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77화 (177/202)

# 177

48. 달 세뇨의 밤(2)

가벼워야 할 겨울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제대로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텁텁한 공기다.

주위를 둘러보면 알고 있는 풍경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 뻗은, 마치 탑처럼 보이는 높은 건물과 그 뒤로 펼쳐져 있는 호수. 자동차로 가득한 도로. 건물들.

잠실이다.

눈에 익은 곳이지만 동시에 딱 그만큼 낯설다. 평일 낮에도 사람이 가득해야 할 장소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 소름 끼치는 정적이 잠실을 뒤덮었다. 부서진 건물 조각들은 검은 끈끈이에 뒤덮여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잠실 타워도 전망대가 있는 가장 높은 층이 무너져 내렸고, 군데군데 검은 그림자에 물들어 있다.

도로는 또 어떻고? 도로 위의 자동차들은 한데 뒤엉켜 있다.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부딪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뒤집힌 차량도 있지만 기이하게도 다친 사람은 없다. 자동차 안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자동차뿐만이 아니다. 어딜 봐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숨이 막혔다. 누가 목을 조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안 돼, 안 돼!”

그 정적 속에서, 누군가 울부짖었다.

“다흰아!”

유일하게 들리는 인간의 소리다. 아는 목소리가, 아는 이름을 부른다. 천천히 움직이던 발이 어느새 뛰고 있었다.

“안 돼, 왜, 왜……. 안 그래도 너 몸이 안 좋았잖아.”

뒤엉킨 자동차 사이에 주저앉은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여자를 꼭 껴안고 중얼거렸다.

“이 팀장님이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랬잖아. 네 능력이면 견딜 수 있다고. 자기가 저주 풀 수 있을 때까지만 견디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왜. 왜…….”

“……그거, 오빠는 못 버티잖아.”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가 여자에게서 흘러나왔다.

“이 팀장님도…… 지금은, 다쳐서 힘을 쓸 수 없게 되셨고, 큭, 흐읍.”

“괜찮아, 말하지 마. 다흰아. 괜찮으니까.”

“오빠는, 날, 감쌌지만.”

여자가 작게 웃었다.

“……나보다는, 오빠가 사는 게 더 나을 거야.”

남자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울지 말구.”

“……다흰아.”

“울지 말구, 앞으로 가야지. 응?”

“…….”

“요운 오빠.”

여자는 마지막으로 남자를 불렀다.

“오빠만 믿을게. 사람들을 구해 줘…….”

남자는 크게 울지도 못하고 여자를 꽉 끌어안았다. 여자는 그 품 안에서 검은 재로 바스러졌다. 잠실에 서 있던 모든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인간의 영웅은 일어났다. 소매로 얼굴을 벅벅 닦고, 떨어진 검을 주워 잠실 타워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쓸쓸한 바람만이 그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다흰아, 난 못 할 것 같아.”

남자는 곁에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네가 믿는다고 했잖아.”

오색빛깔로 빛나는 눈이 물기로 흐려졌다. 어깨에서 화려한 깃털이 퐁퐁 솟아났다. 세상을 덮을 것처럼 커다랗고 따스한 날개다. 공작 깃털처럼 긴 꼬리를 가지고, 은은하게 빛무리를 머금고 있다.

“그럼 해야겠지.”

인간의 영웅은 지킬 이가 남아 있지 않아도 빛났다.

잠실 타워 바로 아래에 있는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검은 그림자가 늘어났다. 그림자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자신들의 위를 날아가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흐흐흑…….

꺄아아악!!!

그림자 속에서 울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린다. 잡아먹힌 이들의 메아리다. 남자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 위를 날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던 호수는 끔찍한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씨발, 아무나 막아!”

“인간에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어.”

“개소리할 시간 있으면 움직여!”

아직 용케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네 명이나. 모두 아는 얼굴이다. 멀쩡한 몰골은 아니었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안 돼! 먹히게 두지 마!”

다급한 외침에 남자는 고개를 살폈다. 알고 있는 흰 빛이 그림자에게 붙잡혔다.

