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46. 추억은 너를 그리워하지 않는다(1)
난쟁이는 말 그대로 나를 끌어 올렸다.
물속에 깊이 잠겨 있다가 뭍으로 나올 때처럼, 가벼웠던 몸이 무거워졌다. 숨 쉬기가 버거울 지경이다.
“컥, 콜록, 콜록!”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손이 있었다.
오늘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현실로 돌아와도 전망대에는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날씨가 바뀌는 건 그렇다 쳐도, 염소 뿔을 단 노인이 유리에 찰싹 달라붙는데 남아 있을 간 큰 인간은 없었다. 사람을 대피시키는 동안 오늘의 신분증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눈앞에 위협이 닥치면 사람들은 책임지려 드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도 툭툭 튀어나오는 괴물의 존재를 보아 왔다. 담당자의 말을 듣는 게 목숨을 부지하기에 좋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잠시 신세를 진 직원실을 나와서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는 네 명이 있다. 두 명은 인간이고, 두 명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두 명 중 하나는 악마고, 하나는 난쟁이다.
난쟁이가 제일 키가 크다는 아이러니함이 있지만 영업 실적 나쁜 악마가 맞은편에 앉아 있다.
난쟁이는 테이블 위에 있는 빨간 명함을 보고 즐거워했다.
“드디어 명함을 팠나?”
“손대지 마! 내 거야!”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애처럼 구나.”
악마는 부루퉁한 얼굴로 난쟁이를 노려보았다.
“손님을 가로채는 건 하지 않기로 했지 않아, 우리?”
난쟁이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악마를 보았다.
“저건 자네 고객이 아니잖나.”
“고객 맞거든?”
“요즘은 고객을 납치하기도 하나?”
“정중하게 모신 거야.”
“두 번 모셨다가 육체가 먼저 죽겠는데.”
그리고 문제의 고객이었던 나도 난쟁이의 의견에 동의했다.
내가 안에서 악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악마는 내 영혼을 억지로 가두었고, 제아무리 많은 걸 본다 해도 인간인 오늘은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난쟁이를 불러낼 만한 일이었던 거다.
“아, 몰라! 왜 방해하고 난리야?”
악마는 이제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악마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런 건 정해영도 진즉 졸업…… 하지는 못했지만, 정해영이 했다면 두 발로 서라며 등짝을 때렸을 것이다.
난쟁이는 우아한 손짓으로 지갑을 꺼내 악마의 명함을 넣었다. 악마가 얼굴을 찌푸렸다. 노파의 얼굴이 살짝 튀어나왔다.
“흠, 얼굴 좀 잘 관리 하게.”
난쟁이는 뺨을 톡톡 두드리며 악마의 속을 뒤집어 놨다.
악마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지만, 난쟁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난쟁이는 악마가 떠드는 걸 무시하고 좋을 대로 말했다.
“그런데 아직 고객과 이야기가 안 끝났단 말이지.”
“뭐라구?”
욕설을 퍼붓던 악마가 당황해서 눈을 끔뻑였다. 난쟁이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나와 오늘을 돌아보았다.
“저 아가씨가 너무 급한 나머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넉넉하게 대가를 지불해 버렸네.”
“……그거 사기 아냐?”
“어허. 사기라니.”
난쟁이는 젠체하며 말했다.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한 거지.”
“협정에 어긋나잖아.”
“내가 숨기면 그렇겠지.”
공정거래, 공정거래 하더니 협정도 있는 모양이다. 혹시나 오늘이라면 알까 싶어 돌아봤더니 휴대폰을 붙잡은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화면이 보이길래 슬쩍 보니, 특수과 단체 메시지 방이다.
[악마와 난쟁이가 무슨 지랄 맞은 협약을 맺었나 봐요. 그쪽 시장을 양분하기로 한 모양인데, 유럽에 공문 보낼 준비 해요]
일 이야기구나.
다시 고개를 들어 난쟁이와 악마를 보았다.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내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의문이야 많지만,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나씩 처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왜 악마는 알고 있는 것을 난쟁이는 알지 못하는가?’
가장 가까운 의문을 염두에 두자.
“지금 자네에게 말해 주고 있지 않나. 소원을 빈 자가 너무 급박해 보였기에, 그의 요청에 따라 대가를 받고 움직였네.”
난쟁이의 눈이 오늘을 스쳤다. 오늘은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액정은 무사했다.
“대가가 부족했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내가 당장 움직인다는 조건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가가 남아 버렸지.”
