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73화 (173/202)

#173

47. 낭만주의자의 포도송이(4)

‘일어난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

악마는 플라스크 구석에서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중간에 오늘과 콘코바르를 만났을 때를 잠깐 제외하면, 약 98시간을 내리 찬송가를 듣고 난 뒤였다. 현대문물을 찬양하여라. 과학은 인간이 손쉽게 악마를 엿 먹일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의 승리다.

결국 이야기할 거였다면 괜히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진작 입을 열면 오죽 좋은가? 나도 귀찮고 본인도 찬송가 듣는 걸로 힘들어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난쟁이에게 고객을 다 빼앗기지.

“저기, 자기야?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하는 게 예의 아니니?”

사람 귀찮게 하는 의미로 악마라면 악마가 맞긴 했다. 사실은 저거 찬송가 좋아하는 거 아냐?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소리를 할 수 있어?”

원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그렇게 똑똑해 보이진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 이해하자.

“자기야, 날 어떻게 생각하든지 다 괜찮은데 속으로 생각해 달라니까?”

뭐라는 거야. 당연히 들으라고 말하는 건데.

“자기, 성격 너무 나쁘다!”

* * *

전화번호부가 날아간 건 좀 귀찮은 일이었다. 덕분에 전화번호를 다시 묻고 다녀야 하는 건 좀 많이 귀찮은 일이다.

백성찬보다는 한평원이 손요운과 더 친하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한평원의 번호를 물으려면 백성찬에게 연락해야 했고, 그러려면 그냥 백성찬에게 손요운의 번호를 물으면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백성찬의 번호도 다시 저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결과적으로 임상규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은 오지 않았다.

왜? 임상규가 먼저 전화했으니까.

“해준 씨, 바로 움직여 주세요.”

어쩌겠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초능력자의 운명을.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에 ‘정해준’이 초능력자 등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현장에 가니 손요운이 있었다. 손요운, 한평원, 백성찬, 기타 등등. 다 거기서 거기인 익숙한 얼굴들이다. 이번엔 또 뭐가 나타난 거지.

임상규가 딱딱한 목소리로 연락한 것에 비해 다들 긴장감 없는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해준 씨.”

그 와중에 우리의 귀하신 우투리께서는 나를 보고선 손수 맞이하셨다.

“잘 지냈습니까?”

“저야, 뭐. 다치기도 힘든 몸이니까요.”

손요운은 순박한 얼굴로 웃었다. 저 얼굴이 괴물을 상대할 때는 얼마나 살벌해질 수 있는지는 익히 보아 왔다.

과연 우투리는 산함박을 상대로 얼마나 분투할까. 지하국에서 보았던 곡식 병사들을 꺼낸다면 산함박을 상대로도 승산이 있을까? 여우는 기대를 걸고 있긴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볼일은 다른 데에 있었지만 지금 바로 꺼내기는 어수선한 상황이다. 일을 끝내고 슬쩍 이야기를 나눠 보자.

이번에는 제발 귀찮은 일이 아니길.

오늘 집을 나설 때 악마가 멋대로 축복을 주었다. 플라스크 안에 있어서 힘도 못 쓰겠지만 기분은 굉장히 더럽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노래를 틀어 주었다.

나는 딱히 종교를 가진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찬송가도 엄청 다양했다. 악마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손요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두꺼비가 농성 중이랍니다.”

음. 그렇지. 이곳은 두꺼비가 농성도…….

“네?”

“새집을 짓겠다고 농성 중이더라고요.”

“그…….”

“공사장 하나를 점거해서 새집을 짓고 있어서 신고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헌 집을 준다고 해도 새집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거절 중입니다.”

“…….”

그거, 노래 가사였던 것 같은데.

속담도 현실이 되는 세상이니 전래 동요가 현실이 되어도 이상할 건 없다. 집에 찬송가 듣는 악마가 있는데도 난 아직 이 세상이 내게 이런 시련을 줄 때마다 낯설어진다.

“두꺼비가 집을 지을 수 있긴 합니까?”

그에 대한 답변은 지나가던 임상규에게서 들려왔다. 임상규는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뭐. 다 때려 부수고 모래에 물을 부어 만드는 진흙 집도 집이긴 하니까요.”

업무에 허덕이는 건 특수과뿐만이 아니었다.

