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44. 꿈꾸는 사자(4)
짙은 남빛의 도포 자락은 비에 젖지 않고 팔랑거렸다. 그러나 옷자락이 바닥에 닿았을 때, 그 끝은 아들의 피로 물들었다.
청룡은 아들에게 손을 뻗었다. 노기로 가득했던 눈은 아들이 보이자 슬픔으로 바뀌었다.
“이 못난 것.”
하얀 털을 가진 사자는 작게 숨을 몰아쉬다가 아비를 보고 눈을 감았다.
“무얼 하든 몸을 상하게 하지는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눈을 감은 사자는 말이 없었다.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거리는 몸이 없었더라면 좋지 않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비의 손길이 닿자 사자는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품에 쏙 들어오는 강아지만 해졌다. 청룡은 내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진처럼 사자를 품에 안았다. 새끼 사자는 사진보다 더 작았다. 꼬리가 축 늘어졌다.
어린 사자를 품에 안은 채 청룡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추악한 짐승과 손을 잡았구나.”
청룡의 양옆으로 종이인형들이 눈썹을 잔뜩 치켜뜨고 서 있었다. 정해영 그림같이 생긴 주제에 제법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저런 그림 솜씨로도 무서울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물론 이런 감상을 태연히 내뱉고 있을 만큼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이슬비에 젖은 사내는 고통스러워했지만 악에 받친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건 내 일이다!]
“아이의 일에 보호자가 끼는 건 당연한 이치지.”
[꺼져라, 욕심 많은 용!]
청룡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사내를 훑었다.
“네놈 고향의 미천한 것들과 비교하지 말거라. 그런 비늘 달린 짐승과는 연이 없다.”
서양에서는 용이 동양과는 다르게 욕심 많은 악당 이미지다. 신성시되는 청룡님께서는 심기가 꼬일 만도 하지.
청룡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소에게 무얼 바쳤느냐.”
염소?
“네 미약한 힘으로는 내 아들을 건들지 못하니 염소의 발이라도 빌려야 했겠지. 말해라. 무얼 바쳤느냐.”
[네 아들의 목이다!]
“네가 지불할 수 없는 걸로 계약을 할 만큼 그 짐승은 어리석지 않다. 차라리 그 정도로 어리석었으면 좋았으련만.”
청룡은 혀를 쯧 찼다.
“기껏해야 네 목을 주기로 했겠지. 그걸 주기 싫으니 내 아들의 목을 가져가려고 했던 것이겠고.”
청룡이 손을 흔들었다. 먼지처럼 흩날리던 빗방울이 사내가 있는 곳만 굵어졌다. 폭우가 쏟아졌다.
사내의 머리 위에서만 존재하는 폭우였지만 흘러내린 비는 고여서 웅덩이가 되었다. 웅덩이는 넘쳐 올랐고, 주위로 번졌다. 빗물이 나와 오늘의 발을 적시고 종이인형들에게도 향했다.
…우리야 사람이지만 쟤들은 종이잖아. 괜찮은가 싶었지만 종이인형들은 습기제거제처럼 빗물을 흡수했다. 저 종이인형들은 이산래가 형들에게 받은 거라고 하였고, 그 형들도 이산래와 마찬가지로 청룡의 자식들이다.
그래. 아빠 힘을 좀 나눠 받을 수도 있는 거겠지.
“자, 가거라.”
종이인형들의 크기가 커졌다. 어린아이 그림같이 엉성했던 얼굴이 인물화처럼 정교해졌다.
다리화의 세계에서도 종이로 만들어진 꽃이 다리화가 용이 되자 생화가 되었다. 어쩌면 저게 이산래가 용이 되었을 때의 이 세계 모습일 수도 있다. 지금은 아빠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지만.
살아… 있는 거 맞지? 두 번째부터는 막았지만 제일 처음은 막지 못했었다. 목 주변에 피가 묻어 있는 게 그 증거다.
[제기랄! 도대체, 왜! 왜!]
사내가 발악했다.
[왜 날 방해하는 거냐!!!]
“분에 넘치는 욕심을 품으면 끝이 좋지 못해.”
청룡은 히죽 웃었다. 성질 더러워 보이는 웃음이다. 아들이 아빠를 안 닮았나 본데. 다행이다.
“보잘것없는 촌부(村婦)에서 인간이 아니게 되었으니 대단한 영광이겠구나.”
청룡의 손짓에 따라 종이인형들이 움직였다. 종이 위에 그려진 채찍이나 장구채, 깃발도 이제 진짜가 되었다. 인형들의 손에서 하나같이 위협적인 무기가 되었다.
“목 아래는 모르겠지만 목 위는 확실히 인간이었던 것이구나. 비록 바다 건너온 이라 하여도 인간이라면 나는 볼 수 있다.”
청룡은 비뚤어진 갓을 바로 하며 말했다.
“부와 권력을 꿈꾸었나? 영생을 꿈꾸었나? 잘못된 방법을 택하였지만 만족할 줄 모르는구나. 머리를 죽여 그 몸을 완전히 가지고 싶었던 거겠지.”
