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65화 (165/202)

# 165

45. 나그네 세상(4)

새까만 구름이 몰려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다. 여름이니만큼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도저히 묵주를 차고 있을 수가 없었다.

테이블에 반쯤 내팽개치다시피 내려놓은 묵주가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이, 이건…….”

비록 청룡이 없다고는 해도, 이 잠실 타워는 아사달 인증 마크가 붙은 공덕을 쌓는 탑이다. 몇몇 사람들이 잠실 타워 주위를 돌며 비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탑을 건들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청룡님은 정말 잠실에 없습니까?”

일단 집주인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네, 네에.”

도움이 안 된다.

천둥소리와 함께 불빛이 깜빡거린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전망대 안을 가득 메웠다.

테이블 위를 도는 묵주를 노려보았다. 악마는 왜 갑자기 지랄이지? 난쟁이가 ‘정해준’을 뒤늦게나마 알아본 것처럼 이 악마도 ‘정해준’과 연관이 있어서 알아본 건가?

타이밍이 너무 이상하잖아. 이제 와서 새삼스레?

우르릉… 쾅!

다시 한번 번개가 쳤다.

먹구름이 몰려들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잠깐 어수선해졌던 사람들도 진정했다. 하지만 나와 오늘은 안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나? 하지만 힘없는 초능력자 하나와 공무원 하나가 무작정 대피시킨다면 당장 저녁 뉴스에 나오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도 안 가는 와중에, 전망대 창문에 붙어서 밖을 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 대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으아악!”

불이 모두 꺼졌다. 먹구름 때문에 하늘이 깜깜해진 탓에 전망대 안은 불길할 정도로 어두워졌다.

“키히히히히.”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망대 바깥, 비쩍 마른 노인이 손톱을 날카롭게 세운 채 유리에 매달려 있었다. 좌우 크기가 다른 뿔이 노인의 이마에 달려 있었다. 새까만 날개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깃털이 숭숭 빠져 있고, 남아 있는 것들도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키힉.”

노인은 전망대에 있는 인간들을 보며 침을 줄줄 흘리며 웃었다.

“에, 엘리베이터!!”

사람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를 향해 몰려갔다. 직원들이 허둥거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기가 나갔을 때 엘리베이터도 다 끊겼다.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오늘 씨, 저거 진짜 맞습니까?”

오늘은 눈을 잠깐 크게 떴지만 고개를 저었다.

“하, 환상, 이에요.”

나도 그동안 배운 게 있다, 이거야.

확인절차는 중요한 법이다.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올게요.”

“저, 저도, 같이, 가요!”

묵주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초능력자 면허와 오늘의 신분증이면 어떻게든 될 거다. 공권력이 없는 연약한 초능력자 면허와는 달리 특수과는 경찰청 소속이다. 어떻게든 저녁 뉴스에 나오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키히힉.”

소름이 돋았다.

전망대에 찰싹 달라붙은 노인의 눈이 나를 똑바로 향했다.

“찾, 았, 다.”

* * *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는 건 몇 차례 겪어 보았다. 익숙해지기 싫은데 이게 어떤 상황인지 바로 알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자.

‘이건 어떤 기억이지?’

그 전에 생각할 것도 있지.

‘이건 무엇이 보여 주는 기억이지?’

눈앞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다. 잠실 타워에서 내려다본 서울이 아니라, 푸른 호수가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가 호수 주위를 빙 두르고 있었고, 그 사이로 빛바랜 붉은 지붕의 집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좀 더 고개를 들어보면 높은 산들과, 하늘이 보였다.

찰랑.

발이 차가웠다. 호수에 담근 발이 시렸다.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다.

‘정해준’은 주기적으로 유럽에 다녀왔었다.

“나는 난쟁이처럼 친절하지 않아.”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금발을 빨간 리본으로 묶은 여자아이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전형적인 서양 아이의 모습이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유려한 한국어였다.

“걔는 뭐라더라? 공정거래? 어디서 이상한 물이 들어서 빽빽거리는데, 나는 그렇지 않거든.”

