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47. 낭만주의자의 포도송이(3)
혹시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딱히 악마를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물론 악마라는 어감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불길함과 당혹스러움. 인간인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감상. 딱 그 정도만 가지고 있다.
악마가 같은 편으로 나오는 영화나 만화 같은 걸 보고 자란 현대인인 이상 악마가 꼭 천인공노할, 벼락 맞아 죽어야 한다는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살아 있는 것보다는 죽어 있는 게 더 나은 존재긴 하다마는, 나는 그렇게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란 본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성체이다.
다만,
‘그 난쟁이 똥자루 놈보다는 내가 낫다니까?’
‘생각해 보게. 그놈은 찔끔찔끔 대가를 가져가지만 나는 한 번에 콱! 인생은 한 방이잖니?’
‘지금 풀어 주면 내가 나와도 자기 안 괴롭힐게. 어때, 혹하지 않아?’
라고 쉬지도 않고 떠드는 걸 듣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빈도수다.
악마는 잠을 자지 않았고, 먹지 않는다고 해서 지치는 체질도 아니었다. 끊임없이 떠들고 있는 걸 듣고 있다 보면 조금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참다못해 마개를 돌려 음소거 시키자 이번에는 플라스크 벽을 쾅쾅 때리기 시작했다.
잠을 설친 지 딱 이틀 되었을 때, 나는 인터넷에서 악마를 고문하는 방법을 검색했고, 사람들이 각종 토론의 장을 펼쳤던 흔적을 발견했다. 그중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했다.
“제발! 제발 그 빌어먹을 찬송가 좀 꺼 줘!!”
보다시피 효과는 좋았다.
“어엉? 오, 염소인가!”
악마는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다가 찬송가 재생을 멈춘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어? 뭐야? 콘코바르 씨잖아?”
“오랜만이구나, 염소야!”
“목소리는 또 왜 이래? 얼굴은 왜 저렇구? 기분 나빠!”
혈색이 돌아 건강해 보이는 머리는 악마도 기분 나빠 했다. 악마는 인상을 잔뜩 구겼다. 나는 플라스크를 살살 흔들며 악마를 불렀다.
“야.”
“씨이, 자기야. 나한테 너무 친근하게 구는 거 아니니? 나 이래 봬도 자기보다 많이 연상이다?”
“그건 모르겠고.”
플라스크를 좀 더 세게 흔들었다. 악마는 작은 플라스크 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약간 탬버린을 흔드는 기분이다.
콘코바르의 머리는 입을 오므리며 과장된 기색으로 감탄했다. 본인으로서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는 중일 거다. 저 꼴이 된 이후로 콘코바르가 무슨 뮤지컬 배우처럼 행동한다고 오늘이 잔뜩 짜증 냈었으니까.
“저기.”
콘코바르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은 구경을 시켜 주어 고맙군! 다정한 콘코바르라고 부르게나.”
원래 이런 놈이었나? 머리에 피가 돌아서 미쳐 버린 건 아니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정한 이웃집 콘코….”
“콘코바르 씨.”
“왜 쟤는 콘코바르 씨고 나는 야라고 부르는 거야?! 자기야, 쟤도 대가리라고 불러!”
잠깐 고민했다. 고민하는 시간 자체는 짧았다. 내가 손을 뻗는 동안 오늘이 먼저 플라스크를 잡아 플라스크를 꽉 닫았다.
“바, 방해, 돼서…….”
혼자 대화에 끼지 못하면 심심할까 봐 찬송가도 다시 틀어 주었다. 악마는 찬송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플라스크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좋아했다.
나와 오늘은 헤드폰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찬송가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다시 콘코바르를 불렀다.
“콘코바르 씨.”
“그래, 무슨 일인가?”
“어떻게 그 상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기억합니까?”
“그건 이 팀장님에게 이미 말해 주었는데. 팀장 대리님도 듣지 않았나?”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그렇기는, 한, 데…….”
사실 나도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목포에서도 얼추 들었던 것도 있고.
