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45. 나그네 세상(1)
“진짜 아무 말 없이 가신 거예요?!”
하루만 더 고생하고 내일부터는 번갈아 가며 쉬자고 했던 게 이산래 팀장의 최후의 말이 되어 버렸다. 그 말을 한 본인이 집안일 때문에 급하게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꿈에 부풀었던 특수과 사람들은 절망에 젖었다.
“말도 안 돼!”
“팀장님, 믿었는데!!!”
초췌한 얼굴의 김도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비명 소리가 들렸다. 특수과 사람들의 죄 없는 머리카락이 희생되었다.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머리를 쥐어뜯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저걸 우리가 어떻게 하라고!”
광화문 광장에 그려진 그림은 이산래가 대부분을 도맡아 했다. 특수과가 한 일이라고는 이산래가 그린 밑그림에 특수 도료를 사용하여 덧칠한 것뿐이다. 까딱 잘못하면 여태 야근했던 것마저 도루묵이 되어 버린다. 오늘은 우울한 얼굴로 설명했다.
딱 하루 남았던 특수과의 야근은 팀장의 부재로 그렇게 길어졌다. 통탄할 일이다.
그래도 덕분에 개인지 고양이인지 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사자는 잊혀졌다. 세종대왕상의 해태만 한 번 눈을 빛내며 이쪽을 봤을 뿐이다.
“오늘 씨, 제발 할 수 있다고 말해 줘요.”
“오늘 씨가 팀장님 다음으로 잘 보잖아요. 팀장님 그리실 때 뭐 본 거 없어요?”
음식점에서 주하랑도 그랬지만 다들 오늘을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렸다. 다들 하나같이 피로에 전 모습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집안일이래요? 별일 아니기만 해 봐! 저주할 거야, 이산래!”
특수과에서 저런 말을 하면 좀…… 기분이 이상한데. 공권력 남용인가? 아닌데. 뭔가, 괴상한 부조리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저 새끼 사자가 저 말을 못 듣고 있길 바랄 뿐이다. 새끼 사자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봐 그러는 건 아니고, 이산래는 은근 뒤끝이 있는 것 같았거든. 김도훈에게 업무 폭탄이 떨어지질 않기를.
불쌍한 특수과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근처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러 오늘에게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주전부리를 잔뜩 사서 건네주었다. 오늘은 새끼 사자에게 초콜릿을 잔뜩 먹여 독살하고픈 눈빛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사자도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청룡과 새끼 사자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 그럼, 부… 탁…….”
오늘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새끼 사자를 노려보았다. 구두 장군 이후로 서울에서 요괴가 나타나는 일이 없어 한참을 푹 쉬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부탁… 드, 려요…….”
그렇게 새끼 사자와 도끼는 일단 내가 거두게 되었다. 전자는 그렇다 쳐도 도끼는 진짜 어떻게 해야 하냐고.
* * *
‘저쪽’과 ‘이쪽’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지만 또 어떻게 보면 몹시 닮아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사람 사는 곳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떠올리면 된다.
아침마다 출근철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우중충한 표정도 똑같고, 금요일 저녁,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밝은 표정도 똑같다.
뜯어 보면 다르지만 적어도 그 속에 사는 건 인간이다.
“이번 칠석은 조용히 지나가서 다행이야.”
그래도 가끔 이렇게 이질감이 들 때가 있다.
도로에 나와 있는 초능력자 몇 명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 전 지났던 칠석에 대한 이야기였다.
칠석은 음력 7월 7일. 양력으로 계산하면 올해는 8월 7일이었다. 바로 어제.
내가 살던 원래 세계에서 칠석은 별거 아닌 날이었다. 비가 온다는 속설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다. 이곳처럼 새가 하늘을 뒤덮는다거나, 그 탓에 공휴일로 지정되거나 하진 않았다.
단청 휴대폰 신제품 발매나, 영화 같은 건 내가 저쪽에서 겪었던 대로 착착 나오면서 이런 예상치 못한 차이점이라니. 위화감이 장난 아니다.
