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70화 (170/202)

# 170

47. 낭만주의자의 포도송이(1)

잠실 타워의 일은 놀랍게도 금방 잊혀졌다.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친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인터넷 기사가 몇 개 나오고, 사람들이 조금 수군거리는 선에서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광화문 광장에서 머리 아홉 개 달린 괴물이 튀어나온 게 채 한 달도 안 된 일이다. 쥐어뜯긴 것처럼 생긴 날개를 단 악마가 전망대 주위에 날아다닌 건 사건 사고에도 끼지 못할 수 있다. 나와는 생각의 근본이 다른 세상이니까.

게다가 잠실 타워는 원래 그 전부터 다사다난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수모까지 겪지 않았던가. 잠실 타워를 삼보일배하며 도는 사람들은 한때 굉장한 구경거리가 되었었다. 그러고 보니 아사달은 어떻게 되었나. 경주에 돌아갔던가?

하릴없이 늘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오늘의 청룡님] 블로그에 들어갔다.

[오늘도 청룡님은 ×]

블로그 주인은 잠실 타워 사진을 한 장 올려놓았다. 청룡은 없었다.

청룡이 없는 잠실 사진은 내 세계의 잠실과 똑같이 보였다. 조금 그리워지긴 했지만 금세 털어 냈다. 계속 감정적으로 굴 순 없다.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이럴 때면 이 세상 사람들의 태평함이 조금 부러워진다. 광화문의 일도 금방 잊은 듯 세상은 조용해졌고, 잠실 타워가 통제되었던 건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다니.

어쩌면 오늘이 힘을 써 줬을지도 모른다. 소속은 경찰청이니까 뭔가 했을지도. 서울 한복판에 난쟁이와 악마가 나타나서 협정이니 뭐니 수상한 말을 주고받았으니 특수과 입장에서는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입에 거론되는 건 어떤 힘을 얻게 될지 몰라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보아라. 길 잃은 경외가 모여 힘을 이룰까 봐 산함박도 산암이라 불리지 않는가.

어쨌든, 그렇게 잠실 타워의 소동은 잊혀졌다.

……잊히는 편이 좋았다.

* * *

“…….”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서 받고 싶지가 않았다.

결코 받지 않으려던 건 아니고, 딱 받으려는 순간에 전화가 끊겼다. 조금 안도했다.

“…….”

그러나 같은 번호로 재차 전화가 왔다.

분명 그놈들 중 하나겠다 싶었다. 전화번호부가 싹 지워지면서 다른 사람들 전화번호도 사라졌다. 내 전화번호부는 덕분에 아직도 휑하다.

그나마 임상규 팀장 정도는 금방 복구할 수 있었다. 엊그제에도 임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구두 장군이 튀어나온 이후로 칠석을 제외하면 조용한 나날이었지만 슬슬 요괴들이 다시 기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어머, 해준 씨.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요?”

성아영이다.

그놈들보다는 낫지만 여기도 만만찮게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긴 했다. 심지어 이쪽은 사람도 아니지.

“무슨 일입니까?”

“다른 게 아니라, 회장님이 해준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셔서요.”

“……그래서요?”

성아영은 수화기 너머로 풋, 하고 웃었다.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겠어요. 회사로 좀 오실래요?”

불쌍한 초능력자는 돈 주는 사람을 거절할 수 없다. 심지어 상대가 내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불어서 그 상대의 가족들은 정치인이었다.

……그게 내가 단청으로 째깍 달려간 이유다.

도대체 박서원을 거치지도 않고,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도 궁금했고.

여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회장실에는 박서원이 이미 앉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음, 왔나?”

“…….”

“왜 그런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나?”

“아뇨.”

성아영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회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민석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온전히 받고 있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꼬리 여덟 개를 단 여우는 태블릿 PC를 보다가 나를 맞이했다.

“편하게 앉게나.”

“……무슨 일이십니까?”

“사람이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해?”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를 생각하면 이쪽 반응이 정상이다. 이렇게 오붓하게 대화를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회장님 많이 바쁘시잖습니까.”

“회장 아니네만.”

구민석은 혀를 쯧쯧 찼다.

“서원 씨가 밖에서도 그렇게 부르는 바람에 내가 그 인간을 죽였다고 자꾸 찌라시가 돌잖나.”

“죽인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 짓은 할 수 없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아직 멀쩡히 살아 계시네.”

