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68화 (168/202)

# 168

46. 추억은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2)

내 세계와 이 세계는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근본적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르지만 얼핏 보기에는 비슷하게 보이는 면이 있다.

이것은 비단 ‘세계’에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정해준’과 나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평행 세계의 또 다른 나, 따위의 말로 정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심하면 지하에서 요괴가 기어 올라오는 세상이기는 해도, ‘정해준’의 성장 과정은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2학년 여름까지는.

그날을 기점으로 ‘정해준’의 세계는 나와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질마저 뒤바뀌진 않았다.

그러니 아마 지금 내가 난쟁이에게 던지고 있는 이 질문은 높은 확률로 ‘정해준’도 똑같이 던졌을 것이다.

“무슨 기억이 사라지는지 바로 깨닫는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난쟁이의 눈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그 눈빛 때문에 좀 더 확신했다.

‘정해준’도 나와 같은 말을 지껄였다.

“그 기억이 사라져서 저에게 변화가 생깁니까?”

“흠.”

난쟁이는 조금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다시피.”

그리움을 주어도 목표는 남았다.

“상실을 인지하고 있는 이상 바뀌는 건 없네. 잃어버렸다고 엉엉 울 나이는 지났지 않은가?”

“잃어버린 게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죠.”

“좀 더 자신을 믿어 보는 게 어떤가?”

난쟁이는 안쓰러운 얼굴로 날 보았다. 왠지 한 대 치고 싶어서 지그시 바라보자 난쟁이가 말머리를 돌렸다.

“어쨌든 대가는 그것이네. 바뀌지 않아.”

난쟁이는 지팡이 끝으로 날 가리켰다.

“만약 대가를 치르고 무너진다면, 그건 자네의 일이지.”

역시 난쟁이라고 해도 악마보다 덜하진 않다.

“사라질 기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미리 각오를 하게 되니 불가하네.”

“그럼 사라질 기억은 어느 정도 됩니까.”

“흠.”

난쟁이는 잠깐 고민했다.

“그리 크지 않아. 일상에서 카드를 잃어버렸는데 도무지 찾을 수 없을 때의 번거로움. 딱 그 정도 되는 기억이네.”

예시가 쓸데없이 구체적이다.

“카드가 없더라도 좀 귀찮을 뿐이지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 않은가?”

난쟁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저 예시에는 맹점이 하나 있다.

“카드처럼 다시 발급받을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새로 발급받은 카드가 기존의 카드와 전부 같은가? 아니잖나.”

툭. 툭.

난쟁이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는, 공기마저 멈춘 듯한 전망대는 지팡이 소리를 크게 울리게 했다.

“자, 그러니 어쩔 텐가? 대가를 지불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어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러날 수도 없다.

지금이 아니면 악마를 붙잡을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악마는 내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곧바로 날 현실에서 분리시키고 끌고 가지 않았던가. 지금 그대로 보냈다가는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소원을.”

그러니 이건 지금 해결하는 게 맞다.

입이 영 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무언가를 잃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악마를 상대할 방법을 알기 위해 난쟁이를 부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정작 그 순간이 오니 두려워졌다.

하지만 오늘과 약속했지 않은가. 부족한 대가는 내가 치를 것이다. 오늘이 아버지의 유품을 내놓았는데, 나도 그 정도 각오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원을 빌겠습니다.”

난쟁이는 활짝 웃었다.

“잘 생각했네!”

그래도 난쟁이가 악마보다 나은 점이 하나 정도 있긴 하다. 적어도 난쟁이는 입이 찢어지게 웃지는 않았다.

난쟁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보고 있으니 난쟁이의 손바닥 위에 마개가 달린 삼각플라스크가 뚝 떨어졌다. 플라스크의 주둥이 쪽에 노끈으로 만든 고리가 네 개 걸려 있었다.

“요청한 대로 4개월짜리네. 한 달이 지날 때마다 고리가 하나씩 삭아 없어질 거라네.”

난쟁이에게서 삼각플라스크를 건네받았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사용방법은 간단하네. 마개를 열고 염소를 부르면 돼.”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사용방법이다. 서유기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긴 호리병이었지만.