“여기에 이무기까지 처먹으면 위험해!”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어?!”

“차단막으로 어떻게 좀 막아 봐!”

“하고, 있, 다고요!!”

붉은 술과 하얀 술을 단 검들이 빠르게 날아갔다. 어린 사자를 붙잡고 있는 그림자를 끊은 다음, 곧바로 차단막이 쳐졌다. 남자는 어린 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와, 역시 회장님은 옳았어! 우투리는 살아 있을 줄 알았지!”

“닥치고 집중해!”

그러나 영웅의 손이 사자에게 닿기 직전, 호수를 가득 채운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윽!”

“크윽!”

두 사람이 펼쳤던 차단막이 그대로 무너졌다. 어린 사자의 털이 손끝에 스쳤다.

아슬아슬하게, 새끼 사자는 영웅의 손을 잡지 못하고 호수 아래로 떨어졌다. 새하얀 털은 금방 까맣게 물들고.

“이 팀장님!”

영웅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호수 위를 스쳤다.

그리고.

호숫가에 서 있던 초능력자들이 급하게 남자를 불렀다.

“당장 나와! 우투리가 당하면 그건 진짜 감당 못 하니까!”

길게 찢어진 동공을 가진 새빨간 눈이 호수 아래에서 눈을 떴다. 눈알 하나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금방이라도 남자를 삼킬 것만 같았다.

* * *

이무기의 세계는 담장에 둘러싸인 정원 같은 곳이다. 주인의 성향에 따라 담장보다는 요새에 가까울 수도 있고, 있으나 마나 한 허름한 울타리일 수도 있다.

이산래는 오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다. 이산래가 특수과에 근무하면서 사용하는 방법들은 인간으로서는 시도도 못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요괴나 영물에 대한 지식은 다르다. 언젠가 본인이 인간의 곁을 떠나게 된다면 오늘에게 자신의 역할을 물려주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 지식 덕분에 오늘이 어떻게든 이산예의 세계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서다흰은 이제 숫제 지하철역 주위의 도르미를 보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기밀유지서약서도 쓰게 했는데 설명이 너무 부족한 거 아니에요? 너무 될 대로 되라는 식이잖아요?”

그거야 이무기의 세계에 도둑놈처럼 몰래 들어가려는 인간은 없었을 테니까.

박서원과 쌍둥이들, 그리고 그 서양 괴물은 아예 찢어 버리고 침입했지만 우리가 그럴 수는 없지.

“임 팀장님도 설명을 대충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설명해 줬다고요.”

서다흰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가? 이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인가?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구구절절 이야기하면 서다흰은 이해해 줄까?

손요운에게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둘이서 이야기했지만 이산래에 관한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이산래의 이야기는 꼭 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으니까. 본인 신변의 이야기는 본인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죄, 죄송해요…….”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도와드리기는 해요. 공문도 있고. 그렇지만 일을 제대로 하려면 사정을 알아야……. 진짜 불법적인 건 아니죠?”

서다흰은 당황했지만 그래도 물을 건 물었다. 서다흰에게도 말하는 게 나으려나. ‘드라마’ 주요 인물이었을 서다흰이 임상규에게 쪼르르 달려가 신고할 것 같지는 않고.

역시 케이지에서 이무기를 꺼낸 게 무리수였을지도 모른다.

“그건 괜찮아.”

손요운이 부드럽게 대화에 끼어들면서 대화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쁜 일이 아냐.”

손요운의 눈에 언뜻 광채가 스며들었다가 사라졌다. 서다흰은 움찔하며 기세를 늦추었다.

“만약 불법적인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이지, 그게 목적은 아냐. 옳은 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거라면 몰라도.”

손요운은 나와 오늘을 보며 슬쩍 웃었다.

“그렇죠?”

“……그렇, 죠.”

서다흰은 불평했다.

“……그 눈, 기준이 너무 헐렁한 거 아냐?”

“선한 의도와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아볼 수 있다면 충분하잖아?”

사람을 돕는 데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모 초능력자의 조언을 받아들인 전직 소방관께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서다흰은 손요운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맞아요. 괜히 날 세워서 미안해요. 저 사람이 각성한 이후로 우투리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좀, 그래서요.”