* * *

두꺼비의 농성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확성기를 든 임상규가 두꺼비를 향해 온갖 다양한 헌 집을 제공하겠다는 말을 절절하게 퍼부었지만 두꺼비는 고집이 셌다.

“두꺼비님, 두꺼비님이 나오시기 편하게 더운 공기를 식혀 줄 이도 있습니다.”

이건 한평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새집을 만들어 주시지는 건 감사한 일인데, 여기 말고 다른 장소는 어떻습니까?”

쿵!

“개굴!”

공사장 안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우렁찬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임상규는 서글픈 얼굴로 공사장을 바라보았다.

“강제로 끌어내는 건 힘듭니까?”

더위를 피해 한평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초능력자 중 하나가 물었다. 임상규의 얼굴이 더욱 서글퍼졌다.

“그건 최후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시멘트를 맨손으로 부수는 두꺼비를 상대하고 싶습니까?”

뭘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고 있지.

초능력자들이 아우성쳤다.

“쟤보다 광화문에서 나온 놈이 더 무서웠거든요, 팀장님!”

“지네보다는 두꺼비가 낫죠!”

임 팀장은 정색했다.

“그래서 두꺼비 잡고 싶다고요?”

물론 초능력자들도 태도를 돌변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평화롭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제일이죠.”

하지만 두꺼비는 임상규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평소라면 이쯤 되면 퇴치를 시도했던 것 같은데 임상규는 다시 확성기를 붙들고 애절하게 두꺼비를 부르짖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뒷이야기가 있나 싶어서 휴대폰으로 검색해 봐도 나오는 이야기는 별거 없었다. 그나마 봐 줄 만한 이야기도 헌 집 두꺼비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40년도 더 된 일이고, 공해가 심해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뿐이다.

“형, 형은 뭐 아는 거 없어요?”

한평원은 백성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능력상 겨울 동안은 쓸모없는 백성찬은 새날에서 소일거리로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곤 했다. 소일거리인지 차출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 말로는 그렇다 하니 그렇다 해 주자.

“야, 나도 요괴 쪽은 잘 모르거든?”

“형네 집에 요괴 관련 고문서 많은 거 알아요. 뭐 봤던 거 없어요?”

“그게 내 집이냐? 우리 아빠 집이지.”

“아, 어쨌든요. 몰라요?”

초능력자들의 시선이 백성찬으로 쏠렸다. 백성찬은 잔뜩 젠체하며 입을 열었다.

“두꺼비는 새집을 만들고 헌 집과 바꿀 때 집들이 선물을 주거든.”

“집들이 선물요?”

“그게, 좀 비싸.”

한평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비싸다고요?”

“금 조각이나, 진주 같은 거. 어디서 가져오는진 모르겠지만 꽤 값진 걸 많이 준다 하더라고.”

굉장히 친절한 두꺼비였다. 두꺼비에게 헌 집을 주고 새집을 달라는 그 노래는 우리 민족의 간절한 인생 한 방의 꿈이 깃든 염원 아니었을까.

“아, 그럼 제비 박씨랑 비슷한 상황이네요?”

“꽁으로 생기는 돈은 누구나 탐내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거라면 새집이 어디에 생기든 상관없는 이야기지 않은가.

가만히 듣다가 궁금해져서 백성찬에게 물었다.

“좋은 질문이야.”

백성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임 팀장님한테 물어볼까?”

자기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왜 그걸 그런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말하는 건데.

한평원과 초능력자들이 김이 샌 표정으로 백성찬에게서 등을 돌렸다. 백성찬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런 거 전문은 임 팀장님이잖아!”

“자신 있게 말하길래 뭐가 있는 줄 알았죠.”

“야, 저 두꺼비가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야!”

“그렇죠. 그래서 저도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엄청 시끄러웠다고 하더라고요.”

“으악!”

임상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백성찬은 깜짝 놀랐는지 비명을 질렀다.

“이거 잘못하면 엄청 귀찮은 일이 되어 버립니다.”

임상규는 백성찬은 아무래도 좋았는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요 몇 시간 동안 얼굴색이 많이도 안 좋아졌다.

“여기는 사유지거든요.”

“……아.”

“보통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요괴나 영물이 주는 보화는 주는 이의 의지에 따라 판단합니다. 하지만 헌 집 두꺼비의 경우 아무래도 무단점거에, 새집과 헌 집을 교환하는 거래는 저희 쪽에서 담당하잖습니까.”