그 호리병은 상대가 대답을 해야 한다. 이 플라스크는 어떨까. 호리병에서 플라스크로 진화 아닌 진화를 했으니 그런 조건은 사라질 법하다.

“대답이 필요합니까?”

“하면 좋긴 하지.”

만약 악마를 가두지 못하면 고소하자.

“하지만 하지 않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갈 걸세. 겨우 4개월짜리 봉인 아닌가?”

고소는 다음 기회에.

“다만 마개를 열면 봉인은 풀리네. 그 점 조심하고, 너무 시끄러워서 목소리가 듣기 싫거든 마개를 왼쪽으로 돌리게나.”

난쟁이는 눈을 찡긋거렸다. 그 얼굴로 그래 봤자 반갑기는커녕 짜증만 솟구친다.

“오른쪽으로 돌리면 다시 목소리가 들릴 걸세. 아예 열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자, 그럼 자네의 그리움을…….”

난쟁이는 말을 멈칫했다.

“주의사항이 하나 남았군.”

“어떤 거요?”

“4개월 뒤, 악마가 풀려나면 그 녀석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책임지지 않을 거네.”

날뛴다는 소리를 우회적으로 돌려 하는 소리였다.

나는 빈 플라스크를 살짝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4개월 뒤는 내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여기가 악마 따윈 아무래도 좋을 만큼 난장판이 될 것이다.

돌아가지 못하면 그냥 죽지, 뭐. 용들이 시간을 돌려 주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그때는 과연 눈을 뜬 게 ‘정해준’일까 ‘나’일까.

“상관없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그럴 것 같았지.”

난쟁이는 여전히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난쟁이한테서 신뢰 같은 걸 받아서 어디다 쓰라고.

“흠, 흠.”

난쟁이는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

난쟁이는 숙였던 허리를 폈다. 주름이 가득한 깡마른 손가락이 지팡이를 감싸 쥐었다.

“그럼 기꺼이 가져가겠나이다.”

쿵.

지팡이가 바닥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실제로 들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시작된 그 소리는 곧 손끝까지 번졌다. 찌르르 울리는 감각을 속이고자 주먹을 쥐었다.

“해, 해준, 씨!”

오늘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불렀지만, 동시에 자연스럽게 악마의 시선에서 내 손을 가렸다. 말랑말랑하게 보여도 오늘은 특수과의 베테랑이다. 오늘은 내 눈을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이를 악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괜찮다. 난쟁이가 가져간 기억이 무엇인지 깨달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

“자기야.”

괜찮을 거다.

“쟤는 계산이 더러우니까, 나중에 귀찮아진다구?”

악마는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은 건방진 자세로 앉아 있다가 히죽 웃었다.

“그냥 나처럼 계산이 딱 떨어지는 거래를 하는 게 낫지 않았겠어?”

악마를 부르려다가 목이 멨다.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에야 목소리가 나왔다.

“쟤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다 할 수 있다니까. 응?”

악마는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네가 원한다면 쟤가 가져간 것도 다시 찾아와 줄 수 있어. 어때, 이건 좀 끌리지?”

나는 괜찮다. 흔들리지 않는다.

난쟁이가 가져간 기억은 ‘이곳’에서는 허상이었던 것이다. ‘정해준’의 미련이었다. 그러니 괜찮다. 나는 돌아갈 거니까.

“저기요.”

“으, 그런 딱딱한 호칭이 뭐니? 자기야, 라고 속삭여도 된단다.”

개소리는 무시했다.

오늘의 뒤에서 플라스크의 마개를 열었다. 다행히 악마에게는 투시력 같은 능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호칭은 아무래도 좋았는지 플라스크가 달칵거렸다.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한번 악마를 불렀다.

“메피스토펠레스.”

악마님이라고 경칭을 붙이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명함에 있던 이름을 사용했다. 악마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응, 왜, 자기야? 소원 빌 거야?”

플라스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박력 넘치게 바로 이름이라니. 어머머, 살 떨린다, 자기야.”

“잘 보세요.”

“응?”

“진짜 떨리고 있을 텐데.”

