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47. 낭만주의자의 포도송이(2)
“저한테 그렇게 말해도 말입니다….”
여우에게 이실직고할 순 없다. 속 좁기로는 아마 밴댕이 소갈딱지만 한 청룡이 아들의 안위에 대해서 어떤 보복을 할지 짐작도 안 갈뿐더러 조막만 한 새끼 사자를 여우의 먹잇감으로 주고 싶진 않았다. 어찌 되었든 날 도와주려고 했던 이였다.
더군다나 그 새끼 사자는 지금 오늘의 집에 있다. 여우가 어떤 마음을 먹고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모르지 않은가. 새끼 사자라면 몰라도 오늘에게 피해가 가는 건 아니 될 말이다.
“그냥 잘 보고, 야근에 시달리는 공무원이라니까요?”
거짓말은 아니다, 거짓말은.
이산래도 절반이나마 대한민국의 피가 흐르고 대한민국에 취직한 이상 야근은 피할 수 없었다는 거지. 지독한 대한민국.
“정말 그것뿐인가?”
구민석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물었다.
구민석이 아까 말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말도 못 하겠고.
잠깐 고민하다가 떠오른 게 있어서 입을 열었다.
“아니, 뭐, 얼마 전에 뉴스에서도 나오던데. 도대체 절 여기까지 불러서 그런 걸 묻는 이유를 모르겠거든요.”
“……뉴스에 나왔다고?”
“뉴스에 나왔다고요?”
구민석과 성아영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지나가는 배경이긴 한데…….”
“언제 적 뉴스였어요? 어느 방송사?”
“네?”
성아영이 구민석의 태블릿 PC를 뺏어다가 엄청난 기세로 인터넷 창을 켰다. 검색어를 입력하려던 성아영은 손가락을 움찔거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뉴스였어요?!”
“그.”
박력 넘치는 모습에 얌전히 대답했다.
“광화문 광장 복구하는 영상이었는데요.”
“그림 그리는 거요? 그거 그 팀장이 주도한 거예요?”
말이 좀 이상한데.
“그거 이 팀장님이 그렸어요.”
“이 팀장?”
뭔가 이상한데.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특수과 팀장이요.”
“그 사람 성이 이 씨에요?”
“……?”
“왜요?”
“아니, 그 정도는 돈과 권력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 내용 아닙니까?”
공무원이잖은가. 비밀 요원 같은 게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나름대로 경찰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못 알아낼 게 없는 위치다.
구민석은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를 불러서 확인하고 있지 않나.”
“……?”
“우리 눈에는 제대로 존재가 보이지 않아. 문서상으로도 마찬가지고. 그 부분만 이상하게 흐려.”
성아영은 내게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뉴스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 복구 뉴스다.
“여기 그 사람이 있나요?”
이 여우들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성아영을 보다가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광화문 광장을 배경으로 리포터가 떠들어 대고 있었다. 자료화면 삼아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특수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날짜가, 보자.
“여긴 없네요.”
이산래가 도끼를 휘두르는 남잔지 여자인지에게 습격받아 새끼 사자가 된 이후이다. 청룡은 잠에 빠진 아들을 대신해 이산래 팀장이 집안일을 핑계 삼아 중국에 갔다는 변명을 만들어 주었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 정도는 잘 포장해서 얘기해도 될 것 같다.
성아영은 미간을 좁힌 채 다시 뉴스 영상을 검색했다.
“그럼 이건요?”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거리가 멀고 다른 사람들에게 반쯤 가려져 있었긴 하지만 확인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화면 왼쪽 구석을 가리켰다.
“여기요.”
“음…….”
“아영아, 보이니?”
성아영의 뒤로 꼬리가 튀어나왔다. 평소에는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던 게 이번에는 기분이 나쁜 듯 긴장한 채였다.
성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삼촌.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제대로 안 보여요.”
성아영에게서 태블릿 PC를 넘겨받은 구민석도 눈을 찌푸리며 화면을 보았다. 구민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해준 씨가 보기에 특수과 팀장은 인간이었어요?”
두 팔, 두 다리 다 달려 있었으니 인간이지.