어느 여자가 콘코바르의 머리를 들고 비싼 값을 받고 팔아치웠다고 했었지. 괴물의 머리를 들고 튈 생각을 한 여자의 담력에 감탄해야 하는 건지, 자기 머리를 그대로 도둑맞은 괴물의 멍청함에 감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저 머리의 입장에서 보면 말 그대로 자다가 납치당한 격 아닌가.
“우리는 콘코바르 씨의 몸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지금 누가 사용하고 있잖습니까. 우리는 그게, 이 악마가 관여했다고 보고 있거든요.”
“오오오. 그래, 저 악마가?”
콘코바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몸이 있었으면 고개를 맹렬하게 끄덕였을 거다.
“그래서 우린, 콘코바르 씨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우려고 하거든요.”
사실 이쪽도 정체는 만만찮게 위험한 놈이라 이렇게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이산래도 원래는 적당히 몸 쪽을 쫓아내면서 머리를 꽁꽁 숨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항상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법. 이산래도 본인의 경계가 약해져 있는 틈을 타 금발 사내 쪽이 악마와 계약해서 억지로 공격을 성공시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본래라면 이산래가 깨어나길 차분히 기다렸겠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여우들이 특수과 팀장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없다는 것에 안심하긴 했지만 관심 자체를 꺼트리진 않았다. 삼족구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겠고. 탁 까놓고 말해서 여우가 치사하고 더러운 수를 쓰기 시작하면 감당이 되지 않는 건 이쪽이다. 청룡도 도와줄 것 같지 않고.
그러니 조금이나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놈을 깨워야 하지 않겠는가.
“날 도와준다고?”
콘코바르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음…….”
오늘은 집 안에 간이 사당을 만들어 새끼 사자에게 공물을 바쳤다. 인간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용들에게는 이런 공물도 도움이 될 거라 했다. 안쪽의 세계를 수복하는 데 정화수와 과일 몇 개로 도움이 된다면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은가. 점점 더 토템처럼 되어 가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일 거다.
어쨌든, 이산래의 세계에 봉인되어 있는 콘코바르의 육체와 그걸 강제로 차지하고 있는 머리. 그 결속을 흩트려 놓으면 이산래의 세계는 훨씬 빠르게 복구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몸의 주인인 본래의 머리와 악마를 준비했다.
“물론 몇 가지 약속은 해 주셔야겠습니다. 한국에 계속 있는 건 아무래도……”
“음, 고맙지만 괜찮네!”
“……힘드니까, 네?”
“괜찮다고 했네!”
콘코바르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저, 다시 한번?”
“괜찮네!”
“……콘코바르 씨 몸을 찾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괜찮네. 안 찾아도.”
머리만 남으면 지능도 떨어지던가?
“그녀도 분명 필요했으니 내 머리를 팔고, 내 몸을 차지했겠지.”
콘코바르는 어쩐지 달관한 수도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 생활도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네.”
이건 또 왜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 * *
콘코바르의 설득에는 실패했다.
‘비록 몸이 없어도 내 마음은 풍족하니 육신 따위야 아무 소용없고 머리만 있으면 충분하니 자네들도 해 보지 않겠는가’ 하는 헛소리를 뮤지컬 배우 같은 목소리로 듣고 있으니 나까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저 모양이 됐지? 상자에서 막 봉인이 풀렸을 때는 인간을 속여서 자신의 몸을 불러들이기까지 했는데.
“응? 그거야 대가리에 있는 주술이 너무 강력해서 그렇지.”
한 시간 동안 추가로 찬송가 메들리를 들은 악마는 한결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악마는 헤드폰을 움찔거리며 훔쳐보다가 말했다.
“위험성을 낮추고자 인간성을 극도로 높여 버렸는데, 당연히 인간의 영혼을 수확하는 사신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겠지, 자기야?”
악마의 말은 제일 마지막 호칭만 빼곤 생각해 볼 가치가 있었다.
나는 카페테리아에서 사 온 커피를 마시며 정리했다.
“그러니까 팀장님이 너무 유능해서 문제다, 이거네요?”
“…….”
오늘은 암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하면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마냥 자업자득이라 하기에도 좀 미안한 감이 있고.