“진짜 조용히 지나갔으면 우리가 이러고 있겠냐.”
“그래도 이만하면 양호하지.”
“3년 전인가? 기억 안 나? 누가 먹고 죽으라고 쥐약 풀었다가 새떼 습격받았잖아.”
“아, 그거……. 칠석 때 새 건드리면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요즘 학교에서는 그런 거 안 가르치나?”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이곳이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걸.
시간이 돌아온 건 맞다. 이산래와의 대화에서 그건 확신했다. 하지만 청룡은 그걸 또 부정했다. 돌아온 적 없다고?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건데?
“아, 그렇지만 역시 청소는 별로야.”
초능력자들은 태평하게 웃었다. 거리에 나와 있는 건 전부 물 능력자였다.
본래 내가 아는 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이다. 까치와 까마귀들이 두 사람을 위해서 다리를 만들어 주는데, 솔직히 이 세계에 견우와 직녀가 존재하는지부터가 의문이다. 중국에서 서왕모가 키웠다는 복숭아를 가꾸는 원숭이도 있는데 못 있을 것도 없다마는…….
어쨌든 그래서 현대에 와서 칠석이 어떻게 되었냐면,
말 그대로 새들의 날로 탈바꿈하였다.
내 평생 볼 새는 어제 다 봤다고 장담할 수 있다. 거짓말 좀 보태서 한반도에 있는 새라는 새는 전부 날아왔을 것이다. 그만큼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새였다.
오작교는 까치와 까마귀들이 만든다고 들었는데 왜 참새나 부엉이, 비둘기나 매 같은 새들도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날아다녔는진 모르겠지만…….
“전 이 시즌이 제일 싫어요.”
한평원도 투덜거렸다. 모여 있는 물 능력자 중 유일하게 아는 얼굴이었다.
실제로 견우와 직녀가 까치와 까마귀들이 만든 다리를 밟고 다녔을지는 모르겠지만 수천 마리의 새로 뒤덮인 서울은 구두 장군 때 이상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비도 소용없었다. 차라리 비가 많이 왔으면 모르겠는데 잠깐 내리다 말았던 비에 깃털이 엉켜 거리가 더 엉망이 되었다.
왜 다른 날도 아니라 칠석이 공휴일이 되었겠는가? 다 새들 때문이다.
새똥과 깃털로 뒤덮인 서울을 위해 물 초능력자들이 나섰다.
“저리 가서 물이나 뿌려요. 빨리 청소하고 집에 가자고요.”
한평원은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한평원 주위에는 사람이 잔뜩 몰려있었다. 쾌청한 공기를 바라는 자는 한평원을 찾으라. 집에 한 대 갖다 놓으면 딱일 것 같은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평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붙임성 좋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괜히 한평원을 놀리고 싶어서 누나 얘기를 들먹였다.
“평화 씨는요? 서울 왔다면서요?”
“헉, 해준 씨. 어디서 들었어요?”
한평원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차마 댁 증조부의 전화를 훔쳐 들었다고 하기에는 뭣해서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병원 로비에서 그렇게 크게 전화하는데 그냥 들으라고 한 거 아니었어?
한평원은 딱히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한평원은 물으면 묻는 대로 답해 줘서 편하다.
“요운 씨와는 어땠어요? 둘이 만났어요?”
“어…….”
만났구나. 대단한 접전이 일어났었겠지. 손요운과 관련된 일은 ‘이 세계’의 주요 흐름이라 생각하면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하네요.”
손요운 성격에 뭐라 하진 않았을 것 같고, 한평화가 쏘아붙이면 그냥 미안하다고 고개만 숙였겠지. 제법 재밌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텐데. 못 보는 게 좀 아쉽다.
한평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돌렸다.
“해준 씨는 여기 어쩐 일이에요? 해준 씨 능력이 청소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집이 근처라서요.”
“아. 여기 살아요?”
나는 골목을 가리켰다.
“네. 저쪽에. 편의점 가려고 나왔는데 작업하고 있어서 인사차 왔어요.”
나는 내 손목에 걸린 편의점 봉투를 흔들었다. 음료수 몇 개가 봉투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쳤다.
