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48. 달 세뇨의 밤(3)
이곳은 꿈이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결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꿈이 나를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다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이라고 믿어 버리면 꿈은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스스로 해하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문제이다.
이곳은 꿈. 그것도 청룡의 막내아들, 이산예의 꿈이다. 그 때문일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잘못하면 현실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사실적인 꿈이다. 마음을 다잡았다. 꿈은 절대 현실이 될 수 없으니까.
무너진 건물 사이로 노을이 길게 졌다.
“……끝났나?”
평소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던 구민석은 피와 먼지로 뒤덮인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목소리는 기묘한 열기로 범벅되어 있었다.
구민석은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턱을 쓰다듬었다. 균열이 난 턱이 다시 매끄러워졌다.
“끝났죠.”
박서원은 거대한 뱀의 사체 위에서 선언했다.
“이놈도 죽긴 하네요.”
중간중간 꿈이 끊겨 있었다. 몇 가지의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산예를 붙잡으러 날아가는 손요운과 뱀의 머리를 공격하는 손요운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단순히 꿈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꿈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산예가 이 기억에서는 뱀에게 먹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박서원의 말대로 어떻게 끝이 나긴 했다.
그 아래에서 손요운은 시체를 파헤치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그림자가 손을 뻗어 손요운을 붙잡았지만 닿기 전에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우투리님은 무얼 찾으시나?”
박서원에게 다가가던 구민석은 그런 손요운을 보고 물었다.
“이 팀장님…… 아직 살아 계십니다.”
“누구? 아, 그 이무기?”
구민석이 아는 척했다.
“아무리 작아도 이무기는 이무기니 소화시키는 데에 오래 걸리겠지.”
구민석은 눈을 꾹꾹 눌렀다.
“게다가 어르신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힘이나 불어넣어 주고 있었으니까…. 그래, 오히려 죽었으면 더 놀랐을 거네.”
손아래에서 작은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피부가 부서지고 있다. 인간의 껍질은 여우의 힘을 버티지 못했다.
구민석은 손을 떼지 않은 채 박서원에게 말했다.
“서원 씨. 여유가 많진 않아.”
“대충 어디 있는지 보여요? 이걸 다 뒤질 순 없잖아요.”
구민석은 손을 살짝 뗐다. 부서진 피부 사이로 여우의 금색 눈이 반짝였다.
“음, 일단 이무기님은 앞발 쪽에 계시고. 어디로 삼켰길래 저기 가 있지?”
“회장님.”
“이제 그 소리 들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좀 아쉬운데.”
구민석은 손가락을 들었다.
“서원 씨가 지금 서 있는 거기서부터…….”
동강 난 칼 한 자루가 뱀의 정수리에 꽂혔다. 박서원은 피를 탁 뱉었다. 손요운은 그새 구민석이 가르쳐 준 방향에서 작은 사자를 꺼냈다. 새끼 사자는 미약하게나마 계속 숨을 쉬고 있었다.
“허리까지, 죽 그어.”
정해영이 주인공 빼고 다 죽이는 게 어디 있냐고 그랬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해영의 빌어먹을 내 새끼와 그 일당들은 다 살아 있다. 하나쯤은 죽어도 괜찮았을 텐데. 정해영이 이 기억을 봤다면 ‘내 새끼’가 15화에서 살아남았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래.
이건, 16화다.
박서원의 칼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그동안 기억 속에서 마주쳤던 것처럼 꿀렁이지 않는다. 점성이 있는 것처럼 후드득 떨어지긴 하지만 죽은 피였다.
박서원은 그 피가 응축된 것 같은 새까만 구슬을 꺼내 들었다.
“좋아. 이제 내려와. 주하 씨와 주연 씨도 이리 오고.”
삼함박의 구슬 하나. 박서원이 가지고 있는 게 둘. 백주하와 백주연이 하나씩.
“그리고 정해준 씨.”
구민석이 ‘정해준’을 불렀다.
“용늪의 이무기였나?”
“네.”
‘정해준’은 왼손을 흔들었다. 흐릿하게 이끼 낀 돌멩이가 보였다 사라졌다. 용늪에 가라앉은 이무기의 여의주였다. 저거 하나뿐인가?
이곳의 ‘정해준’은 다리화를 승천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그건 내가 특수과와 일을 하면서 얻게 된 것이니까. 이 팀장도 나와 오늘이 아니라 손요운과 서다흰과 함께했던 것 같고.
구민석의 주위로 박서원과 쌍둥이, ‘정해준’이 모였다. 삼함박의 것까지 해 봤자 여섯 개. 설마 여기서 이산예를 죽이나?