난쟁이의 눈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그녀는 남은 대가를 자네가 사용하길 원했네. 그것까지도 소원으로 계산되었지만 여전히 많이 남았네.”
난쟁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오히려 당황한 건 악마 쪽이었다. 악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늘을 보았다.
“도대체 쟤가 뭘 줘서 그런 거야?”
“고객의 비밀은 지켜 줘야지.”
악마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협정 위반!”
“그,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때마다 협정 위반이라 외치는 거 그만두지 않겠나?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따질 건 똑바로 따져야지! 으, 비행기 타기 싫어서 뭉그적거렸더니 이거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네.”
악마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아까 내 앞에서는 한 번씩 욱하기는 해도 여유롭게 굴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기, 자기야.”
오늘이 눈을 찌푸렸다.
“너 원래 쟤랑 모르는 사이잖아?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악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악마의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면서 난쟁이를 보았다. 난쟁이는 혀를 쯧쯧 찼다.
“인간의 만남을 자네의 허접한 염소 눈깔로 보려고? 아서라,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네.”
“그건 너만 그런 거고. 나는 다 아는 수가 있거든.”
악마가 눈을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곱디고운 모습이지만, 말했듯이,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나는 지금 상황이 무척 이해가 안 돼.”
“자네가 멍청해서 그런 건 아니고?”
“똥자루는 좀 닥쳐!”
노파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난쟁이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기억하는 쟤는 똥자루 네가 이미 혼의 반절을 가져갔단 말야. 그런데 왜 지금은 또 다 있대? 이해가 안 돼.”
“아, 그거.”
난쟁이가 아는 척했다.
“나도 덕분에 알아보는 게 늦었긴 했지.”
“그치? 쟤가 뭔지 똥자루, 넌 알아?”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난쟁이는 옆에 세워 둔 지팡이를 잡고 일어났다. 툭. 툭. 지팡이 끝이 바닥을 걷어찼다.
“내게 중요한 건 내가 제시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나, 없나일 뿐이네. 능력이 있는 인간이면, 설사 그게 인간이 아니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난쟁이는 나에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자, 남은 대가로 무엇을 원하는가?”
여기까지는 오늘이 이야기했던 대로 흘러갔다. 괜찮다. 할 수 있다.
‘해, 해준, 씨. 괜, 찮, 아요……?’
‘정해준’이 2019년을 살았던 시간에서 ‘정해준’과 ‘오늘’이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가 되는가?
아니. 문제 되지 않는다.
이 시간을 살고 있는 건 ‘나’라는 방증이 될 뿐이다. 내가 쌓아 올린 인연은 나의 것이다. 오히려 ‘정해준’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니, 종착역도 다를 수 있다는 증거이다.
‘괜찮습니다. 아니, 그보다!’
나는 텅 빈 직원실에서 오늘을 붙들고 다그쳤다. 난쟁이는 악마처럼 무작정 영혼을 빼가는 건 아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대가로 영혼을 제시할 수 있는 놈이다.
그가 대가랍시고 ‘정해준’에게서 가져간 걸 봐라.
‘대가! 오늘 씨가 대가를 준 거죠?’
‘네? 네…….’
겁이 없어도 너무 없다. 오늘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준 겁니까!’
오늘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평화로운 미소였다.
‘대가가, 좀, 나, 남았, 어요.’
‘남을 만큼 큰 대가를 지불했다고요?!’
‘남, 은, 건… 해, 해준 씨가, 사용, 할, 수, 이, 있게, 해 달… 랬어요….’
‘그걸 하고도 대가가 남았다고요?!’
오늘은 내가 대가가 뭔지 물을 때마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잠깐 말을 멈추는 틈에, 저 할 말을 쏙 해 버렸다.
‘그, 대가로, 무, 물어, 보세요.’
‘…….’
‘악마, 를, 잠, 잠시간, 봉인… 할, 수, 있는, 방법이요.’
내가 대답을 않고 있자 오늘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달랬다.
‘원, 래…… 해, 준, 씨도, 난쟁이, 에게, 무, 물어, 보려고, 했, 었죠…?’
사람 생각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
나는 난쟁이를 보았다.
“비밀스런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요.”
“흠.”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쳤다. 고풍스러운 장식을 한 지팡이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탑과 부딪쳐 경박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소리를 냈다.
“그래. 본디 소원은 가장 비밀스러워야 하는 법이지.”
난쟁이는 오늘을 가리켰다.
“저 아가씨에게는 안 알려 줘도 괜찮고?”
“괜찮습니다.”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다.
만약 대가가 부족하다면, 남은 건 내가 치르기로 했다.