한평원은 아, 하더니 골목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여긴 새똥은 별로 없어서 청소하기는 쉬워요.”
새들이 모이는 곳이 그래도 북악산이라 다행이었다. 칠석이 공휴일로 지정되었을 때만 해도 한강 주위를 빙 둘러쌌다고 했으니까.
새들이 모이는 장소가 서울인데 공휴일로 지정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당시에는 정말로 사람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빼곡히 날아다녔다던가 뭐라던가.
도끼를 휘두르는 서양 요괴에, 용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곰도 있는 세상이다. 새 때문에 공휴일이 생길 수도 있지.
집에만 가도 사자 새끼를 볼 수 있는데.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걔넨 왜 매년 모여서 그 난리래요?”
“몰라요. 말하는 새가 있으면 물어보고 싶어요, 저도.”
한평원은 지긋지긋한 얼굴로 말했다. 새똥 치우고 있으면 뭐……. 싫을 만도 하지.
한평원의 말을 들으니 알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나 말하는 까치를 알고 있잖아? 그렇잖아도 얼굴을 보면 지하국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으니 이것도 겸사겸사 물어봐야겠다.
한평원은 나와 이야기하면서도 거리에 물을 쏟아붓고 있었다. 비 오는 광화문 광장에서 어쩔 줄 모르며 불개를 돌보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다.
내가 요괴잡이에만 불려 나가서 그렇지, 이런 근무도 있는 거다. 대민 행정 업무 같은 비상근무.
……사람이 사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다음에 뵈어요.”
한평원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전화를 받았다.
“도착했어요?”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저 지금 오늘 씨 보이는데요.”
건너편 길목에서 평소와 달리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여자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횡단보도를 건넌 오늘이 살짝 웃었다. 무려 일주일이나 연장된 근무에서 겨우 풀려난 오늘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티, 팀장님은, 요?”
이산래를 찾는 목소리는 음산했지만.
야근의 원한은 깊다. 이건 이산래가 잘못한 거다.
광화문에서의 특수과 일이 일단락된 후 이야기를 위해 오늘을 집에 초대했다. 악마 추적을 위해서였다.
새끼 사자를 내가 임시로 데리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청룡이 추적에 필요할 거라 말했던 도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은 얼룩이 묻은 도끼를 들고 외출하고 싶진 않았다. 고생은 그걸 들고 집에 오는 걸로 충분했다. 그걸 어떻게 들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시, 실례, 하겠… 습니다…….”
“오늘 씨는 저번에 한 번 왔었지 않아요?”
“어…….”
복숭아 때 얘기다. 오늘은 눈을 한 바퀴 굴리더니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 조, 조사, 때, 문에… 사실, 그, 그, 뒤로도…….”
일했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어쨌든 오늘은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바로 맞은편에 새끼 사자가 있었다. 내가 처음 데리고 온 날, 자리에 놓은 그 자세 그대로 한 톨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새끼 사자는 깨지 않았다.
처음엔 저걸 어디다 둘까 고민하다가,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방석을 깔고 그 위에 두었다. 미동도 없이 내가 놔둔 채로 자고 있길래 가끔 숨을 잘 쉬고 있나 확인도 했었다. 잘못 관리하면 청룡이 와서 비를 흩뿌릴 것 같았다. 내 집에서 익사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마저도 금방 귀찮아졌다.
소리도 안 나고, 움직이지도 않고.
뭔가를 먹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자는 게 아니라 가사상태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생겼지만 지웠다. 죽은 게 아니면 된 거지.
잠깐의 고심 끝에 나는 저 새끼 사자를 토템 같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온갖 주술이 오가는 곳인데 원시적인 토테미즘을 믿는 사람도 있겠지. 편견을 버리자. 그리고 저 새끼 사자는 애초에 토테미즘의 결정체 아닌가?
…혹시 아는가. 금전운에 좋을지도.
“음…….”
오늘은 새끼 사자를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흩날리는 먼지가 선명하게 보였다.
“…….”
“…….”
토템 취급을 너무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