그나저나 이걸 다른 사람에 비해 유달리 잘 보는 인간 하나랑 초능력자 하나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일까.
“차라리 그냥 그놈 목을 쳐 버리는 건…….”
“거, 거기로, 어, 떻게, 들어갈 수, 있, 는… 방법이.”
그렇지. 이산래의 세계에 어떻게 들어가느냐의 문제도 있다, 이건.
“헤.”
악마가 헤죽 웃는 걸 보니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고.
청룡에게 물어볼까. 하지만 청룡이 정말 아들을 깨우고 싶었다면 그날 바로 도와줬겠지. 그렇다면 청룡에게는 아들을 깨울 수 없는 이유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청룡 본인에게든, 아들에게든.
머리가 아파지네.
“다, 다른, 사람에게… 물, 어, 보기에, 는.”
“어찌 되었든 괴물을 불러들이는 거니까 좀 무리가 있죠.”
괴물과 엮여도 호들갑 떨지 않고, 우리가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이가 어디 없을까. 이산래가 딱이었는데. 필요할 때는 없다니까.
떠오르는 얼굴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쪽은 아무래도 박서원의 인맥이다. 특수과를 주시하고 있는 여우는 처음부터 제외고, 송희선과는 친분이랄 게 없다. 어느 쪽이든 연락을 하면 박서원의 귀에 들어갈 테고.
…아니지. 다른 선택지도 있지 않을까.
“오늘 씨.”
“네, 네?”
“아예 다르게 접근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콘코바르는 서양의 요괴지만 인간의 영혼을 거두는 괴물이기도 하다. 저승사자와 비슷하지만 이쪽은 확실히 좀 더 괴물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해하는 괴물.
“다, 다르게요…?”
인간을 습격하는 요괴들을 싫어하고,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성격. 여우가 주시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건 불개 핑계를 대면 눈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모든 이야기에는 영웅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인간을 해하는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영웅이 필요한 법이니까.
“손요운 씨를 불러 보는 건 어떻습니까?”
봉황의 날개와 빛나는 눈을 가진 우투리라면 이 상황을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 그의 인간의 영웅으로서의 면모가 어린 이무기의 세계와 악마와의 거래에서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서 나쁠 건 없다.
밑져야 본전이지 않은가.
“소, 손요운 씨라면.”
오늘도 꽤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하, 한번, 해, 보는, 것도… 괜…… 찮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은 손요운 뒤에 의외의 이름을 덧붙였다.
“서, 서다흰, 씨도, 부, 불, 러, 주실… 수, 이, 있을까요…….”
“서다흰 씨요?”
오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동안은, 그, 티, 팀장님이, 계… 시니까, 괘, 괜찮았, 는데.”
서다흰의 능력이 뭐였더라. 정화?
“네, 저, 정화, 요. 사, 삿된, 것, 을, 정화… 시킬, 수, 있… 으니까.”
오늘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조금 분한 얼굴이기도 했다.
“저는, 모, 못 하지만…….”
그게 분했던 거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대신 오늘 씨는 서다흰 씨가 못 하는 걸 많이 할 수 있잖아요.”
“……그, 런, 가요.”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됐죠. 저는 서다흰 씨는 잘 모르지만, 오늘 씨 덕분에 살아난 적은 많으니까요.”
“…….”
“그건 오늘 씨밖에 못 하는 일이에요.”
“그……. 네.”
손요운과 서다흰 조합이 통할지 안 통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산래는 자고 있고 콘코바르는 저 모양이다. 박서원의 인맥을 제외하면 크게 쓸 만한 인맥이 없는 내, 아니, ‘정해준’의 빈약한 인맥을 욕하는 것도 잠깐이면 충분하다.
인간의 영웅이라면 곤란에 찬 인간 두 명을 도와줄 수 있겠지.
나는 손요운에게 전화하기 위해서 휴대폰을 들었다.
“…….”
“……해준, 씨?”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손요운 씨 번호도 날아간 걸 깜빡했네요.”
젠장. 어제 비상근무에서 백성찬과 한평원을 봤을 때 물어 놓을걸.
이렇게 금방 필요하게 될 줄은 몰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