말하는 동안 임상규의 얼굴은 점점 죽어 갔다.

“그런데 여긴 사유지란 말이죠.”

임상규는 한 번 더 강조했다.

“옛날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일이 끝나고 고소하고 난리가 아니었답니다. 예전에는 그나마 빈 공터였는데 지금은 공사장을 때려 부수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로서는 복잡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고요.”

“아…….”

“그렇잖아도 지금도 진행 중인 재판이 몇 개 있습니다. 요괴잡이를 하다 보면 주위에 피해가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임상규는 누구를 콕 찝어 말하진 않았지만 광범위한 피해를 끼치는 능력을 가진 몇몇 초능력자가 어깨를 움츠렸다.

“물론 국가에서도 보상을 해 주긴 하는데, 그게 부족하다는 사람은 많으니까요…….”

몇몇 초능력자의 어깨가 점점 더 좁아졌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능력을 사용할 땐 조심해 주시고요, 해준 씨는 정말 잘해 주고 계십니다. 덕분에 피해가 많이 줄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 이름이 거론되어 봤자 썩 즐겁진 않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열심히 하겠다고 대답했다. 임상규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지만 잠시였다.

임상규는 슬픈 눈으로 두꺼비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두꺼비는 공사장을 부수며 집터를 다지고 있었다.

“아!”

백성찬은 움츠렸던 어깨를 잠깐 펴고 임상규를 불렀다.

“팀장님, 혹시 정부에서 아는 까치는 없습니까?”

“까치요?”

“두꺼비는 헌 집을 가져가고, 까치는 헌 이를 가져가잖아요. 의외로 두 동물이 친해서 까치가 두꺼비가 새집을 지을 터를 봐 준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임상규는 처음 드는 이야기라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 아버지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어요.”

“…백성찬 씨 아버님이 민속학 교수셨지요?”

임상규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중에 백 교수님께 연락드려서 출처를 확인해 봐야겠네요. 그게 사실이라면 좋은 정보입니다. 저희 쪽에 신원을 등록한 까치 영물만 있다면요.”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이야기 감사합니다. 미래의 제 후임에게는 까치 연락처가 있길 바라죠. 허허허…….”

그리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왜냐? 아는 까치가 있으니까.

연락처는 없다. 전화번호부가 멀쩡했다면 곧바로 전화해서 부탁했을 것이다. 작매라면 기꺼이 도와주겠지.

하지만 지금은 까치에게 연락을 하려면 박서원이나 여우를 거쳐야 한다.

박서원은 왠지 꺼려진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요괴의 일이라면 선뜻 도와주겠지 싶었지만…. 구두 장군을 쫓는다는 건 그놈의 업도 먹어 치우겠다는 소리일 테니까.

그래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휴대폰이 고장 나서 연락처가 날아갔다는 말에 한평원은 선뜻 전화번호를 주었다. 하지만 괜한 수고였다.

난 정말 내키지 않은 얼굴로 몇 안 되는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뒤졌다는 말도 맞지 않는다. 연락처를 열고, 바로 며칠 전 명함을 보고 다시 입력했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이 다치는 일도 아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기껏해야 임상규네 부서가 법정 분쟁에 휘말리고 끝날 일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 줄 이유는 없다. 정부에서 다 알아서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이유는.

글쎄, 임상규와 그 팀원들이 광화문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절실하게 외쳤는지 들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준다. 그뿐이다.

“허, 해준 씨가 어쩐 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 걸었나?”

회장이랍시고 일도 안 하는지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부탁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부탁?”

“지금 까치와 연락이 됩니까?”

“까치? 우리 귀염둥이 작매? 무슨 일이길래?”

나는 간결하게 헌 집 두꺼비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구민석은 흠, 하고 짧게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불러 주는 건 쉽네. 작매는 지금 바쁘지만 그 사촌 동생 정도는 놀고 있으니까.”

“그럼.”

“하지만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아.”

구민석은 마침 잘 되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잖아도 해준 씨와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었어. 아영이가 있으면 나도 영 눈치가 보여서. 잘 되었군. 까치를 불러 줄 테니 나와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여우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차갑게 덧붙였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해준 씨가 솔직하게 대답해 주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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