청룡은 제자리에 서서 발을 굴렀다. 땅에 고여 있는 물에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내 아들은 건들지 못한다. 특히 더러운 염소의 털을 묻힌 그 손으론!”
종이인형 중 하나가 궁채로 사내의 머리를 타격했다. 다른 하나는 깃대로 말의 목을 찔렀다. 구슬 채찍을 쥔 종이인형이 채찍으로 목줄을 만들어 사내의 목에 걸었다.
깃발을 휘두르던 다른 종이인형이 구슬 채찍을 깃대에 꿰어 바닥에 박았다.
“…….”
그걸로 끝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나는 어떻게 손도 못 쓰고 있었는데, 용은 손짓 몇 번으로 모든 걸 끝냈다.
청룡이 재차 손을 휘저었다.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이 사라졌다.
한 번 더 흔들었다.
저 멀리 쓰러져 있던 종이사자가 빛으로 사라졌다. 반딧불처럼 작게 반짝이던 빛은 청룡 주위를 맴돌다가 품속의 강아지, 새끼 사자에게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종이인형들도 인물화에서 다시 낙서로 돌아왔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으니 정리된 건 다행이긴 한데…….
청룡의 눈이 나와 오늘을 향했다.
“…….”
“…….”
“…이제 손을 풀어도 문제없을 걸세.”
“예? 아, 네! 그, 죄, 죄송합니다!!”
오늘이 허둥거리며 손을 내렸다. 손이 뜨거웠다.
청룡은 잘 익은 포도를 바라보는 노인처럼 재수 없게 히죽 웃었다. 아사달이 잠실 타워의 그림자를 없앤 이후로는 처음 보는 노인네다.
저 미친 신라 출신 용이 ‘기둥’이라고?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듯하군.”
청룡은 태평하게 그딴 말이나 건넸다.
청룡의 비에 젖은 땅이 말라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이산래의 세계는 불에 탄 흔적만 남았다. 하늘에는 누가 종이를 찢은 것처럼 가운데에 희게 금이 가 있었다. 처음 이곳을 보았을 때와는 달리 폐장된 놀이공원 같은 스산한 데가 있었다.
“우리 아이가 자넬 위해 많이도 잘라 냈어.”
뭐?
“천기를 누설한다는 건 그런 의미지. 이 아이는 자네에게 희망을 걸었네.”
청룡은 나와 오늘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종이인형들이 움찔거리긴 했지만 얌전히 물러나서 찢어진 종이나무들을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본디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내 아이를 도와준 답례는 해야겠지.”
청룡은 내게 아들을 내밀었다. 얼결에 받았다. 보기보다 훨씬 가벼웠다. 크기가 작으니 가벼워 보이긴 했지만 무슨 솜뭉치 수준이다.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말랑한.
“내가 돌보고 싶다만 나는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네. 내가 잘려 나가면 훨씬 위험하니 말이네.”
청룡은 내게 건넨 아들을 바라보았다.
“기둥이 마모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의미심장한 말도 던졌다.
…기둥이 무너지면 집도 무너진다. 청룡이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이 ‘세계’라면, 무너지는 것은.
청룡은 턱을 매만졌다.
“이번에는 서양 염소가 끼어들어서 이리 올 수 있었지만…….”
“염소라고요?”
“그렇네, 염소.”
청룡은 눈을 찌푸렸다. 모르긴 몰라도 염소를 엄청 싫어하는 듯했다.
염소, 염소라. 서양 쪽 인물인 것 같은데 염소로 대표되는 요괴가 있던가? 다행히 내게는 서양 요괴에도 정통한 특별수사과 사람이 있다. 내 뒤에 숨어 있던 오늘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 악마, 요…….”
……그래. 그렇겠구나. 악마밖에 없겠구나.
“그래, 악마. 악독한 놈이야. 자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청룡은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서 불꽃이 타닥, 하고 튀어 오르더니 새파란 빛이 반딧불처럼 흔들거리며 나타났다. 청룡은 손가락으로 그 빛을 가리키더니, 내 손목에 있는 묵주를 가리켰다.
안 좋은 기억이 자극받았다. 이걸 바로 빼 버리면 천벌을 받을까 안 받을까.
“악마를 쫓아내는 데에는 그 성물이 잘 듣지. 저놈이 맺은 계약을 더듬어 쫓아갈 수 있도록 했으니, 알아서 하게.”
“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자네에게 걸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청룡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 얼굴을 보니 불안해졌다.
“……저번에 하신 약속과는 별개지요?”
“그래, 이건 내 답례네. 질문, 혹은 부탁 하나. 그건 아직 남아 있어. 부디 자네가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네.”
청룡은 날 진득하게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가가 맞지 않는군. 그 아이는 잘려 나갈 각오를 하고 대답을 했지만, 대답을 끝마치지 못했어.”
“……네?”
청룡이 자꾸 살벌한 소리를 했다. 자기 아들이 이 꼴이 된 게 마치 내 탓이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아주 방향이 잘못된 원망은 아닌 것 같지만 모른 체했다.
아는 척해 봤자 뭐가 좋겠나. 버들님도 그랬잖은가. 돌아보지 말 거면 아예 보지 마라고.