“으응?”

악마의 몸이 쭉 늘어났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저런 장면은 영화에서 볼 때나 재밌지, 눈앞에서 실제로 펼쳐지게 되면 무척이나 역겨운 장면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만 사라진 기억 때문에 도리어 냉정해진 눈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이를 악물어 턱이 아팠다. 난쟁이는 거드름을 피우며 플라스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악마를 구경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악마가 난쟁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까 전망대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던 노인처럼 볼품없는 날개가 이리저리 뻗쳤지만 그것도 플라스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난쟁이는 비명인지 욕설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손을 쭉 뻗었다.

“너, 너어! 너, 이 새끼가아아아아아!!!!!”

늘어나서 찢어지고 구멍 난 팔이 난쟁이의 다리를 붙잡았다. 새의 발톱처럼 길어진 손톱이 난쟁이의 다리를 파고들었지만 난쟁이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이이이이이익!!!!”

난쟁이는 지팡이로 자신을 붙잡은 악마의 손등을 꽉 짓눌렀다.

“잘 지내게나.”

퐁!

그로테스크한 악마의 모습과는 달리 마무리는 꽤 귀여운 소리가 났다.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뒤흔든 것 치고는 초라한 퇴장이다. 나는 악마의 보잘것없는 날개도 모두 들어간 걸 확인한 다음에 마개를 닫았다.

플라스크 바닥에 염소 머리를 한 두발짐승이 털썩 앉아 있었다. 왜 굳이 두발짐승이라고 했냐면, 그 염소가 이족보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는 엄지보다 조금 더 큰 정도. 염소는 바닥을 더듬거리다가 벌떡 일어나 플라스크 병을 쾅쾅 쳤다.

마개를 오른쪽으로 조금 돌렸다.

“…거 아냐! 자기야, 우리 이러지 말자!”

“…….”

마개를 다시 왼쪽으로 돌릴지 말지 조금 고민했다.

“우리 조금 더 오붓하게 대화할 수도 있잖니? 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어? 나, 자기 괴롭힐 생각 없다니까?”

“……자, 잠깐, 만요.”

오늘이 내 손에서 플라스크를 빼 갔다. 뭘 하려는가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늘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플라스크를 마구 흔들었다.

“윽, 악, 자, 잠깐, 악!”

이족보행 염소가 플라스크 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탁.

난쟁이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 그럼 나는 이제 가 보겠네. 오랜만에 소원을 들어주니 기분이 좋군.”

“…….”

“모쪼록 즐겁게 음미하길 바라네.”

신나게 플라스크를 흔들어대던 오늘이 딱 멈췄다. 난쟁이는 마지막으로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더 두드리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긴장이 풀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해, 해준, 씨?”

손이 덜덜 떨렸다.

“해준, 씨!”

오늘이 달려왔다.

“캭! 저 난쟁이가 지독한 걸 가져갔지? 거봐, 그냥 깔끔하게 나한테 영혼만 줬으면 괜찮았……”

시끄러워서 마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악마를 괴롭히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몇 번이고 손에서 미끄러지는 걸 간신히 붙잡아서 잠금을 풀었다. 자꾸 오류가 났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확실히, 어떤 기억이 사라졌는지는 소원이 성립된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대, 대가, 부, 족… 했어요?”

그러니까 괜찮다. 이건 내가 멍청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아까 말했잖아. 이건 내 것이 아니라 ‘정해준’의 미련이라고.

“어, 어떤, 걸, 준…….”

잠금을 풀었다.

전화번호부. 전화번호부…….

이미 알고 있는데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의 늪에 빠져 나는 숨이 막혔다. 육신에 남아 있는 ‘정해준’의 잔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감정이 내게 옮겨 왔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

‘그리움’이다.

새하얗게 비어 있는 전화번호부가 액정 위로 떠올랐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가족 세 명만 저장되어 있었다.

세 개의 전화번호.

전화를 걸어 봤자 없는 번호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차마 지우지 못하고 내내 간직했던. 더 이상 그리워하지 못하면서도 차마 지우지 못했던.

…‘정해준’의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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