“네.”
“정말로?”
“…아니, 진짜 이게 뭐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이 팀장님이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구민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 중에서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이가 없는 건 아냐. 옛날에 나라가 혼란스러웠을 때는 이렇게 모습을 숨긴 채 인간을 구하거나 요괴를 잡고 다니는 이들이 종종 있었지.”
옛날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지나가는 스님과 선비가 그런 존재였던 건가.
“그렇지만 나같이 오래 산 이들의 눈을 피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네.”
나는 맹점을 지적했다.
“성아영 씨는 꼬리가 몇 개 안 되고, 회장님은 지금 인간 몸속에 들어가 있다면서요. 안 보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제 꼬리 수가 어때서요? 이 나이에 이 꼬리라면 엄청 엘리트거든요.”
성아영이 발끈했다. 나는 못 들은 척했고, 구민석은 조카의 입에 과자를 하나 물려 준 다음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나도 그 팀장에 대한 증언은 모아 봤었네. 보기에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지?”
“정확한 나이는 모르는데 생긴 건 그렇죠.”
“그 나이대의 인간이 그만한 힘을 가지기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불가능하네.”
구민석은 태블릿 PC를 내려놓았다.
“모습만 숨기면 모를까 이름까지 숨기는 게 이 정보화 시대에 가능할 것 같나? 하다못해 보고서에도 이름을 써야 할 텐데?”
어느 부분에서 이산래를 수상하게 여겼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산래가 어떻게 특수과에 스며들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이산래가 직접 힘을 썼을 수도 있고, 이번처럼 청룡이 힘을 써 줬을 수도 있다. 이산래가 특수과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모친이나 형제들도 건재했을 테니 그쪽의 도움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 팀장의 이름이 뭐지?”
“……이산래입니다만.”
“이산래. 이산래……. 이름에는 주술적인 효과가 없고.”
구민석은 턱을 매만졌다.
“거참, 이상하단 말이지.”
집에 돌아가면 오늘에게 경고를 해 줘야겠다. 막돼먹은 여우들이 또 흉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라고.
“해준 씨.”
“네?”
“혹시 그 팀장과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나?”
“어….”
여긴 훌륭한 변명거리가 있다.
“이 팀장님 지금 한국에 없어서요.”
“…한국에 없다고?”
아까 생각했던 말을 그대로 구민석에게 해 주었다.
“집안일이 있다고 광화문 광장 복구도 내팽개치고 중국에 갔습니다.”
“중국 사람인가?”
구민석은 의외의 말을 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머니가 중국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 중국… 중국이란 말이지.”
구민석은 금방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 한국에 없으면 괜찮지. 그래, 그 팀장이 돌아오거든 다시 내게 얘기해 주게나.”
“아, 뭐…. 생각해 보고요.”
“하하, 계약서를 잠깐 손볼 때가 온 것 같은데. 우리 법무팀이 일을 잘하거든.”
“그 정도야 알려 드릴 수 있지요.”
“좋아. 그럼 이제 가 보게.”
이 정도면 그냥 전화로 물어봐도 되지 않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마지막에 구민석이 계약서를 들먹이지만 않았다면 백 퍼센트 내뱉었을 것이다.
딱히 내 돈 같은 돈도 아니지만 지금으로써는 없으면 아쉬운 것도 나다. 젠장, 더러워서라도 내가 내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럼 저 뺀질거리는 얼굴과도 마주칠 일이 평생 없어지겠지.
“그렇지. 그 행사 말인데.”
물론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부른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잘 넘겼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우의 참 거짓 판별법은 완벽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해준 씨에게도 초청장이 갈 거네. 급한 일 없으면 꼭 참석하길 바라네.”
어차피 내게 급한 일이 없을 거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조금 기분 나쁘기는 한데 반박해 봤자 질 게 분명한 일이어서 얌전히 대답했다.
“…그러죠.”
덕분에 나도 구민석에게 물어봐야 하는 게 떠올랐다.
“회장님.”
“부회장.”
“회장님, 지금 박서원 씨와 쌍둥이는 뭐 하고 있습니까?”