할 수만 있었다면 죽였을 거라는 말로 들린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는지 성아영은 삼촌을 향해 싱긋 웃으며 일침을 놓았다.

“다 자업자득이죠.”

성아영의 말에 구민석은 부루퉁한 얼굴로 조카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아영은 내 앞에 커피와 주전부리가 담긴 접시를 놓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경영지원팀 대리인 흉내를 내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다.

…생각해 보니 처음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평온하게 협박 질이나 해 댔구나. 이 땅에 사는 영물 중에서는 제정신인 놈이 하나도 없는 건가?

“그건 그렇고, 내가 해준 씨를 부른 건 말이지.”

구민석은 성아영이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속에 들어앉은 게 여우든 뭐든, 겉모습은 여전히 짜증 날 정도로 잘생기긴 했다. 오랜만에 구민석에게 햇빛이 쏟아졌다. 햇빛에 정화나 되면 오죽 좋을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네.”

“전 아는 게 없습니다만.”

“하하, 모두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대한민국 영물들은 귓구녕도 막혔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쳐 들으라고.

“걱정 말게. 해준 씨는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확신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본래 그런 기분으로 푸는 문제는 모두 틀리기 마련이다. 내 대학교 성적이 그랬다.

나는 최대한 어떻게 저런 감각으로 대한민국 최대 기업의 회장이 될 수 있지 라는 감정을 실은 눈으로 구민석을 보았다. 구민석은 껍데기가 인간이긴 해도 속에 든 건 동물이 맞긴 했는지 빠르게 반응했다.

“방금 나보고 회장이라고 생각했지?”

“관심법이라도 있으신지?”

“그게 있었으면 난 주식이나 하면서 놀고 있었겠지.”

“그것도 그렇군요.”

“뭔가 좀 무시당한 기분인데…….”

구민석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구민석은 박서원 버금가게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해준 씨, 특수과랑 많이 친하지?”

난 딱 잘라 거절했다.

“청탁 안 받습니다.”

“…….”

“아, 청탁 아닙니까? 그럼 안 사요.”

“내 깜냥에 물건 팔러 돌아다닐 것 같나?”

“물건 만들어서 파시는 분 아닙니까?”

“그렇게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기가 뭣한데…….”

성아영은 웃으며 구민석을 불렀다.

“삼촌.”

“아, 청탁 같은 걸 하려고 하는 게 아냐. 그걸 하려면 우리 집안사람들 소집하는 게 더 빠른데 왜 굳이 정해준 씨 같은 인간을 여기까지 불러서 말하겠나?”

이거 지금 돌려 깐 거지?

“그럼 뭡니까?”

“내가 알고자 하는 건 하나네.”

구민석은 손깍지를 낀 채 턱을 기대었다. 악당이 많이 하는 바로 그 자세다. 내 세계에서 저 배우는 좀 더 신사적인 이미지였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우리 엄마가 좋아했으니까.

구민석은 생글거리며 웃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험한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특수과 이형상수색팀 팀장, 누군지 알지?”

“어…….”

내가 특수과와 일을 몇 번 한 적 있는 건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이야기다. 나는 모른 척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기야 알죠. 일도 몇 번 했으니까요.”

일을 하다 못해 정체가 뭔지도 알고 우리 집에 토템으로 놔둔 적도 있다. 지금은 오늘이 케이지에 넣어 가져갔다. 오늘은 그래도 한때 팀장이었던 토템… 동물, 아니 영물을 케이지에 넣는 것을 조금 꺼려 했지만 저 멀리 제주도에서는 산주인도 케이지에 넣어 실어 날랐다. 사자라고 예외가 될 순 없다.

“그자, 정체가 뭔지 아나?”

“정체요?”

물론 알지.

그런데 이 여우는 무슨 의도로 이산래를 거론하는 걸까. 사실은 청룡의 아들이니 같이 놀지 마라? 아니면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정체를 모르니 나는 알고 있나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시간을 오래 끌면 안 좋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야근에 치여 사는 공무원이죠. 별거 있나요.”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병원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여우는 내 거짓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게 지금도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사실을 말하면서도 거짓말하는 법은 진즉 익혔다.

“특수과 근무 환경이 최악인 건 유명한 사실이고.”

유명했구나. 하긴 보통은 다들 야근하고 있었지.

“그런 거 말고, 해준 씨. 인간도 동물이지 않나. 동물적인 감을 깨워 보게.”

지금 자꾸 욕하는 것 같은데.

