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74화 (174/202)

# 174

47. 낭만주의자의 포도송이(5)

구민석은 자신의 제안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당당하게 굴었다. 역시 대한민국에서 회사를 꾸리려면 그 정도의 뻔뻔함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불공정 거래의 표본이건만.

솔직히 여우가 하는 게 뭐가 있는가. 기껏해야 까치를 불러 주는 게 전부이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까치가 힘낼 일이고, 두꺼비와 이야기하는 것도 까치의 몫이다. 나도 전화번호만 멀쩡히 남아 있었으면 구민석 따위에게 연락 안 했다.

그런데 조건?

모르긴 몰라도 구민석은 악마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구민석도 찬송가 틀어 주면 좋아서 몸을 뒤틀지 않을까?

“어떤가?”

젠장.

“조카한테까지 비밀이라니. 얼마나 떳떳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다닌 겁니까?”

“음. 거기서 그런 지적인가? 내 도움이 필요 없다는 소리지?”

“그건 아니고요.”

임상규를 한 번 봤다. 그리고 저지선 너머로 상황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초능력자들이야 튀어나온 요괴를 처리하고 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임상규를 비롯한 요괴대책팀은 사후처리까지 해내야 한다. 요괴뿐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온갖 행태 또한 보게 된다.

그게 어떠한 사명감 같은 거 없이, 설사 단순히 월급쟁이로서의 업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걸 모르는 척 지나가기에는 양심이 아팠다. 나는 악마나 여우, 박서원 같은 놈이 아니니까.

그리고 뭘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단순한 이야기지 않은가. 대화를 하는 건 어렵지 않다. 구민석이 조카의 눈치를 본 건 좀 의외였지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차라리 알아 두는 편이 마음 편하다.

“좋습니다.”

구민석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럼 까치에게는 연락해 두겠네. 위치가 어디지?”

“대기업의 정보력으로도 그것까지는 모르나 봅니다?”

“물론 알아내고자 하면 할 수 있지만 자네에게 들을 수 있는데 힘쓸 필요는 없지 않겠나.”

구민석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시간은 언제로?”

“구태여 시간 끌 게 있나? 바쁜 일 없다면 일이 끝나면 바로 이야기하도록 하지. 마침 아영이도 출장이고.”

왠지 그 출장이 박서원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죠. 그럼 까치나 확실하게 불러 주시죠.”

“걱정 말게. 난 내가 말한 건 지켜.”

“올 초에 단청이 소송으로 시끄러웠던 같은데……. 뭐라더라, 신제품 스펙이.”

뚝.

구민석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 * *

작은 새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까악, 하는 게 까마귀 우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새의 크기는 까마귀보다 훨씬 작았지만.

두꺼비를 설득하다 말고 지쳐서 쉬고 있던 임상규의 발치에 새끼 까치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종종거리며 걷는다. 아직 솜털이 부숭부숭하게 나 있는 새끼였다.

“……?”

임상규는 물을 마시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까치는 병아리 울음소리인지, 까치 울음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어?!”

임상규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복건을 쓴 남자아이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공사장을 정리하고 있는 두꺼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옥섬 선생님, 옥섬 선생님.”

“개굴?”

“저 욱리예요. 집 지으시는 거 잠깐만 멈춰 주실 수 있으신가요?”

“개굴…….”

“네, 할아버지가 말씀하셔서 왔어요. 요즘엔 이렇게 집을 지으면 헌 집 구하기 힘들 거라고 하시던데요?”

“개굴?! 개굴개굴?”

“그게 언제 적 얘기에요. 옛날에도 10년이면 강산도 바뀌었잖아요. 요즘엔 더해요. 10년이면 있던 산도 없어지고 없던 산이 생기더라니까요?”

지하국에서 우리와 있을 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까치로 있었는데 지금은 바로 인간으로 변하더니 두꺼비에게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였다.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졌다.

내가 저 새끼 까치에게 바쳤던 고구마 말랭이가 얼마나 많았는데.

물론 내가 만든 건 아니었지만.

“네. 집을 만드는 건 좋지만, 이 시대의 인간들은 자기 집에서 살지 않는 경우도 엄청 많아요.”

“개굴??”

