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47. 낭만주의자의 포도송이(6)
“요괴와 영물과 초능력이 없는 세계. 해준 씨는 왜 그곳을 찾기로 마음먹었는가?”
여태까지 구민석이 보여 왔던 가벼운 태도는 없다. 그래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난 해준 씨가 그 세계를 찾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네.”
“……그건 가족이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으니까요.”
이건 ‘정해준’의 이유다. 난쟁이에게 정해준이 빌고자 했던 소원. 능력의 대가로 그리움을 바쳤지만, 이 소원의 대가는 ‘정해준’이 바로 지불할 수가 없었다. 여의주, 혹은 그에 버금가는 물건을 모으기 위해 난쟁이에게 유예를 받았었다.
“그건 해준 씨의 소망일 뿐이잖나. 나는 근거를 원하네.”
“…….”
구민석이 부인을 잃은 것이 약 사십여 년 전.
사십 년이란 세월은 인간에게는 반평생이나 다름없는 긴 시간이다. 강산이 바뀌고, 욱리의 말에 의하면 현대에서는 있던 산이 없어지고 없던 산이 생기는 걸 네 번이나 반복하는 시간.
그 세월은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지만, 인간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영물들에게도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구민석은 그동안 취해 왔던 얄밉도록 장난스러운 모습을 지우고 처음으로 본모습을 보였다.
“인간은 두 눈으로 본 것만 믿는 경향이 있지. 해준 씨도 무언가 본 것이 있어서 확신한 것 아닌가?”
여우의 눈이 깊어졌다. 청룡의 눈과 닮아 있다. 오래 산 이들의 눈이다.
구민석의 나이를 들은 적은 없다. 여우일 때의 본명도 들은 적 없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인간의 몸 안에 들어간 여우는 유일하게 꼬리 아홉 개를 가진 오래된 여우다. 작매를 어린애 취급하고, 인간의 회사를 운영할 정도로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여우라면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회장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
구민석은 순순히 인정했다.
“해준 씨가 어떤 대답을 들려주든 난 내가 한 짓을 돌이킬 생각이 없네. 여기까지 와서 내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어떡하기는요. 죗값을 치러야지요.”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사를 휘저은 대가.
본인도 생각해 두고 있다며? 박서원을 과거로 보낸 다음 치를 생각이랬다.
“그래. 그렇지.”
구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태 내가 해 온 길을 돌아갈 생각이 없네. 그건 서원 씨에게도 못 할 짓이지. 이번 대의 우투리에게도 그렇고.”
아주 염치없는 놈은 아니었구나 싶어졌다.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은 의미가 다른 법이니.
어느 쪽이 더 죄질이 나쁜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물론 양쪽 모두 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구민석은 나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말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해낼 것이네.”
…산함박을 잡고 박서원 씨를 과거로 보내는 일을?
그 결과로 ‘드라마’의 15화가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걸 생각하면 농담으로라도 응원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말린다고 멈출 일이었으면 진작 멈췄을 것이고.
포부는 잘 알겠으나 이건 구민석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 대답은 더 필요 없을 텐데요.”
구민석은 낮게 웃으며 지적했다.
“그렇게 말하면 보았다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는 거, 알고 있지?”
나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여우의 참 거짓 판별법의 규칙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상 어차피 이 질문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말을 돌리더라도 이렇게, 반대로 대답한 꼴이 되어 버리니까.
구민석은 차분하게 말했다.
“돌이킬 수 없다 하더라도, 확인하고 마는 건 인간만이 아니네.”
“…….”
“때로는 확인하였기에 안도할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지.”
누군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면 여우는 기꺼이 대답할 것이다.
과연 그게 즐거워서 한 행동일까? 이야기하길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인가?
그의 가족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준 씨에게 그 말을 들은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네.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어.”
구민석과 박서원.
그들은 복수를 목적으로 모였다. 그렇다면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복수심일까? 가족을 죽인 뱀에 대한 분노?
……결국 이 두 사람은 ‘정해준’과도 닮았다.
“요괴와 영물, 초능력이 없는 세계에서 내 부인과 아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자신의 운명을, 삶을 내어 주면서까지 복수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 그 바탕에는 그리움이 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한 남편과, 아들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는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숨을 거두었을까. 아니면 꼬리가 하나인 작은 여우로 태어나 산을 누볐을까.”
자신이 가져 본 적 없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구민석이 온전히 여우로 있었던 시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음울한 얼굴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운명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에 대해 말하는 구민석은 청룡과 같은 영물보다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라면 불필요한 일 아닙니까?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텐데요.”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재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못 먹는 감은 보지 않는 게 정신에 이롭지요.”
“못 먹는 감은 찔러나 봐야지.”
“……어디까지 분탕질 치려고요?”
구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 손댈 생각은 없네.”
“정말입니까?”
“손댈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눈을 가늘게 뜨고 구민석을 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잠깐 바라보는 것뿐이지.”
구민석의 눈이 알 수 없는 빛으로 번들거렸다. 복수심에 물든 광기도 아니고, 슬픔에 젖은 그리움도 아니다.
애수와 회한이 뒤섞인, 지극히 인간과 닮아 있는 눈.
“내 가족이 살아 있는 세계를 확신하고 싶을 뿐이네.”
