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45. 나그네 세상(5)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인간의 영혼이라니!”
여자는 손바닥을 마주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완전 궁금하지 않니?!”
악마는 발을 동동거렸다. 굉장한 미인이긴 했지만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스럽게 말한다. 연기 지지리도 못하는 배우를 영화관에서 마주쳤을 때의 기분이 들어서 썩 즐겁진 않았다.
“그래서 넌 뭐니?”
“정해준입니다만.”
“어…….”
악마가 눈을 한 바퀴 굴렀다.
“내가 그거 묻는 거 아닌 줄 알지, 자기야?”
기억 속에서 봤던 악마의 모습이 동화책 삽화에서 독 사과를 건넬 것같이 생기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너그럽게 그 호칭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애초에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렇게 불리고 싶은 마음도 없긴 한데.
얼굴이 예쁘면 뭐 하나. 악마인 것을. 다 필요 없다. 속에 든 게 중요하지.
그래서 달갑지 않은 기분을 담아 악마를 꼬아 봐 줬다. ‘정해준’의 계약을 생각해 보자.
‘정해준’은 정말 준비가 철저했다. 악마가 중간에 자신과 접촉하는 것을 막는 조항도 있었고, 영혼을 가져가는 것 외에 해하는 걸 금지하는 조항도 있었다.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정해준’은 계약 완료 이전 악마의 접촉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정해준’이 나와 같은 과를 나온 걸 몰랐더라면 대학에서 법이라도 배운 줄 알았을 것이다.
“계약에 의거하면…….”
“네가 한 계약 아니잖아?”
“이 몸 안에 든 영혼에 대한 계약에 의거하면…….”
“에이씨!”
호수에서 악마가 읊조리던 욕이 떠올랐다. 잔뜩 찌푸린 얼굴이 쭈글쭈글한 노파가 되었다가 펴졌다.
여자는 화사하게 웃었다.
“우리 계약은 이미 끝났잖니. 그러니까 그건 더 이상 상관없는 얘기란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럼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에이 씨팔!”
“…….”
“어머, 내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 자꾸 재채기가 나오네.”
“…….”
“응? 뭐라고 했니?”
여름, 그것도 서울에서 제일 높은 탑에 앉아서 꽃가루는 무슨. 가당찮아서 헛웃음을 터뜨리려다가 말았다. 악마는 악마니까.
용들이나 소원을 들어주는 난쟁이도 전지전능은 아니다. 당연히 눈앞의 악마도 전능하진 않을 테지만 악마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은 어쩔 수 없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그래도 충고는 했다.
“꽃가루 말고 먼지 알레르기가 더 나을 텐데요.”
“응?”
“요즘 미세먼지가…….”
악마는 눈을 깜빡이다가 히죽 웃었다.
“인간은 그릇을 따라가기 마련이라니까. 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이 닮았구나.”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악마는 여전히 노래하는 듯 말했다.
“나도 그렇게 계약서를 가지고 찾아온 애는 처음 봤는데, 뭐. 재밌어서 나쁘진 않았어. 그 난쟁이 놈은 짜증 났지만.”
“그냥 짜증 나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장사 안 돼서 죽겠는데, 그놈이 자꾸 내 손님마저 채가잖아.”
악마는 한참을 영업직의 괴로움에 대해 떠들었다. 인간처럼 실적을 채워야 한다거나 굶어 죽는 건 아니지만 영혼을 모으는 건 삶의 보람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한참 듣고 있으니 굳이 ‘정해준’의 혼이 아니더라도 내 혼도 같이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도망칠 곳도 없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전망대는 여전히 어둡고 사람이 없었다. 악마가 주절주절 풀어놓는 이야기만 공허하게 공간을 맴돌았다.
“서로 돕고 살면 오죽 좋니?”
마침내 악마는 이딴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말이지, 본인부터 실천하란 말이다. 죄… 가 없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선량한 인생을 살아온 인간을 아무도 없는 전망대에 가둬 두지 말고.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 되도 않은 호칭도 집어치우라니까.
“있지.”
이곳에서도 전화가 터질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에 악마가 나를 불렀다.
솔직히 전화가 안 될 것 같긴 한데, 김유신도 와이파이를 차단하지 못했으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저 악마는 장군님과는 달리 현대 복식도 단단히 챙겨 입고 있지만.
“그거 잠깐 빼 주면 안 돼?”
악마는 내 손목에 있는 묵주를 가리켰다. 나는 묵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악마에게 물었다.
