형들이 이번엔 손요운에게로 다가갔다. 손요운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종이인형에게 인사해 보는 건 처음이겠지. 적어도 이 시간대에서는.
종이인형 중 몇 마리가 앞으로 나와 한데 뭉쳐서 목마를 타기 시작했다. 종이라 그런지 무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차례대로 목마를 타고 높이 올라갔다. 몇 마리는 아래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 사자탈 모양의 종이인형만 거기서 빠졌다.
마치 탑처럼 높아진 종이인형들은 인상을 잔뜩 쓰더니 변신했다. 정말 별꼴을 다 보는구나. 저쪽 세계에서 정해영이 보았던 드라마의 예산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드라마, CG는 제대로 나왔을까? 정해영이 CG 욕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젠 기억도 잘 안 난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자. 최소한 이번 시간에는 ‘정해준’이 없으니 그놈이 박서원을 찌르고 여의주를 강탈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산함박이 서울 사람들을 다 삼키기 전에 청룡의 목을 흔들어서라도 어떻게 그놈을 잡으면 되겠지.
“오…….”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결심했으니, 일단 감탄부터 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성의 없는 감탄사였다. 차라리 손요운처럼 입을 벌리고 할 말을 잃고 있는 쪽이 좀 더 진정성 있어 보였다.
“…….”
좀 멍청해 보이나?
알 게 뭐냐. 우리 엄마는 저런 모습도 좋아할 것이다.
손요운은 멍청한 얼굴로 종이인형을 보았다. 서다흰도 마찬가지였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오늘뿐이었다.
나는 모습을 바꾸지 않은 종이인형들에게 물었다.
“저거 제대로 잘리긴 합니까? 악!”
종이인형이 공을 던졌다. 콩알만 한 게 의외로 따끔하다.
“의, 심, 하는 건, 벼, 별로, 좋지, 못, 해요.”
“그건 아는데…….”
이마를 매만지며 손요운이 들고 있는 칼을 가리켰다.
“아무리 봐도 종이로 보이잖아요.”
어린애가 도화지에 낙서한 걸 오려서 만든 종이칼이다. 용케 저걸 잡고 있구나 싶었다. 일차원과 이차원, 삼차원을 넘나드는 모습이다. 저것도 우투리의 능력일까?
“그걸로 벨 수 있긴 합니까?”
“날이, 그, 있긴 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것 치고는 손요운도 미심쩍어하는 목소리다. 무슨 게임 아이템도 아니고. 저렇게 생겨서 세계관 최강의 무기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벨 수만 있다면 됐죠. 그럼 시작합시다.”
이산예를 빨리 깨워야 한다. 내가 아는 것이 더 늘었으니 그만큼 더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15화’와 ‘16화’. ‘정해준’이 난쟁이를 불러내는 것까진 보았지만 그 뒷이야기는 보지 못했다.
이산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손요운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손요운은 종이칼을 들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현대사회는 놀라운 곳이다. 감히 우투리께 망나니 역할을 맡기게 하다니. 지하국에서 장군님의 행복을 오매불망 기리는 곡식 병사들이 이 일을 모르길 빌었다.
“서다흰 씨는 힘이 끊기면 안 됩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꽤 특수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네, 알았다니까요?”
“손요운 씨도 망설이면 안 되고요. 한 번에 내리쳐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자비는 인간에게만 베풀기로 했다는 우투리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자세가 어정쩡하다는 것만 빼면 좀 더 믿었을 텐데.
“그, 그럼, 부탁, 드, 려도, 될… 까요?”
오늘은 종이인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황금색 가면과 파란색 가면을 쓴 종이인형들이 가슴을 콩콩 치며 자신감을 보였다.
“이, 인형님들이, 도와, 주, 준다고, 하시긴, 하, 는데…….”
슬슬 오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잡혔다. 더듬거리며 말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꼼지락거리면서도 눈빛만큼은 올곧다.
그동안 오늘이 저런 얼굴을 할 때면 남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 도, 조, 조심, 해야, 하니까…….”
이것도 맥의 향로를 켜기 전에 몇 번이고 오늘이 말한 것이다. 이산예가 있었을 때는 이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이무기라는 뒷배도 사라지고 자신이 책임자가 되다 보니 부담감이 심한 모양이었다.
나는 오늘을 불렀다.
“오늘 씨.”
“…네?”
“오늘 씨가 말해 준 덕분에 다들 조심하고 있어요.”
“아, 네, 네에…….”
“그러니까 오늘 씨도 조심해요.”
오늘은 눈을 깜빡이다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계획은 여전히 간단하다. 손요운이 머리를 분리하고 서다흰이 정화를 한다. 저 여자가 이산예를 공격하기 위해 악마와 계약해서 이어놓은 끈만 사라진다면 이산예도 일어날 것이다.
오늘이 걱정하는 것은 손요운과 서다흰이 실패할 거라 생각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사용했던 맥의 향로 때문이다.
이무기의 악몽을 불러낸 맥의 향로의 힘이다. 서양에서 온 괴물들이라고 그 영향력을 완전히 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익히 잘 알듯이, 드라마의 법칙이 아니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꼭 일어나게 되어 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기만 했으면 머피의 법칙도 없고 샐리의 법칙도 없었을 거다.
걱정하고 대책을 잘 세워 둘수록 사건은 발생한다.
“하나, 둘, 셋!”
구령에 맞추어 손요운이 종이칼을 내리쳤다. 서다흰 주위로 따스한 금빛이 퍼져 나간다. 여름이라 짧은 소매를 입은 두 사람의 팔에서 내 손목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묵주가 흔들거렸다.
오늘은 난쟁이에게 주었던 아버지의 묵주 대신 다른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를 했다.
다리화의 여의주는 지금, 오늘과 닿아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수호의 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