실패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즐겁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저라면 몰라도 손요운 씨까지 부르는 건 좀 이상하니까요. 찾아보니까 우투리랍시고 이용만 당하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다길래.”

오늘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 그런, 일, 안, 해요!”

“요운 오빠도 그렇게 말하니까 저도 믿을게요. 하지만 진짜 위험한 일은 아니에요?”

호칭이 아주 중구난방이군. 차라리 통일하지 그랬냐. 나름 공적인 자리라고 경칭을 하는 것 같은데 입에 붙지는 않았는지 엉망이다.

서다흰은 영 모르는 눈치길래 지적할까 하다가 말았다. 손요운이 씩 웃으며 서다흰을 보고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긴 한데, 그래서 손요운 씨를 불렀잖습니까.”

대신 나는 손요운 씨에 악센트를 주며 말했다.

“우린 이무기의 안으로 들어가서 봉인된 괴물을 잡을 생각이니까요. 오늘 씨와 서다흰 씨는 정화, 저와 손요운 씨는 괴물을 막는 역할입니다.”

“흐응. 그래요. 납득은 했어요. 그럼…….”

내가 서다흰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오늘은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미리 오늘에게 이야기를 들어 놓길 잘했다.

오늘이 꺼낸 향로는 맥의 뿔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주 오래되고, 귀중한 물품으로 이산래 팀장의 개인 소장품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건너온 건가.

지금은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맥은 악몽을 먹는다고 알려진 영물이다. 옛날에는 높으신 분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이렇게, 향로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여, 여기에, 특, 수한, 주술…… 을, 걸어서.”

이쪽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건 나나 손요운, 서다흰이 다 똑같았다. 다 같이 그냥 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들, 으셨, 어요?”

“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낮잠을 자면 된다고요?”

서다흰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오늘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기뻐 보이니 그냥 놔두자.

계획은 이렇다.

먼저 향로를 사용한다. 그다음, 잠이 든다. 세 번째, 잠을 자는 대부분의 생명체는 꿈을 꾸는 법. 이무기나 인간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꿈을 엮는다.

네 번째 단계. 오늘이 주술로 꿈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이무기의 꿈으로 곧바로 나아간다.

다섯 번째. 이무기의 꿈을 지나간다.

여섯 번째. 이무기의 세계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서양 괴물을 잡아 이무기를 깨운다.

모두 계획을 세울 때는 자신이 있는 법이다.

“좋아요. 적어도 꿈속이니까 다쳐도 일어나면 되겠죠.”

“…….”

“……안 돼요?”

“…….”

“여기서 시선을 피하면 안 되죠!”

“죽진 않을 겁니다.”

서다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됐어요. 이무기의 꿈속에서 뭘 보게 될지는 모른다고 했죠?”

“네. 원래 맥의 향로를 사용하면 악몽은 꾸지 않는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저흰 침입자라서요. 어떤 꿈이 나올지는 몰라요.”

“꾸, 꿈이, 끝, 날, 때까지…… 되… 도록, 조, 조용히, 있, 으… 면, 돼요.”

“무슨 꿈을 보든 놀라지 말고요.”

서다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하려고 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요운은 그런 서다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서다흰이 손요운을 보며 살짝 웃고 있는 게…….

정말로 서다흰이 이세빈의 연적일지도 모르겠는데.

* * *

정신이 깊게 가라앉는다. 버들의 가호를 받은 채 묵주를 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한없이 가라앉고, 부유한다.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 부스러기가 밟혔다. 깨진 건물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검은 얼룩이 곳곳에 묻은 더러운 도시였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는 부서진 서울 위에 서 있다. 서울 한복판. 시린 바람이 불었다. 이곳은 겨울이다.

가벼워야 할 겨울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제대로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텁텁한 공기다.

주위를 둘러보면 알고 있는 풍경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 뻗은, 마치 탑처럼 보이는 높은 건물과 그 뒤로 펼쳐져 있는 호수. 자동차로 가득한 도로. 건물들.

잠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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