“남은 답변은 내가 해 주지. 내 아이를 구해 준 대가를 포함해서. 그 아이에게는 물어봤자 듣지 못해서 답변해 주지 못했을 거네. 일종의… 그래. 서비스지.”
“네?”
청룡은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나쁜 방향은 아닌 것 같은데, 저기요?
천 살 정도 먹으면 남의 이야기를 잘 안 들을 수도 있겠지. 천 살 정도 먹었는데 청력이 멀쩡할 리가 있나. 겉보기에도 딱 할아버지인데, 용도 노환이 있겠지.
“이 세계 자체는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네.”
“네?”
“그럼 잘 부탁하네.”
훅, 하고 바람이 불었다.
생각보다 거센 바람에 눈을 깜빡였다.
“어?!”
청룡이 사라졌다. 이 늙은 용이 지금…!
“아차.”
청룡이 다시 나타났다.
청룡은 내 묵주를 가리키더니 사내가 떨어뜨린 도끼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걸 제대로 쓰려면 저 도끼도 필요할 거네. 잘 챙겨서 가게나.”
“…….”
“…….”
이번에야말로 청룡이 사라졌다.
반쯤 찢기고, 그 찢긴 부위를 낑낑거리며 이어 붙이고 있는 종이인형들과. 목줄에 매인 채 발악하고 있는 사내.
그리고 내 품을 겨우 채우는 작달막한 새끼 사자와 땅에 떨어진 흉흉한 도끼.
아무렇지 않게 청룡이 던지고 간 말까지.
……씨발.
“해, 해준, 씨이…….”
오늘이 난감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영문 모를 울분에 차서 외쳤다.
“도대체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부탁하네 마네 지껄이는 거야, 저 미친 용이?!”
* * *
종이인형들에게 부탁하자 그들은 순순히 우리를 밖으로 보내 주었다. 기왕이면 새끼 사자도 데려가 줬으면 했는데 새끼 사자까지 내 손에 들린 채 밖으로 보냈다. 그냥 내쫓은 거 아닌가도 싶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아까 앉아서 대화를 나누던 음식점 테이블로 돌아왔다. 한 명은 없고 한 마리가 생겼지만. 이거 동물 데려왔다고 쫓겨나는 거 아냐?
일단 오늘에게 사자를 넘겨주었다. 나보다는 보는 눈을 가진 오늘이 나을 거다.
하얀 털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새끼 사자의 목에는 핏자국과 함께 흉터가 남아 있다. 그물에 걸렸을 때 생긴 상처가 아니라면 아까 도끼에 맞았을 때 생긴 흉일 것이다.
“……자, 작네, 요….”
“원래 그 크기가 아니라고 했었죠?”
“네, 네에…….”
오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자를 보았다.
“안이, 마, 많이, 비었으, 니, 까….”
오늘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티, 팀장, 님, 의… 세, 계가… 저, 정리될, 때, 까지, 못… 일어, 나, 실, 거예요…….”
“……아니, 그렇다고 우리한테 맡기고 가면 어떻게 해요.”
이 새끼 사자는 공무원이었다. 그것도 특별수사과의 팀장.
가서 이산래가 저주에 걸려서 강아지가 됐다고 말해 볼까?
퍽이나 들어 주겠네.
그러나 그 걱정이 무색하게, 주하랑이 우리가 앉아 있는 음식점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 역시 여기 계셨네!”
“주하랑 씨?”
“아유, 팀장님이 갑자기 무슨 집안일이 생겼다고 오늘 씨랑 저보고 광장 그림 마무리하래요.”
“네, 네에?”
오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사자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내 착각이길 바란다. 새끼 사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팀장님이 중국 주술에 해박한 건 알았지만 외가가 중국인 줄은 몰랐어요. 집안일이라니까 뭐라 못하지만, 사실 야근하기 싫어서 비행기 타고 도망간 거 아니에요?”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청룡이 힘을 쓴 것 같았다. 주하랑은 오늘을 붙잡고 한참 하소연하더니 뒤늦게 새끼 사자를 발견했다.
“와, 귀엽게 생겼네. 웬 강아지? 꼬리가 기니까 고양이? 아니, 여하튼, 오늘 씨. 오늘 씨는 팀장님한테 주술 좀 배웠었죠? 저거 해결할 수 있죠?”
“아, 아니…….”
주하랑은 오늘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난 오늘 씨만 믿을게요! 그럼 식사 마저 하고 와요!”
주하랑은 돌풍처럼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오늘은 새끼 사자를 흔들기 시작했다. TV에서 광화문 광장 바닥의 그림 작업을 하는 이산래를 봤던 게 떠올랐다. 아마, 음. 이산래가 도맡아 했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손에 점점 더 힘이 실릴 이유가 없었다.
“티, 팀장님, 이, 일어, 나요…. 아, 아, 니면, 조, 종이, 인, 형이라도… 꺼내, 얼른…….”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이, 이, 나쁜, 새끼야…….”
테이블 아래에 있는 도끼를 어떻게 들고 가야 잘 들고 갔다 소문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