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48. 달 세뇨의 밤(1)
“그, 저, 좀비물을 못 보는 편은 아니거든요?”
서다흰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손요운이 웃으며 서다흰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렇지만 말은 똑바로 해야죠! 이건 좀비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고어 영화도 잘 보냐고 물어봤잖아요.”
“이건 그런 종류도 아니거든요!”
“비상근무하면서 비슷한 거 많이 봤잖습니까. 왜 그렇게 놀라요?”
서다흰은 마침내 내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손요운은 친절하게 서다흰의 손가락 끝을 돌려주었다. 손가락 끝에 콘코바르의 혈색 좋은 머리가 걸렸다.
“장르가 다르잖아요!”
“말하는 머리 처음 봅니까?”
“솔직히 말하면 평생 안 보고 싶어요!”
“초능력자인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죠.”
서다흰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저런 성격이라면 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꿰차고 있을 수도 있지. 무엇보다 손요운과 친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에서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이산래가 있었을지 없었을지 확신하지 못하니 어쩌면 그 역할을 서다흰이 대신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딱히 드라마의 규칙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보통 영웅에게는 동료가 있어야 체면이 살지 않겠는가.
“이제 소개가 끝났나?”
콘코바르는 아주 예의 바르게 굴었다. 목 아래로 아무것도 없지만 않았더라면 서양에서 온 근사한 신사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 아래에는 여전히 몸이랄 것은 없었다. 대신 화려한 무늬의 스카프로 감싸서 흉측한 부위를 가리고 있었다. 아마 주하랑의 솜씨가 아니었을까.
서다흰은 마침내 현실을 받아들였다. 서다흰은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누르고 있는 손요운의 손을 털어 냈다.
“그럼 이걸 없애는 게 절 부른 이유인가요? 저는 보지도 못하고 정화밖에 못 하지만, 그런 제 눈에도 저건 보통 평범한 놈이 아닌 것 같은데…….”
“아! 아, 아뇨, 이걸, 지, 지금,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면 큰일 난다. 본래의 머리가 사라지면 이산래의 목을 노리는 머리가 몸을 차지하게 된다. 우린 그놈을 잡으려는 거지 힘을 실어 주려는 게 아니다.
“저, 그…….”
오늘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콘코바르의 아래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이, 이거…… 부터.”
서다흰은 콘코바르를 경계하면서 오늘에게 받은 종이를 확인했다. 손요운은 말하는 머리는 놀랍지도 않은지 평온한 안색이었다.
“……각서?”
서다흰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그동안 손요운은 오늘에게서 볼펜을 받아 서류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서다흰이 급하게 막지 않았더라면 단숨에 서명을 끝냈을 것이다.
“요운 씨, 미쳤어?”
“응?”
“뭘 믿고 여기에 사인하려는 거야?”
“아니, 이분들은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 눈깔을 파 버리든지 해야지!”
손요운에게 거칠게 쏘아붙인 서다흰은 목표를 바꿨다.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지며 오늘을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본인 책임이라고요? 저희 정부 요청으로 온 거 아니었나요? 그런데 이런 각서에 사인하라니, 말도 안 되죠, 이건.”
“어…….”
오늘은 울상을 지었다.
“저기요, 그런 얼굴을 해도.”
“아, 아뇨, 자, 잘못, 드렸어요……. 죄, 죄송해요, 여기, 여기에, 사, 사인, 해, 주세요…….”
오늘은 허둥거리며 다른 종이를 찾아 내밀었다.
서다흰은 까다로운 얼굴로 종이를 훑어보았다.
“기밀유지서약서네요?”
“네, 네…….”
“혹시 불법적인 일이라거나, 두 분의 사적인 일에 동원되는 건 아니죠?”
“…….”
어떻게 보면 사적인 일이지만 이산래는 엄연히 특수과 팀장이다. 불행한 사고로 휴직한 공무원을 도우려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나라를 위한 일이다. 물론 이산래가 팀장이 되는 데에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을 수는 있지만 그건 우리 책임이 아니다.