“그럼, 어디 보자.”
구민석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도자기가 깨진 것처럼 얼굴의 반 이상이 금이 가 있었다. 구민석은 꼬리 하나를 대가로 인간의 몸 안에 들어갔다. 지금 그 껍질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회장님, 괜찮아요?”
백주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구민석은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아. 시간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어.”
“못 버티면 어떻게 되는데요?”
“인간의 탈을 쓰고 있어서 업을 버티고 있는 거야. 본모습으로 돌아가면 업에 먹혀 죽겠지.”
“오…….”
“기분 나쁜 반응인데, 그거.”
박서원은 코웃음을 쳤다.
“시간 없다면서요. 빨리하죠.”
“알았다니까.”
구민석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넘실거리는 불꽃은 손바닥에서 둥글게 모였다.
“내 여우구슬까지 합쳐서, 겨우 맞췄군.”
구민석은 박서원에게 여우구슬을 주었다. 박서원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여우구슬은 박서원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자네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니까 이걸로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네.”
“그, 그건… 멈추세요…….”
손요운의 품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민석은 웃으며 새끼 사자를 보았다.
“어린 이무기여. 그대는 어미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소.”
“그 길을, 걷지 마세요.”
“이미 늦었소.”
노을에 길게 진 그림자에 꼬리 여덟 개가 생겨났다.
“그대에게는 억울한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최소한 이들은 그대의 일족들을 원망할 자격이 있소.”
“……그렇, 다, 하더라도, 그 길을 걷게 되면.”
“늦었어.”
“당신, 들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
“늦었다니까.”
박서원이 말을 가로막았다. 여우구슬을 흡수한 손에 백주하와 백주연도 손을 얹었다. 박서원이 이를 악물었다. 꽉 악문 입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정해준.”
박서원이 ‘정해준’을 불렀다.
‘정해준’은 씩 웃으며 박서원에게 손을 뻗었다.
악수를 하는 것처럼 손을 잡고, ‘정해준’은 박서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
“미안해요, 선배.”
푹.
“너…….”
“나도 꿈이 있거든요.”
시꺼먼 먼지로 가득 덮인 땅 위로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내내 다른 목적이 있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선배는 별로 신경 안 쓰더라고요. 선배가 물렁한 인간이라 살았어요.”
‘정해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선배들이 한 번쯤 물었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정해준!”
‘정해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니 그래도 똑같이 했을 것 같네요.”
‘정해준’은 손을 놓았다. 박서원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쌍둥이가 달려왔지만 ‘정해준’이 조금 더 빨랐다.
차단막이 만들어졌다.
“정해준! 씨발, 이거 풀어!!”
손을 한 번 흔들었다. 풀기는커녕 한 겹이 더 생겼다.
쌍둥이와 여우를 가둔 것 하나. 혹시 모르니 손요운과 이무기를 가둔 것 하나.
‘정해준’은 박서원의 배에 꽂힌 칼을 보며 미안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선배가 모아 둔 건 내가 잘 쓸게요.”
‘정해준’의 발밑으로 새까만 기운이 넘실거리며 모였다.
* * *
서다흰과 손요운은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느긋하게 인사했다.
“왔습니까.”
“바, 방금, 그건…….”
“꿈이죠.”
서다흰은 더듬거리며 내 말을 따라 했다.
“꿈, 이요?”
“네. 꿈이요. 저 이무기의 꿈.”
“꿈…….”
서다흰은 오늘의 품 안에 있는 하얀 털을 보고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거, 꿈이라고 하기에는…….”
그냥 평범한 꿈은 아니긴 했지. 아마도 그건 이 세계가 다시 돌아오기 전, 이산예가 보았던 기억일 테다.
기억이란 것은 보통 주관적인 관점이 섞이기 마련이다. 다만 산함박에게 삼켜졌던 이산예가 어떻게 손요운을 비롯한 바깥의 상황을 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무기로서의 능력인가?
“꿈입니다.”
서다흰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뒤에 서 있는 손요운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투리라면 알아차렸을까. 그게 정말 있었던 시간의 이야기라는 걸.
손요운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덕분에 서다흰은 손요운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이무기님의 꿈이라면 무척이나 상상력이 풍부하신 분이시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어리니까요.”
자고로 어린애들은 자기만의 상상 친구를 가지는 법이다. 서다흰은 숫제 미친놈 보는 눈으로 날 보기 시작했다. 그런 눈으로 보면 나도 억울하다고.