슬쩍 오늘을 보자 오늘은 나를 위해 웃어 주었다. 나도 괜찮다고 웃어 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난쟁이에게 주었던 게 무엇인지 생각나서 차마 웃어 주지 못했다.
오늘은 전망대로 나와 악마와 난쟁이를 보기 직전, 내 고집에 졌다.
‘정말 별게 아니라면 가르쳐 주세요.’
‘그으…….’
‘말 안 하면 별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오늘이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에서 눈치챌 수밖에 없다. 아니, 애초에 대가가 남았다는 것에서 뻔하잖아. 오늘이 난쟁이에게 준 대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결국 오늘이 무엇을 주었는지 들었기 때문에, 난쟁이가 여러 조건이 붙은 소원을 들어주고도 대가가 남았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아. 이건 내 서비스지. 나도 이렇게 듣는 귀가 많은 자리에서 소원을 들어준 적은 없어서 말야.”
난쟁이는 지팡이로 크게 바닥을 내리쳤다. 묵직한 소음이 공기를 흔들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 기차 안에서 난쟁이를 불렀을 때처럼 시간이 멈췄다.
악마가 나를 붙잡았을 때처럼 아무도 없는 정적인 공간.
“쓰읍.”
난쟁이는 인상을 쓰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동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악마가 혀를 차며 사라졌다.
“흠, 흠. 좋아. 이제 방해꾼은 없네. 비밀은 보장되지.”
난쟁이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자네는 이미 내게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대가가 가중되어야 하지만……. 이번은 다른 이가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지.”
내 기분은 기분이고, 난쟁이의 말 자체는 나쁠 게 없었다.
“물론 지난번 자네가 내게……큰 모욕을 주었지만, 과거는 과거. 나는 구차하게 굴지 않으니 그건 걱정 말게나.”
다리화 때 일을 아직 속에 품고 있군. 좀스럽기는. 나는 나이 먹고 저렇게 되지 않기로 다짐했다.
내 굳은 결심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치며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남은 대가로 원하는 소원이 뭔가?”
“악마.”
“흠?”
“악마를 봉인할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방법으로요.”
오늘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였다.
‘그, 그으…….’
오늘이 말하기를 꺼려 하는 건 드문 일이다. 거기서부터 예상은 했다.
‘제, 그, 묵주, 를…….’
묵주?
‘오늘 씨가 기도에 쓴 묵주라면 이 팀장님도 인정했으니 대단한 거긴 하겠죠.’
그렇지만 이렇게 대가를 남길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난쟁이가 셈하는 법을 모르긴 하지만.
게다가 정말 그냥 묵주였다면 오늘이 이렇게 망설이지도 않았을 테고.
‘……가, 쓰던.’
오늘이 난쟁이에게 주었던 대가를 말했다.
‘아빠, 가. 쓰던, 묵주… 였어요.’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 오늘이 10년 동안 기도를 바쳤던 묵주.
난쟁이는 안타까워했다.
“시간이 좀 걸려도 괜찮은 방법이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이라면 남은 걸로는 조금 부족하네만.”
“그건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흠.”
난쟁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악마를 영원히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네.”
“알고 있습니다.”
올해가 얼마나 남았더라.
“반년. 아니, 4개월만 얌전히 만들 수 있으면 됩니다. 기왕이면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는 상태면 좋겠는데요.”
“흠. 4개월에, 대화가 되는 거라면 완벽한 봉인도 아니고. 좋네. 그 정도면.”
툭. 툭. 난쟁이의 지팡이가 바닥을 짧게 내리쳤다.
“자네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자네의 그리움이네.”
“……그건 이미 한 번 지불한 대가 아닙니까?”
“흠. 저번엔 기억하지 못하더니 이번엔 기억하는가?”
난쟁이는 짓궂게 웃었다.
“다시 감정이 생겼지 않은가.”
“……그.”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정해준’이 난쟁이가 그리움을 달라 했을 때, 무어라 되물었을지.
‘그리움이 사라지는 건 괜찮은데, 그렇다고 제가 목표를 잃는 건 안 됩니다.’
그리움은 없지만, 목표는 남았다. 그런 소원이었기 때문에. ‘정해준’은, 멈추지 않았다.
“아, 하지만 걱정 말게. 저번과는 조금 달라. 지난번에는 영구적인 능력을 원하는 것이었으니, 대가도 좀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지.”
보호 능력의 대가. 그리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가져갈 건 자네가 그리워하는 기억 중 하나일세. 내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자네는 바로 깨달을 것이고, 그리워하겠지. 그것이 대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