오늘과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하나 더. 방송사에서 촬영 오거나 하는 일도 아니죠?”
좀 더 얌전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역시 배우의 이미지로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
생각해 보면 저렇게 확인하는 게 당연하다. 정부의 일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사인을 하고 다니면 안 되지. 초능력자는 돈도 안 되고 몸은 축나는데 욕먹기 좋은 직업이다.
손요운을 흘깃 보았다. 이런 환경도 오로지 저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과연 손요운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흰 씨는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많이 시달렸거든요.”
손요운은 내가 자신을 바라본 이유를 서다흰 때문이라 여겼는지 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몇 년 전에 정치인 비리 때문에 고생을 좀 해서.”
“서다흰 씨도 거기에 엮였습니까?”
“엮였다고 해야 하나, 이걸……. 괜히 더불어서 한 것도 없는데 고생만 했다고 들었거든요.”
“쌓인 게 좀 많나 본데요.”
“감사 때문에 골치가 많이 아팠다던데.”
“감사요?”
손요운은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셨습니까? 다흰 씨네 아버지는 북천 센터 대표님이십니다.”
“……아하.”
과연 ‘이곳’의 주인공 일행답다. 하나같이 평범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손요운과 대화하는 동안 서다흰은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 대화는 녹음했으니까 나중에 다른 소리 하기 없기예요.”
“네…….”
오늘은 벌써부터 기진맥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제야 서다흰은 만족했는지 기밀유지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손요운도 서다흰 다음으로 서명했다.
서다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높아졌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면 저희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기밀유지서약서에 서명을 시키는 일이 평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지 조금 기합이 들어간 모습이다.
나는 서다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이무기를 깨우러 갑니다.”
* * *
한반도에 남아 있는 용은 단 하나. 잠실 타워에 있는 청룡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전에 목포에서 다리화가 승천하였지만 그건 예외로 두자.
뱀은 많지만 용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이무기의 수는 지극히 적다. 그 몇 안 되는 이무기들도 박서원과 여우, 쌍둥이들이 발견하는 족족 씨를 말리고 있었다. 이무기 중에서도 여의주를 만들 만큼 오래된 이들은 잡아먹었고, 아닌 것들은 죽여서 업을 쌓았다.
그런 와중에 청룡의 아들인 이산예는 가장 어린 이무기임과 동시에 용에 가장 가까운 이무기이기도 했다. 핏줄이 중요한 건 영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무기요?”
악마가 이산예를 죽이기 위해 도끼를 든 사내와 계약까지 한 걸 보면 이산예의 죽음은 이 세계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기둥이 된 청룡도 황급히 나타나 구해 주었던 거겠지. 물론 그 이유에는 이산예가 아들이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네. 이무기보다는 어린 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어린…… 잠깐만요, 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서다흰은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이해가 안 가도 괜찮습니다.”
사실 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산예는 ‘나’를 도우려고 한다. 그것만큼은 진실이다. 이 팍팍한 세상의 몇 안 되는 아군이다. 그러니 나도 도와줘야겠지. 아동착취에 걸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꼭 이런 은혜 갚기가 아니더라도, 마지막 순간이 오면 이산예의 힘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막내아들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는 청룡의 힘이 목적이다.
서다흰은 다시 머리가 아픈 표정을 지었다.
“이무기고 어린 용이고 나발이고. 그게 어디 있는 줄 알고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오늘의 집에 있었다.
지금은 오늘의 책상 아래에 둔 케이지 안에 있다.
“설마 그게 어디 있는지 찾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까.”
내 말에 오늘은 뿌듯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숙였던 허리를 들었을 때 손에 케이지가 들려 있다. 요즘 케이지는 잘 나오더라. 플라스틱 케이지도 아니고 꽤 아늑해 보인다. 적어도 이산예는 그렇게 여겨 줬으면 한다.
손요운과 서다흰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하다.
“이, 이무기, 예요.”