아이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모습이 바뀌었다.

“난쟁이는 뭐, 대가를 먼저 제시하고 네가 그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얼빠진 녀석이지만…….”

여자아이에서 남자아이로, 좀 더 큰 모습으로, 눈이 돌아갈 만큼 예쁜 얼굴이 무심코 흠칫 물러날 정도로 진물이 흘러내리는 얼굴로. 노파가 되었다가 갓난아이가 되었고, 청년이 되었다가 깔깔 웃는 소녀가 되기도 했다.

“나는 아냐.”

아. 그것은, 어쩌면.

“하지만 나는 네가 대가만 치르면 무엇이든 이루어 줘. 빡빡한 조건 같은 건 하나도 없어.”

‘정해준’에게는 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보고 싶다고 했었지. 어떤 걸 원해? 부? 명예? 사랑? 네 영혼만 준다면 다 가질 수 있어.”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래. 그럴 것 같았어. 그런 걸 원하는 애들은 날 찾기 위해 몸소 여기까지 찾아오진 않거든. 성의 없이 전령을 띡 보낼 뿐이지.”

청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럼 어떤 걸 원할까?”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정해준’을 가리켰다.

“복수?”

“아니.”

“그럼?”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와 명예와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니면 보통 복수를 꿈꾸던데.”

“그건 해 줄 사람이 있어.”

“그렇구나. 그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넌 난쟁이에게도 소원을 빌었잖아? 흐응, 어디 보자. 그리움을 주었구나? 그럼 영혼의 질이 조금 떨어지는데.”

남자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런데 그리움을 주었으면서도 어떻게, 여기까지 잘도 왔네? 네 영혼은 그리움이 사라지니 반절은 비워졌는데.”

“그 감정이 사라졌다고 해서 목표까진 잃지 않으니까.”

“아하, 그런 소원이었구나?”

‘정해준’은 어린아이의 말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나는 네게 영혼을 바치겠다.”

“그래, 그러렴. 소원을 비는 인간은 좋은 인간이지. 나에게 영혼을 바치렴.”

소년은 노래하는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영혼을 준다면 무엇이든 이루어 주겠단다. 부와 명예, 사랑, 복수! 필요 없다고? 그래도 괜찮아.”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던 목소리에 차츰 가락이 붙었다. 소녀는 팔을 양쪽으로 쭉 뻗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었다. ‘정해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가, 소녀는 호수 위에 올라섰다.

“나는 네가 원하는 건 다 이루어 줄 수 있어. 내게 네 영혼만 준다면!”

옛날 연극에 나오는 광대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노파의 이마에는 염소의 뿔이 있었다.

“그러니 네 마음속에 있는 작은 계획을 내게도 알려 주렴. 네가 내게 영혼을 주기로 한 이상 나는 언제나 네 편일 거란다.”

이 기억은 ‘백’에 남아 있는 ‘정해준’의 기억이 아니다. 묵주를 통한 기억도 아니고, 하다못해 업이 얽혀서 보게 된 기억도 아니다.

그래. 이건 악마가 보여 주는 기억이다.

염소 뿔을 단 노파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원하니?”

이미 그리움을 대가로 바쳤던 ‘정해준’이 대답했다.

“나를 인식하지 못하게 해 줘.”

‘정해준’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냈다. 빼곡하게 글자가 프린트되어 있다.

“기간은 따로 명시할 거고, 나를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게 첫 번째. 인식의 범위도 지정할 거니까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마. 지금은 대략적인 개요에 대해 말하는 거야.”

“……흐음.”

“내 말은 끝나지 않았어. 시작하는 건 내가 지정한 날짜부터. 얼렁뚱땅 시작하고 끝내서 소원을 이루었다고 말하지도 마.”

“왜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택하니? 그냥 원하는 걸 바로 말하지 않고?”

노파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정해준’은 무슨 소릴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당장 네게 영혼을 줘야 하잖아.”

“……내 대가는 항상 네 영혼인데.”