“그러니까… 갑동이라는 인간의 집에 을동이라는 인간이 사는 거예요. 가족도 아니고, 생판 남인 사이인 거죠. 을동이는 갑동이네 집에서 사는 대신에 갑동에에게 돈을 지불하고요.”

까치는 두꺼비에게 월세와 보증금, 전세 제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작매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말하는 건 어른스럽다. 그게 기이한 조화를 자아냈다.

임상규를 비롯해서 다른 초능력자들은 반쯤 넋이 나간 채 그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구경했다. 임상규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진 몰라도 까치가 두꺼비를 설득하기 위해 날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탓이다.

반면 한평원은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휴대폰이 고장 났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박서원의 연락처를 받아 가고, 내가 전화를 하는 모습도 보았다. 박서원은 전화를 받진 않았지만 그러고 날아온 게 저 까치. 의심하려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나도 그걸 몰라서 행동한 것도 아니고.

나는 늘 그랬듯 모르는 척했다.

“요운 씨.”

이 틈을 타서 할 일도 있었고.

“네?”

손요운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내게 답했다. 내 손에 호리병이나 플라스크가 있었더라면 손요운은 틀림없이 봉인되었을 것이다.

여우가 어떤 비밀스러운 힘으로 이곳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 사실은 조금 전 통화로 확인했다. 본인 말대로 바쁘신 분이 이런 자잘 자잘한 일까지 신경 쓰긴 힘들겠지.

어쨌든 덕분에 잘 되었다. 손요운, 우투리의 힘을 빌리자. 하지만 대뜸 힘을 빌려달라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까.

“힘을, 시험해 보지 않겠습니까?”

“……네?”

이것도 이상하게 들린다. 만화에서 초반에 주인공이 수상하게 생긴 엑스트라에게 들을 만한 말이다. 그런 조연의 운명은 보통 둘. 끝까지 남아서 해설자가 되거나 사실은 최종보스의 부하가…….

실수다.

“아니,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그게 아니라요.”

“네.”

“손요운 씨 힘이 좀 특수한 거잖습니까.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런가요.”

말을 할수록 이게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손요운은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나도 내가 잘못 말했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굳이 이렇게 수상쩍게 돌려 말할 필요는 없는데.

손요운한테 통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요.”

손요운은 즉답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입니까?”

“아마도요.”

오늘이 서다흰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서다흰 씨도 같이…….”

“다흰이와요? 네, 뭐. 시간만 맞으면 괜찮습니다만….”

손요운은 내가 뭘 도와달라고 하는지도 묻지 않고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도 안 될 놈일세.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한테는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불법적인 일은 아니죠?”

걱정하는 게 그것뿐이야? 정말 안 될 놈일세…….

내가 떨떠름한 눈으로 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손요운은 태연하게 말했다.

“해준 씨라면 믿을 수 있죠.”

안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원래 이런 놈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한평원과 놀더니 안 좋은 것만 배웠나.

손요운은 심각해진 내 얼굴을 보더니 씩 웃으며 자기 눈을 툭 가리켰다. 평범한 검은 눈이 순간적으로 찬란한 빛에 휘감겨 반짝였다.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기 아냐?

* * *

“아이고, 까치님, 정말 감사합니다!”

임상규는 자기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욱리에게 거의 절을 할 기세로 매달렸다. 욱리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딱히 인간들을 도우려던 건 아니고, 옥섬 선생님이 인간들에게 해코지당할까 봐 온 겁니다!”

새끼 까치를 둘러싼 인간들의 표정이 따스하게 풀어졌다. 욱리는 솔직하게 말했겠지. 그걸 인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뭐, 알 바 아니다.

두꺼비 옥섬은 현대 사회의 부동산 제도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어쩐지 축 늘어진 채 터덜터덜 돌아갔다. 작은 까치는 날개를 파닥여 두꺼비의 머리에 앉았다. 짹짹 지저귀는 소리가 평화롭다. 인류의 한 방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럼 어떻게 도와드리면 됩니까?”

현장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손요운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인간의 영웅께서는 어쩐지 조금 즐거워 보였다.

“당장은 아니고요, 특수과 일이거든요.”

“특수과요?”

오늘과 이야기 나누었던 걸 되새겼다.