설마하니 맥의 향로로 본 이산예의 꿈이 그날의 기억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그 뒤의 이야기, 이산예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 목숨을 내놓았는지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맥의 향로는 악몽을 꾸지 않게 도와준다. 그건 곧 악몽을 불러낸다는 말과 같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죽은 건 틀림없는 악몽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방금 전 엿본 기억이 이산예에게는 더 악몽이었던 걸까.
……이산예가 깨어나면 물어볼 수 있겠지.
“이제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손요운은 조금 다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서다흰 쪽을 슬쩍슬쩍 보는 게, 그쪽이 영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다. 서다흰은 15화 때 죽은 인물에 속했던 모양이니.
정해영, 진짜……. 15화에서 그 호들갑을 떨더니 완전히 다 죽은 건 아니었잖아. 15화에서는 그 부분이 나오지 않은 거겠지? 무슨 드라마가 그 지랄을 해 놓고 예고편에서도 안 보여 줬냐고.
……주인공을 제외한 주인공 파티에 있던 사람은 다 죽은 것 같긴 하지만.
“음, 벼, 별, 건, 없구요…….”
오늘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런 얼굴로 말하면 엄청나게 별거라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나는 모르는 척 오늘의 설명을 들었다.
“저기, 에, 있는, 저… 괴, 괴물의, 목을…….”
“목을?”
서다흰과 손요운은 삐뚤빼뚤 그려진 잔디와 나무 사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청룡과 종이인형들이 붙잡아 놓았던 서양 출신의 괴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꽂혀진 깃발은 바람이 없는데도 펄럭이고 있었다.
“자, 잘라, 주시면, 돼, 요.”
“어허……. 내 몸이 필요한 아이에게 내 몸을 주어도 상관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오늘은 울상을 지었다. 과일바구니 안에 담긴 콘코바르는 자비로운 목소리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생활도 충분하네. 상자 속에 있던 시절에 비하면 충분히 멋진 생활이지. 내 몸도 나보다 자기가 더 필요한 머리한테 가면 더 행복할 거야.”
저 머리는 자기가 지껄이는 게 개소리라는 걸 언제쯤 깨달을까?
“걱정 마시죠.”
“으음?”
“머리만 남게 되는 게 어느 쪽이든 간에 서다흰 씨가 정화해 줄 겁니다.”
“어, 저요?!”
아까 다 설명했는데 왜 새삼 놀라고 있나. 나는 서다흰의 반응을 무시하고 콘코바르에게 말했다.
“유능한 분이시니까 그런 것쯤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으십니다.”
“저기요. 아까부터 왜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세요?!”
“그럼 지금 생활 따윈 기억도 안 나게 될 겁니다.”
“그런가……. 일리가 있군!”
손요운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혹시 다흰이가 반동으로 저주에 걸리는 거 아닙니까?”
“오빠, 일할 때는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너 아까부터 말 엉망이었어. 해준 씨, 다흰이가 위험한 거 아닙니까?”
갑자기 웬 저주?
그러나 곧 손요운이 왜 저 말을 꺼냈는지 이해했다.
이무기의 꿈속에서 서다흰은 특수과의 일을 처리하다가 저주에 당해 약해져 있었다. 그 몸으로 손요운을 지키려다 죽었으니 손요운 입장에서는 당연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설사 그게 개꿈이라 해도.
“그, 그건, 걱정, 하, 지, 않으… 셔도, 괘, 괜찮아요…….”
오늘이 손요운의 걱정을 잘라냈다.
“저… 인, 형들이…, 지, 켜 줄, 테니까….”
“인형이요?”
“네, 조, 종이인형, 들…….”
오늘의 말이 끝나자마자 종이인형들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정해영의 그림 솜씨보다도 못한 그림으로 그려진 낙서 같은 그림은 여전했다. 저번에 쓰러졌던 사자탈 인형도 기운을 차렸는지 그 틈에 섞여 있었다.
“저게 종이인형이에요?”
서다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의 기준은 주관적이다. 본인의 미적 감각에 따라 귀엽다고도 할 수 있고, 못생겼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크기가 작으면 잘생겼든 못생겼든 귀엽다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어머나, 귀여워라.”
그런 의미에서 서다흰의 미적 감각은 크게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척. 척. 척.
종이인형들은 성이 난 얼굴로 걸어왔다. 표정은 무서웠지만 못생긴 그림은 여전했다. 그러나 예전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어린아이 종이인형도 섞여 있긴 했지만 이산예의 세계에 있던 종이인형들은 대개 성인 크기만 했다. 정정한다. 했었다.
사람만 한 크기에서 손바닥만 하게 줄어든 종이인형들은 열을 맞추어 서서는 우리에게 무기를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