“물론 대가로 영혼을 줄 거지만 그게 지금은 아냐. 자, 내 말 아직 안 끝났거든? 네가 내 영혼을 수거해 가는 건…… 대충 6년 뒤야. 2019년이나 2020년. 내 일이 다 풀리면 가져가.”

노파는 조금 심통 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쟁이면 몰라도 내 일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알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네 힘을 많이 쓰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 정도 유예는 줄 수 있는 거 다 알고 왔으니까 밑장 빼지 마.”

“이런 씨팔.”

노파가 침을 퉤 뱉었다.

“씨팔, 그 난쟁이 놈이지? 빌어먹을 놈. 이쪽 바닥을 아주 흐려 놓는구먼!”

노파가 걸쭉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공정거래? 개 같지도 않은 소리를 쳐 하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다. 아주 개잡놈이야, 씨펄…….”

쌓인 게 많았는지 노파는 궁시렁궁시렁 쉬지 않고 난쟁이 욕을 했다.

나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정해준의 손에 들린 종이와 노파를 번갈아 보았다. ‘정해준’이 어디 가서 사기를 당할 성격이 아니란 건 잘 알겠다.

“아이코, 이건 볼 필요 없는데.”

그때, 머리 위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에구, 끈이 연결된 바람에 조절이 안 됐네. 이런 건 안 봐도 돼.”

호수 반대편에서 커다란 손이 나타나더니 먼지를 흩뜨리는 것처럼 손부채질을 했다. 손바닥이 움직이는 대로 바람이 휙 불더니 호수에 파도가 쳤다.

반대편에서 생긴 파도는 집채만 한 크기가 되어 나를 덮쳤다.

“헉!”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국적인 호수는 온데간데없고 아무도 없는 전망대가 나타났다. 불은 여전히 꺼져 있고 먹구름도 여전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다.

대신 처음 보는 여자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안녕.”

여자가 싱긋 웃었다.

“나는 이런 악마야.”

테이블 위에 명함 한 장이 생겼다. 고급스러운 붉은색 바탕에 검게 염소 얼굴과 666이 써 있다.

“……혹시 난쟁이를 따라 한.”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런 거군.

여자는 손을 흔들었다. 명함이 혼자서 뒤집어졌다.

“여러 이름이 있지만 네가, 흠, 어쨌든 네가 날 찾아왔을 때는 그 이름을 썼으니까 이 명함을 줄게.”

Mephistopheles. 메피스토펠레스.

이쪽에서 찾아가려고 했던 인물이긴 한데, 이렇게 급하게 만나고 싶진 않았다. 더군다나 이 악마를 상대할 준비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정해준’도 8pt로 빽빽하게 쓴 계약서를 들고 갔었는데.

“아, 널 정말 찾고 있었어.”

“아, 네…….”

“너무 심드렁한 반응이다?”

푸지게 욕설을 내뱉던 노파를 본 이상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우, 그 기억 때문이야. 얼른 잊어 주지 않을래?”

여자가 내 손목을 노려보았다. 악마를 추적하기 위해 묵주가 있다.

묵주를 노려보던 여자는 곧 활짝 웃었다.

“그래도 덕분에 나도 널 찾을 수 있었으니까 샘샘으로 치지, 뭐.”

청룡 이 새끼는 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내가 악마를 쫓은 게 아니라 반대가 되어 버렸잖아, 이 영감탱이야.

“그 물비린내 나는 용이 자꾸 기운을 흐려 놔서 잡기가 영 어려웠는데…….”

“…….”

“네가 높은 곳에 와 줘서 잡을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제가 뭐라고 했죠, 청룡님?

미천한 인간이 청룡님의 큰 뜻을 몰라뵙고 마구 날뛰었군요.

그렇지만 말 좀 똑바로 잘 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전 잘못 없습니다. 높은 곳은 피하라고 말해 주셨으면 안 올라왔을 거라고요.

“그동안 계속 찾고 있었거든.”

“……저를요?”

“응!”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그 몸뚱이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두 발로 멀쩡하게 걸어 다니잖아?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진짜, 너무너무 궁금했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