“조만간 서다흰 씨에게 공문이 갈 겁니다.”

“특수과에서는 다흰이 능력이 그다지 필요 없다고 들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습니까?”

“네. 명목이 그거긴 한데, 실제로도 서다흰 씨 능력이 필요하긴 합니다. 요운 씨에게는 공문이 가진 않겠지만 같이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간의 영웅께서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보면서 과연 손요운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니, 손요운이 어디까지 아는 편이 좋을까?

구민석과 박서원이 손요운을 산함박잡이에 써먹으려는 건 분명하다. 손요운 하나라면 힘들지 몰라도 우투리에게는 장군님만 바라보는 병사들이 있다. 그들은 장군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랐지만, 손요운이 부르면 곧장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손요운도 산함박이 서울을 노리는 상황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부를 것이다.

“그리고 요운 씨가 알아 두면 좋은 이야기도 있고요.”

“그래요?”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닐 수 있지만요.”

손요운의 운명이 타인에 의해 멋대로 휘둘려도 괜찮은가? 그 정도로 값어치가 없는 운명인가?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의 운명이란 모두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사(人間史)인 법이다.

비록 일어난 일은 다시 한번 일어나도록 되어 있더라도.

나는 손요운의 얼굴을 떠올리며 여우에게 말했다.

“회장님은 천벌 받을 겁니다.”

“보자마자 그런 욕설이라니. 그동안 잘 지냈나, 해준 씨?”

구민석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요청한 대로 까치도 보내 줬네. 일은 잘 해결됐지?”

그랬으니까 내가 저 재수 없는 얼굴을 보러 왔지. 아니었으면 고소했다.

“그런 일에는 작매가 안성맞춤인데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대타를 보냈지. 인간을 안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두꺼비가 관련된 일이니 짜증은 내도 잘 처리했을 걸세.”

“사람들이 인사하는 걸 다 무시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일만 잘하면 됐지.”

구민석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애가 아직 어려서 그래. 귀하게 자라서 버릇도 없고.”

“어린애들이 다 그렇죠.”

“그렇지? 인간으로 치면 중학생이 될까 말까 한 나이니.”

“……생긴 것과는 나이가 다른가 봅니다?”

“까치들은 많이 동안이거든.”

그게 동안으로 설명해도 될 정도인가?

아니… 되었다. 애초에 천오백 살 가까이 되는 청룡도 겉보기에는 정정한 할아버지잖아. 까치가 동안일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래서 본론이 뭡니까? 이런 얘길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그렇지.”

구민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건 아니고.”

보통 저렇게 시작하면 별거인 법이다.

“개인적으로 해준 씨에게 궁금한 점이 생겨서 그렇네.”

“왜 지난번에는 묻지 않고요?”

“아영이가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다?”

“아영이는 말야.”

구민석은 조카의 이름을 다정하게 말했다.

“내 누님의 딸이지. 어렸을 때 누님과 매형이 죽고, 혼자가 된 아영이를 나와 부인이 거둬들이게 됐어.”

“그……. 네. 안타까운 일이군요.”

“조카이기는 해도 거의 딸 같은 아이지. 아영이에게도 마찬가지일 거야. 특히 부인과 아영이는 사이가 좋았거든.”

구민석은 쓰게 웃었다.

“그래서 부인이 죽었을 때, 아영이는 나보다도 더 화를 냈어. 그 뒤로 동생같이 여기던 아이마저 허무하게 잃은 뒤로 아영이는…….”

구민석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구민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 나는 그 아이 앞에서는 물을 수 없어.”

“그런데도 꼭 물어야겠고요?”

“그래. 나는 확인해야겠거든.”

구민석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해준 씨. 저번에 병원에서 해준 씨가 말했었지.”

뭘 말했더라.

“영물도 요괴도, 초능력도 없는 세계를 찾고 있다고.”

“…네.”

“어떻게 그 세계를 찾기로 마음먹었나?”

“…….”

“자넨 확신하고 있었어. 그런 세계가 있다고. 의심하지도 않았잖나.”

그거야 나는 그 세계에서 왔으니까.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고 확신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

구민석은 다리를 꼬지도 않고, 장난스럽게 웃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치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해준 씨는 혹시 그 세계를 엿본 적이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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