“그건 진짜 동물인 회장님이 하시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첫째, 난 회장이 아니고. 둘째, 진짜 동물도 아니다만.”

“대충 비슷한 거잖습니까. 네발짐승이고. 꼬리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거라고 합시다.”

“어머, 해준 씨는 그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성아영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동물들은 왜 당연한 걸 묻고 그러냐.

“그렇다고 인간인 건 아니잖습니까.”

성아영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고 구민석은 조금 심기가 불편해 보였지만 넘어갔다. 원래 그 나이 먹고 현실을 직시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자.

“그 문제는 넘어가고. 어쨌든 그 팀장의 특이사항은 없던가?”

“특이사항이라고 해 봤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엄청 잘 본다고 하던데요.”

“그래, 팀장이나 되는데 못 보면 안 되겠지……. 그거 말곤?”

“삼촌, 아직도 모르겠어요? 해준 씨한테는 그렇게 물으면 안 돼요.”

성아영이 끼어들었다.

“해준 씨가 멍청한 건지 둔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요즘 인간들은 그렇게 돌려서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고요.”

“끙, 그렇긴 하지.”

구민석은 흐트러졌던 악당 포즈를 바로 했다. 이런 데서는 디테일이 뛰어나다.

“해준 씨, 이번에 삼족구가 나온 거, 알고 있나?”

알지. 구민석을 비롯한 여우들의 대항마.

“여우 잘 잡는다는 그 개요?”

“알고 있군. 그럼 얘기가 빠르겠어.”

“지금 그 개를 다른 불개들과 같이 특수과에서 맡고 있다는 얘길 들어서요.”

성아영이 구민석의 말을 거들었다.

“그렇다고 저도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우리는 그 개가 아주…… 불편하단 말이지.”

자기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개가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 불안하기야 하겠지.

그런데 안 만나면 되는 일 아닌가? 일이랍시고 해외로 나가시던지. 마음만 먹으면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 생각을 전하자 구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렇지.”

그건 그렇지 않은 여우들이 있다는 말이다.

“곧 행사가 있어.”

“매년 열리는 행사예요. 한 부모 가정이나, 소년소녀가장 등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데, 규모가 많이 커요.”

왠지 청룡 인형이 여기에 나올 것 같다.

“청룡님도 인형까지 만들어 가면서 주시하고 있는 행사죠.”

역시…….

“그쪽에서 지원받아서 초능력자들이 많아서 초능력자 참석률이 높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 후원사들도 참여하게 되고, 복지부에서도 지원하고. 덕분에 국회의원도 많이 참석해요.”

“그런데 이번 행사에 아이들에게 불개들과의 시간을 가지게 하겠다는 몹쓸 아이디어를 낸 이가 있다지 뭔가.”

“누군진 몰라도 일 되게 열심히 하네요. 복지부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제 세금이 잘 쓰이고 있는 것 같아서 좀 기쁜데요.”

“……그래서, 거기 참석하기로 했던 내 일족들이 뒤집어졌네.”

처음부터 인간 정치에 끼어들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니었을까.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본론이 뭔지 대충 알겠으니까.

“그래서 특수과에 압력을 넣어서 불개를 데리고 오지 못하게 해 달라, 이겁니까?”

“그건 겸사겸사. 불개를 불참하게 하는 건 동물 단체를 이용하면 되네.”

와, 정말 악당이긴 하구나.

나는 조금 질린 눈으로 구민석을 보았다. 하긴 우투리를 각성시키겠다고 몇십 년 동안 대한민국 초능력자 대우를 개판으로 만들어 놨던 놈이다. 뭘 더 놀랄까.

“물론 예비책은 많은 게 좋지. 혹시 몰라서 특수과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긴 했어. 쓸 수 있는 패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잖나?”

구민석은 내 감탄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특수과 팀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 뭔가.”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는 자신감부터 고치는 게 어떻습니까?”

“분명 사람은 존재하는데 인지할 수 없단 말이지.”

구민석은 귓구멍이 막힌 수준이 아니라 그냥 없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내 말을 무시하진 않겠지.

지 좋을 대로 귓구멍을 닫았다 열었다 하는 구민석은 음흉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자네는 그 팀장과 같이 일했다고 했지?”

“뭐……. 그렇죠.”

“목표가 코앞인데 그딴 변수를 둘 순 없네. 자네가 본 그 팀장에 대해서, 샅샅이 말해 주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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