“십자가에 약합니까?”
백주하가 병원에서 내게 뿌려 댔던 성수와 소금이 그리워졌다. 그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아아니.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퇴마 당하고 그러진 않지. 당하는 애들도 있긴 한데 걔넨 급이 낮고.”
악마는 자기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아니고.”
그러니 그걸로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얼굴이다. 어차피 그럴 능력도 없다. 이곳이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괜찮으면 계속 보고 있으세요.”
“엑, 그런 의미였어?”
악마는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빼 주면 안 될까, 자기야?”
내가 비록 악마는 처음 만나 보지만 저 말을 들어주면 안 되는 건 안다. 그 정도의 머리는 있다.
“해치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아, 혹시 불안하면 계약이라도 할까?”
악마의 손에 종이와 볼펜이 떠올랐다.
“육체를 절대 해치지 않는다. 어때?”
이런 악마 같은……. 악마구나.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니 난쟁이한테 밀리죠.”
“…….”
“…….”
악마가 가져가는 대가는 영혼. 소원의 경중에 상관없이 영혼만 가져간다.
나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제 내면에 또 다른 자아가 있어서요. 방금 걔가 말했습니다.”
악마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 자기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걔랑 아주 똑같은 애인 건 알겠어.”
칭찬인지 욕인지 잘 모르겠다. 욕이겠지.
악마는 종이와 볼펜을 치웠다.
“그래, 계약은 나도 장난이구.”
참고로 전혀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다.
“해치지 않겠다는 건 진심이야. 소원이 아니면 나는 영혼을 가져가지 못하니까. 이건 진짜야. 각서 써 줄까?”
“혼자 쓰신다면 말리진 않습니다.”
“쳇…….”
악마가 짧게 혀를 찼다. 정말 영업을 지지리도 못 한다. 난쟁이가 독점이 어쩌구 한 이유가 있다. 경쟁자가 저래서야 싫어도 독점이 되겠지.
“아이, 그거 차고 있으면 널 제대로 볼 수가 없어. 응? 우리 한 번만 빼자. 아주 잠깐이면 돼.”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니까요. 우리 계약은 끝났다면서요?”
아니, 잠깐. 계약이 끝났다는 거지, 지금?
오늘의 말이 스친다. 도돌이표라고 했었지. 시간은 반복되었지만 세계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정해준’의 계약이 완료되었다…….
그렇다면 ‘정해준’의 영혼은 악마의 손에 있다. 는 것도 사실이겠지.
“아까 말했잖니? 말 안 했었나? 내가 영혼을 가져가면 잘해 봐야 사망이구 운이 좋아야 혼수상태란 말이지. 이렇게 두 발로 서서 개소리를 하는 인간은 처음이야!”
여우는 나를 잡귀 취급하더니 악마는 그래도 인간 취급을 해 주는군. 개소리를 해 댄다고는 하지만.
어느 쪽이 더 내게 후한 평을 해 주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네가 뭔지 정말 궁금하고…….”
악마는 싱긋 웃었다. 통통 튀는 목소리가 구름을 거니는 것처럼 부드럽게, 그러나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나를 향했다.
“네가 이곳을 완전히 망쳐 주기를 기다리고 있어.”
악마구나.
뭐라 반응하기도 힘들기도 하고 꺼림칙한 마음에 가만히 있었다. 보통 이런 애들은 알아서 잘 떠들기 마련이다.
“보통…….”
그래, 이렇게.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들 좀 더 잘해 보려다가 다 망해 버리더라고.”
나는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서 그런 말을 들으면 뒤통수를 후려쳐 주고 싶어진다. 나긋나긋한 얼굴이 더 재수 없다.
“지금 나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
……전혀 아니다. 진짜 아니다. 그런 뻔히 보이는 생각을 내가 왜 하겠는가.
“난 인간들이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할 때가 너무 좋더라.”
“……그래서, 그 말 하려고 온 겁니까?”
“네가 누군지 보려고 왔다니까?”
악마가 노래하듯 말했다.
의도가 뭘까. 악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난쟁이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악마는 알고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영혼? 악마가 ‘정해준’의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그건 사실일까?
“나는 말이지, 자기야.”
그 소리 좀 집어치우라니까.
“인간들의 영혼이 잔뜩 나오길 기다리고 있단다. 작년에 기대하고 여기까지 왔었는데, 방해꾼이 있었거든.”
악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독일에서 여기까지 비행기로 몇 시간인 줄 아니? 용들이 난리 친 바람에 또 타고 왔잖아. 정말 타기 싫었는데 안 탈 수도 없고.”