구민석은 호칭을 정정하는 것도 지쳤는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까치와 같이 도망간 구두 장군을 쫓고 있네.”
* * *
“해준 씨, 안녕하세요.”
주하랑과 김도훈은 모처럼 평화로운 얼굴로 나에게 인사했다. 근래에는 야근이 없었는지 특수과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아니지, 야근이 원인이 아닐 수 있다. 이산래가 과연 특수과 사람들에게 좋은 상사였을까. 사실은 이산래가 없어서 근무환경이 좋아졌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아니라면.
“왈!”
강아지가 있는 직장 생활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고.
새까만 꼬리들이 맹렬하게 흔들렸다. 주하랑은 싱글벙글 웃으며 사료를 그릇에 부었다.
“불개들은 어때요?”
“완전 상전이에요, 상전.”
말은 그렇게 해도 주하랑과 김도훈의 얼굴에는 내내 웃음꽃이 펴 있다. 백성찬이 보면 배 아파 죽으려고 했을 거다.
사실 오늘도 내가 불개 만나러 특수과에 갈 거라고 하니 반쯤 죽어 가면서 나를 저주했다.
‘왜! 나도 만나게 해 줘! 왜 넌 되고, 나는 안 되는데!’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인맥 차이죠.’
‘와, 부정 청탁!’
‘볼일 있어서 가는 거라니까요.’
‘무슨 볼일?’
‘불개 만나기?’
놀려 먹은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여전히 꼬리를 거세게 흔들며 사료를 먹고 있는 불개들을 보며 말했다.
“얘네 그 행사, 결국 나간다면서요?”
“아, 네.”
김도훈은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실제로 여우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동물 단체에서 반발하긴 했었다.
그러나 반발도 잠시였다.
“청룡님께서 부르셨는데, 데려가야죠.”
보름 넘게 잠실을 비우고 있었던 청룡이 돌아왔다. 청룡은 돌아오자마자 매년 자신이 영향력을 끼쳤던 행사를 확인했고, 불개들을 데려오라 명하셨다. 잠실 타워에서 잘 내려오지 않는 용이 무슨 변덕일까.
물론 청룡이 명령을 내린 건 아니고 기상청 사람들을 통해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인간이 감히 어떻게 청룡의 요청을 거부하겠는가? 동물 단체들은 조용해졌다. 아마 지금쯤 단청 회장실에서 두 여우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지 않을까.
그동안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던 청룡이 어째서 이 타이밍에 불개들을 부르는지.
다, 자업자득이다.
“오늘 씨는요?”
“사무실에 있어요.”
“많이 바빠요?”
“음, 지금은 괜찮아요. 다른 건 대충 정리가 됐는데 그 머리 하나가 문제라서.”
“목포에서 가져온 걔요?”
“네.”
주하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김도훈이 엄살을 피웠다.
“팀장님이 안 계셔서 콘코바르 씨도 오늘 씨 담당으로 넘어갔거든요. 얼마 전부터 무슨 가곡을 불러 대서 시끄러워 죽겠다니까요. 야근하다가 들으면 엄청 무서워요.”
“아하. 그거 고생 많으시겠네요.”
별로 공감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러 의미로.
불개를 돌보느라 헤실헤실 웃고 있는 주하랑과 김도훈에게 인사한 후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명패에는 이산래 이름이 버젓이 남아 있었지만 안에 있는 건 다른 사람이다. 오늘은 날 반갑게 맞이했다.
“아, 와, 왔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씨.”
“오, 그대는 오랜만에 만나는군!”
몸은 없고 머리만 남은 사내가 바구니 안에서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알은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늘 볼일은 그쪽과도 관계가 있어서 대충 인사를 했다.
나는 가방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얼핏 보면 담요 뭉치지만 안에 든 것은 꽤 중요하다.
나는 음악을 멈추고 헤드폰을 치운 다음 유리 플라스크의 마개를 오른쪽으로 조금 돌렸다. 반응은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제발! 제발 그 빌어먹을 찬송가 좀 꺼 줘!!”
염소 머리를 한 악마는 플라스크 바닥을 통통 두드리며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