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46. 추억은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3)
‘……그걸 주면 어떻게 됩니까?’
‘흠. 어떻게 되냐니.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지 않겠나?’
‘그리움이 사라지는 건 괜찮은데, 그렇다고 제가 목표를 잃는 건 안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가 울린다. 난쟁이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건 걱정 말게. 자네에게선 그저 그리움만 사라질 뿐이니까.’
난쟁이는 자신의 대가를 듣고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인간을 보았다.
두 눈은 어두웠지만 강한 빛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요정이나 동양의 용처럼 인간의 운명을 훔쳐보진 못하지만, 지금 저 인간의 영혼은 분명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것이다.
새까만 별도 빛나는 법이니까.
‘이건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네.’
난쟁이, 룸펠슈틸츠킨은 기꺼이 설명했다.
‘자네는 자네가 어떤 사고를 거쳐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모두 기억할 것이네. 그게 사라진다면 나에게 사기라며 도리어 호통을 칠 수 있지 않겠는가?’
‘…….’
‘다른 감정도 멀쩡하네. 자네가 과거에 슬픔을 느꼈든, 분노를 느꼈든 전부 기억해. 그리움만 느끼지 못할 뿐이네.’
그 그리움이야말로 눈앞의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원동력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동력을 빼앗긴 인간이 멈추는 법은 없다. 때로 인간은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기에 더 나아가는 존재였으니.
‘대가를 지불하고, 소원을 빌겠습니다.’
난쟁이는 활짝 웃었다.
난쟁이는 인간에게 크게 허리를 굽혔다. 그가 허리를 들었을 때 그는 크게 입을 벌려 인간의 그리움을 먹어치웠다.
인간의 눈이 잠깐 어두워졌다. 빛은 사라졌지만 흔들리지 않는 건 여전하다. 견고한 눈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인간에게 물었다.
‘이제 자네는 초능력자가 되었네. 그대가 원하는 대로. 능력의 사용법에 따라 지키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가능하네.’
인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난쟁이는 잠깐 인간이 감상에 젖도록 놔두었다가 물었다.
‘그래서, 다음 소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
‘그건 자네가 지불할 수 있는 대가가 아니잖은가.’
‘그건…….’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눈동자가 난쟁이를 향했다.
‘여의주 7개. 그 정도면 얼추 가능하다고 했지요?’
‘그래.’
‘모아 올 테니까, 번호 바꾸지 말고 기다리세요.’
* * *
아무것도 없는 빈 전화번호부다.
근래에는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다. 휴대폰에 남아 있는 번호로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게 언젠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초능력자 등록을 마친 뒤로는 정신이 없어서 거의 잊고 있었다. 반쯤은 생각하기 싫어서 억지로 잊으려고 했던 마음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지워졌다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자꾸 눈에 들어오게 된다. 속이 뒤틀리다 못해 토할 것 같았다.
동요로 인해 ‘정해준’이 내게 읽힌다. 육신에 남아 있는 혼의 기억이다.
‘정해준’의 세상은 단순하다. 복수를 대신해 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해준’은 자신의 목표에만 전념했다. 휴대폰에는 죽은 가족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해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족 말고는 얼마든지 이용한 다음, 그대로 내팽개칠 것들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괘, 괜찮, 아, 요……?”
오늘에게 괜찮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정해준’은 스스로 매정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그랬더라면 그리움을 대가로 지불했을 때 목표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움을 대가로 주기 전이나 주고 난 후나, ‘정해준’이 생각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가족. 오로지 가족뿐이었다.
그래서 ‘정해준’은 그리워하지 못하면서도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들을 보면서 곱씹었었다. 추억을 돌아본들 구체적인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좋았다, 하는 애매한 감정만 신기루처럼 남을 뿐 그립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 ‘전화번호’는 ‘정해준’에게 늘 목표를 상기시키는 매개체가 되어 주었다.
“해준, 씨?”
“잠깐, 잠깐만요. 잠깐만…….”
가볍게 얼굴을 쓸었다. 오늘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전화번호’도 사라졌다.
그래. ‘사라졌다’.
함께 사라진 다른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문제 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고, 연락처를 구할 방법은 많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가족. 부모님과 정해영의 전화번호는 ‘내’ 기억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 적어도 가족들의 전화번호만큼은 혹시 몰라서 항상 외우고 다녔던 것이다. 010. 다음 번호는 누가 잘라 내 간 것처럼 새하얬다. 사실 누가 잘라 내 간 것이 맞기도 했다.
“…….”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해준’의 감정이 수습이 되질 않는다. 벽. 잊지 말자. 나와 그 자식 사이에는 벽이 있는 거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최악은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 휴대폰은 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해준’의 것이지. 없어진 전화번호 따위는 돌아가면 다 해결되는 문제다.
그러니까 괜찮다. 내 미련도 아닌 것에 흔들리지 말자.
나는.
나는, 괜찮다.
“……해준, 씨.”
오늘이 내 옆에 앉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갔다.
“번호, 누, 누구, 있, 었, 어요……?”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휴대폰 액정만 보고 있으니 오늘도 내가 난쟁이에게 어떤 걸 주었는지 눈치챘던 것 같다. 나는 겨우 오늘에게 웃어 줄 수 있었다. 사실 제대로 웃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입꼬리가 덜덜 떨렸다.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저장한 연락처는 몇 개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
“부모님, 이랑 여동생… 이요.”