“그냥 안 오면 되잖습니까.”
“어머머, 어떻게 그래? 정해진 틀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생겼는데.”
악마는 눈을 찡긋거렸다.
“너 그 여자애 본 적 있지?”
“누구요?”
“왜, 걔 있잖아, 걔.”
악마가 친근하게 부를 만한 이는 알지 못한다.
“걔. 금발에, 아. 지금은 남자 몸을 달고 있지.”
“……도끼를 좋아하는 그 친구요?”
“응, 걔.”
“모릅니다.”
“응, 아는 거 알아. 걔가 말이지, 원래는 나한테 소원을 비는 게 지금이 아니거든? 두 달 정도 빨라졌어.”
그 여자… 남자의 도끼가 이산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오늘을 통해 보았다. 그게 악마 짓이었으니 청룡이 도끼를 챙겨 가라고 했었겠지.
대충 이야기가 들어맞기 시작한다.
악마는 알고 있다. ‘이곳’의 ‘끝’을.
“그게 다 뭐 때문일 것 같니?”
보통 이런 질문이 나오면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
“바로 너란다!”
그래, 놀랍지도 않다.
“사실 널 모른 척 그냥 둬도 되긴 한데. 응, 이건 비밀인데 인간은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잘 망해 버리더라고.”
날 욕하는 건지 인간을 욕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둘 다 같은데 화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신기하잖아? 영혼이 없으니 돌아와도 돌아오지 못해야 할 인간이 걸어 다니다니. 몸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저주나 꼭두각시도 아니고.”
악마의 말에 다시 가락이 붙었다. 듣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목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영혼이 없는 몸에 자리 잡다니. 그건 아무나 하지 못해.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악마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래서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이리 찾아왔단다.”
악마는 등 뒤에 있는 유리창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서울이 보였다.
“마침 계약을 원하는 이도 있었고, 끔찍하게 귀찮지만 가엽기 그지없는 용도 괴롭힐 겸 와 봤지.”
“……반겨 주는 사람은 없을 텐데요.”
“반겨 주는 사람을 찾아가면 그게 악마겠니?”
악마는 흥, 하며 새침데기같이 굴었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했고, 금방 얼굴빛을 바꾸며 생글거렸다.
“이것도 비밀인데, 난 내가 부속품 하나를 가져왔으니 사실 금방 망해 버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뭐가요?”
“뭐기는, 전부가.”
악마는 악마답게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웃었다.
“그런데 그 빈자리를 네가 채우면서 어떻게 비틀비틀 잘 굴러가더라구.”
입꼬리는 그대로 귀까지 찢어졌다. 그렇게 찢어진 입으로 악마는 여전히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용과 그 묵주에 담긴 가호 때문에 찾기가 어려웠지만 이렇게 찾았으니 다 되었단다. 넌 여기에 나와 같이 있어 줘야겠어.”
“……거절한다면요?”
“어머나,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순 있고?”
“…….”
악마가 두 손으로 불을 문질렀다. 찢어진 입꼬리가 붙기 시작했다. 엉겨 붙은 살이 징그러웠다.
“이 덧없는 유리들이 무너질 때까지, 나와 같이 있는 거야. 둘이서, 오붓하게. 어때?”
오늘의 도움이 없어도, 그 순간 내게도 보였다.
전망대 너머의 하늘이 반짝였다. 겹겹이 쌓인 유리창이 있다. 몇 겹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쌓여 있다.
쩌어억.
가장 아래, 지상에 가장 가까운 유리창에 금이 가며 유리 가루가 떨어졌다. 햇빛도 없는데 유리 가루는 반짝반짝 빛났다.
오늘이 내게 보여 준 것처럼.
“흠흠.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구먼, 염소야.”
악마가 벌떡 일어나 허공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뭐야? 어떻게 왔어?!”
허공에서 불쑥 지팡이 하나가 튀어나왔다. 야속하게도, 본 적이 있는 지팡이였다.
지팡이 다음은 손이, 발이 나타났다. 얼굴은 가장 늦게 나왔다.
“공주님께서 불러오라 하셨거든.”
“이 난쟁이 똥자루만 한 게!”
사실적시인지 욕설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악마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오늘이다. 분명 오늘이 불렀다.
난쟁이는 웃고 있었다. 입가의 주름이 일그러지면서 마치 나를 비웃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꺼내기 위해 난쟁이에게 무얼 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