케이지 바닥에 분홍색 담요가 깔려 있다. 야근에 치여 사는 것보다는 보드라운 담요를 덮고 하루 종일 자는 편이 더 행복할 것이다. 정말 이산예를 깨우는 게 옳은 선택일까? 이산예는 지금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서다흰은 지하철에서 마주친 약장수를 보는 얼굴이 되었다.
“이무기라고요?”
“아, 안, 물, 어요…….”
장담하는데 서다흰이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닐 거다.
“……이무기라고요?”
서다흰은 다시 한번 물었다. 과거의 나를 보는 기분이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얌전, 하고.”
“……이무기라고요?”
“음, 똑, 똑…… 할, 걸요?”
오늘은 그게 한때 자신의 상사라는 걸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닐까? 가정사로 휴가 중이기는 해도 아직 상사일 텐데.
“저기, 팀장님? 팀장 대리님?”
“아, 그, 그냥, 이름, 부, 불러 주세요…….”
“……오늘 씨, 저 케이지 안에 든 게 이무기라고요?”
“네, 네.”
“진짜 이무기라고요?”
서다흰은 고장 난 인형처럼 물었다.
나는 그런 서다흰을 위해 케이지를 열었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하얀 털 뭉치가 나왔다. 사자탈을 작게 줄여 놓은 듯한 생김새다. 꼬리는 길고, 머리에는 작게 뿔이 돋아나 있긴 했지만. 얼핏 보면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다흰은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좀 이상하게 생긴 고양이가 아니라요?”
“아냐.”
여태 조용히 있던 손요운이 서다흰의 의문을 종식시켰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새끼 사자를 훑어보았다.
“……이런 분을 케이지에 넣어 놔도 괜찮은 겁니까?”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비싼 담요도 사서 깔아 줬다. 이만하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지.
“원래 해준 씨와 알던 분입니까?”
“저와도 알고, 오늘 씨와도 알던 사이죠.”
“그럼 어쩌다 이렇게 주무시고 계신지……?”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이분을 깨우는 데 저희가 필요하다는 거죠?”
“네…….”
오늘은 대답을 하면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책상 위에 둔 잡동사니를 싹 밀고 서랍에서 꺼낸 초를 케이지 주위에 세웠다. 그리고 빈 커피상자를 케이지 앞에 눕혔다.
이게 그, 간이 사당인가?
오늘은 손요운과 서다흰에게 사탕 하나씩을 주었다. 나에게도 사탕 하나가 할당되었다.
“저, 따라, 하세요.”
오늘은 커피상자 위에 사탕을 올리고, 세 번 절을 했다. 손요운은 곧잘 따라 했고, 서다흰도 어색하게나마 따라 했다. 나까지 인사를 끝내고 나자 서다흰은 흠, 하고 깊게 숨을 들이셨다 내쉬었다.
“그으래서, 이분은 어떻게 깨우는 건가요? 뭔가 하기 전에 제대로 된 설명은 해 줘야지요.”
옳으신 말씀이다.
“이 새끼 사자가 일어나지 못하는 건 몸속에 괴물을 봉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인을 하긴 했는데 그놈을 막다가 부상을 입었거든요.”
“지, 지금은, 회, 회복, 중, 이세요.”
“하지만 괴물을 몸속에 봉인하고 있는 이상 눈을 뜨긴 힘들다는 게 오늘 씨가 내린 결론입니다.”
언젠가 회복하기는 할 거다. 언젠가는.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그, 그래서, 저희는…… 아, 안으로, 들어, 갈, 생각이에요.”
“……안으로요?”
“보주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는 이무기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거든요. 달팽이집 같은 겁니다. 침입을 막고, 이무기가 성숙해질수록 세계도 깊고 강해집니다.”
서다흰은 눈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무기의 생태에 대해서 강의해 주지 않아도 돼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나요?”
오늘은 서랍 안쪽에서 작은 향로를 꺼냈다.
“꾸, 꿈, 속으로, 들어, 갈, 거예요.”
“꿈이요?”
“네, 네……. 거, 거기서, 이무기의, 세, 세계로, 넘, 어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