“음…….”
오늘은 잠깐 고민하다가 액정 위를 톡톡 두드렸다. 내게도 화면이 고스란히 보였다. 액정에 연락처 추가 메뉴가 떠올랐다.
오늘은 손끝을 가볍게 움직여 이름을 입력했다.
‘엄마.’
조금 멍해졌다.
“해준, 씨, 어머니… 새, 생신이, 어떻, 게, 되나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엉뚱한 질문에 잠깐 멈칫했다. 오늘은 차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7월 16일…….”
오늘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오늘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추가로 물었다.
“그, 태, 태어나신, 년도…… 가?”
오늘이 왜 그런 걸 묻는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는 거지 그 외에는 전부 기억한다.
“68년생, 이신데…….”
오늘은 비어 있는 칸에 숫자를 적어 넣었다. 010 다음에. 1968, 0716.
저장.
비어 있는 전화번호부에 연락처 하나가 생겼다. ‘엄마’.
오늘은 다시 새 연락처를 만들었다.
다음은 ‘아빠’였다.
“새, 생년월일…… 이?”
“……62년, 2월 15일이세요.”
불을 삼킨 것처럼 속이 뜨거워졌다. 울컥하고 새어 나오려는 것을 다시 삼켰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밖으로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두 번째 연락처가 생겼다.
“도, 동생, 이름이…….”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내 동생 이름을 말해 주게 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귀찮기만 하고, 짜증 나기만 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쩐지 조금 그리워진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정해영.”
오늘은 싱긋 웃었다.
“예, 예쁜, 이, 름, 이네요.”
정해영이 들으면 좋아했을 칭찬이었다.
나는 오늘이 입력하는 걸 막고 휴대폰을 돌려받았다. 휴대폰은 오늘의 온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발열 때문인지 따뜻했다.
“걔는 이름으로 저장 안 해 놨었어요.”
이건 기억하고 있다. 오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형제가 없었다.
“그, 그럼, 여동생, 이라, 고……?”
“아뇨.”
정해영은 몇 번이고 이름을 바꾸라고 난리를 쳤고, 실제로도 바꾸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휴대폰 잠금 패턴에 번번이 좌절했다. 보복성으로 걔도 자기 휴대폰에서 내 이름을 바꿨지만 내가 별로 타격이 없어 하자 분해했다.
오늘은 내가 저장한 여동생 별명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조금 신이 나서 오늘에게 내 여동생의 생일에 얽힌 이야기도 해 주었다.
“얘 생일은 5월 5일이에요.”
새로 저장된 정해영의 휴대폰 번호 뒷자리는 자연히 0505가 되었다. 어린이날이기도 했다. 정해영은 그래서 어린이날마다 선물을 두 개 강탈해 갔던 놈이다.
그렇지만 올해는 어린이날 선물과 자기 생일선물을 두 개 내놓으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넘겼다. 그 떽떽거리는 목소리마저 그리워지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정해영 생일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생일은 모두 지난 날짜였다. 항상 가족 생일 때는 케이크를 사 오고, 선물을 챙겨 주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묻어 놨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래도.
저장 버튼을 누르자 전화번호부에 세 개의 연락처가 떠올랐다. 본래 전화번호가 아니니까 저 번호로 전화를 걸면 엉뚱한 사람이 받을 것이다. 실수로도 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내게 가족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오늘 씨.”
“네?”
“…….”
오늘은 그저 말간 얼굴로 웃었다. 악마가 플라스크 속에 갇힌 이후, 흐려졌던 하늘은 다시 맑아졌다. 눈부신 여름 태양이 오늘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따스한 빛이었다.
목이 멨다. 뭘 어떻게 해도 지금의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오늘 씨.”
나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오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사르르 웃었다.
오늘이 한 자 한 자 불러 주는 번호를 입력했다.
아빠와 엄마, 정해영을 지칭하는 단어 아래로 네 번째 연락처가 나타났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오늘이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도, 마지막, 숫, 자는, 새, 생일이에요.”
그 말에 놀라서 급하게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1221. 외우기 쉬운 번호라고 생각했는데, 생일이라고?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쓰, 쓰던, 번호를, 쓰는, 거라.”
그래서 자신의 생일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오늘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 난쟁이에게 무작정 아버지의 묵주를 넘기는 거냐고.
화를 내고 싶은 건지, 걱정을 하고 싶은 건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오늘이 내게 해 준 것에 비하면 부족했다. 오늘도 그런 걸 바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다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직 한참 남긴 했지만…….”
12월 21일. 오늘의 생일.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을 처음 만났던 날.
“가지고 싶은 거 생각해 놓으세요. 생일선물 받아야죠.”
오늘이 처음으로 세상을 만났던 날.
“그동안 신세도 많이 졌으니까, 비싼 거 불러도 괜찮아요.”
“네? 아, 아뇨…….”
오늘이 손사래 쳤다.
오늘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뒤이어진 말은 생각지도 못한 이유를 담고 있었다.
“제, 제, 생일까지, 해준, 씨가 여, 여기, 있으, 면, 안, 되죠…….”
아. 이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그래도 오늘 씨 생일만큼은 꼭 기억할 테니까요.”
오늘은 내 말을 그저 농담으로 생각했는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보면서 다짐했다.
12월 21일. 그 날짜만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기로.
비록 그녀가 내 곁에 없게 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