오늘이 생각났다. 그녀도 내게 비슷한 말을 했다. 가족이 무사한지 확인해 달라고.
“……그거 하나 확인하는데 조카 눈을 피해야 합니까?”
“아영이라면.”
구민석은 쓰게 웃었다.
“다 집어치우고 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발악할지도 모르니까.”
“…….”
“차라리 처음부터 그걸 목표로 잡았으면 모를까, 지금에서야 그럴 순 없지.”
“다시 얘기가 돌아오는데, 그럼 모르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과거의 산함박을 죽이면 필요 없는 일이잖습니까. 반쯤 확신하고 있어도 지금은 그냥 모르는 채로 두는 쪽이 나을….”
“해준 씨.”
구민석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해준 씨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구민석은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우리는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냐.”
“……그게 아니라고요?”
“현재를 바꾸기 위해서였다면 산함박을 죽이는 것에 이렇게 목을 맬 이유가 없지.”
“산함박의 구슬을 노리는 게 아니었습니까?”
“물론 그 이유도 있긴 하지. 하지만 그건 물량으로 승부 해도 되는 일이네. 시간이야 좀 더 걸리겠지만 굳이 산함박을 건드리는 위험한 길을 걸을 필요는 없지.”
“그럼요?”
구민석은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서원 씨가 과거로 돌아가서 산함박을 죽인다. 이건 현재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아니네.”
재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슬쩍 걸렸다.
“그 시점으로부터 산함박이 죽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드라마’의 악당은 내 예상을 훨씬 웃도는 발언을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해준 씨가 이곳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이른바 모두가 무사한 평행 세계를 보았다면. 우리의 계획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지 않겠나.”
* * *
결국 나는 구민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민석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구민석의 말대로,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었다.
‘해준 씨가 바라는 곳에서는 내 가족들도 모두 무사했으면 좋겠군.’
그렇게 덧붙이는 걸 보아 구민석이 어떤 답을 얻었는지는 뻔했다.
그러나 동시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에 대해 말하는 구민석의 슬픔이 거짓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만큼 구민석도 필사적인 것이다.
‘정해준’이 난쟁이에게 그리움을 바치고 악마에게 영혼을 줄 만큼.
박서원이 감당하지 못할 업을 몸에 쌓을 만큼.
구민석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도달하려는 곳이 어떤 곳이든 간에.
“안녕하세요.”
서다흰은 손요운과 함께 박물관에 있는 특수과 건물에 나타났다.
서다흰과는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뿐이다. 딱히 마주칠 일도 별로 없었고.
서다흰과 일이 겹치지 않는 건 손요운도 마찬가지일 텐데 두 사람은 꽤 친한 사이로 보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친구일지 그 이상일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게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이세빈과 서다흰은 라이벌 포지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이세빈은 서다흰을 연적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말고.
“아, 안녕, 하세요. 이, 형상수색… 팀장, 대, 리, 오늘… 이라고, 하, 합니다…….”
“초능력자 서다흰이라고 합니다.”
“손요운입니다.”
서다흰과 손요운이 차례대로 오늘과 악수를 나누었다.
“저 각성한 초기를 제외하면 특수과에서 협업 요청이 온 적이 없어서 이번에 깜짝 놀랐어요.”
서다흰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잘못은 없지만 묘하게 찔리는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는 오늘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 그으…….”
잘못이 있다면 팀장 이산래에게 있다. 인간도 아니면서 10년 동안 특수과에서 너무 열심히 일했다. 인간도 아니니까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산래는 자신이 없을 때의 대책도 세워 놓았다. 이게 이산래의 준비성이 철저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일어났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대비를 해 놓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 어쨌든, 자, 잘, 부탁, 드립니다…….”
오늘은 설명을 얼버무렸다. 어차피 자세한 속사정을 아는 건 나와 오늘밖에 없으니 현명한 선택이다.
서다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었다.
“그런데 요운 씨는 무슨 일로 같이 부른 건가요? 요운 씨에게는 공문이 내려오지도 않았던데.”
서다흰의 말에 오늘과 눈을 마주쳤다.
요 며칠 동안 컨디션이 좋은지 목만 남은 서양 요괴는 중세 아일랜드 언어로 출처를 알 수 없는 노래를 불러 댔다고 했다.
나는 입을 우물거리는 오늘을 대신해서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혹시 고어 영화 잘 보십니까?”
“네?”
서다흰과 손요운은 동시에 되물었다.
“요운 씨야 비상근무 때 이것저것 하시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 서다흰도 현장을 정화하기 위해 요괴 사체를 본다. 둘 다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괜찮겠죠.”
“아니, 잠깐만요. 갑자기 엄청 불안해지는데, 좀 더 제대로 설명을 해 주시죠?”
서다흰이 뾰족하게 말했다.
설명. 설명이라…….
“별거 아닙니다. 그냥 평소 비상근무와 비슷한 겁니다.”
“……정말요?”
“솔직히 기분 나쁜 걸로 따지면 거대 지네 쪽이 더 끔찍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이건 진짜다.
그러니까 그렇게 못 미더운 눈으로 보지 않아 줬으면 한다.
“아, 그렇지.”
그래도 대뜸 머리만 남은 놈을 내미는 게 예의는 아닐 것 같아서 설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두 분 혹시 좀비물은 안 좋아하십니까?”
틀린 설명은 아니잖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