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44. 꿈꾸는 사자(3)
“그자들이 사고 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네.”
“기간은?”
쿠르릉… 쾅!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청룡이 기상청 사람들의 질문에 곧잘 대답한다고 해서 매일같이 말해 주는 건 아니다.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이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 살 만은 한가 보다.
요란하게 울리는 천둥소리가 빗방울 소리와 함께 을씨년스럽게 들렸다.
“…올해까지는 괜찮습니다.”
여우에 대한 질문에 이산래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얼굴이 아까보다 조금 창백해진 것 같다. 날씨 탓인가.
이산래는 의외로 착실하게 대답해 주고 있었다. ‘정해준’을 알고 있냐는 질문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고.
“그 뒤로는요? 어떻게 됩니까?”
구민석은 신경 써야 하고, 다른 여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 이유는 걸어온 길이 다르기 때문.
직접적으로 와닿는 설명은 아니어도 의미를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다. 쉽게 말해서, 이산래는 이들의 행적을 알고 있다는 거 아닌가. 지금 시점에서는 미래의 움직임까지.
올해까지는 괜찮다. 달리 말하면 그 이후로 넘어간 적이 없다는 뜻이다. 여우가 뭔가 사고를 치기 전에 이곳이 끝난다.
이산래는 내게 말해 준 거다. 구민석만큼은 뭔가 사고를 친다고. 이산래의 기억을 기준으로는 이미 친 사고를 또 치는 거고, 내 기준으로는 앞으로 칠 사고다.
“저도 모릅니다.”
이산래는 우울한 눈으로 물을 마셨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올해 이후의 시간은 없다. 이산래도 마지막에 죽었던 걸까. 아니면 그가 죽기 전에 이 세계가 돌아온 걸까.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건대 박서원을 비롯한 그쪽 놈들한테 크게 해코지당한 것 같진 않았다. 만약 해코지를 당했는데도 저런 말을 지껄인 것이라면 저놈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다. 하긴, 인간을 돕고 싶다 어쩌구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인데 제정신이겠는가. 그럴 거면 박서원의 말이 옳다. 정말 돕고 싶었다면 산함박 그놈을 진작 죽였어야 했다.
…그래도 원망한다고 대답한 것보다 저렇게 대답하는 편이 알 수 있는 게 많긴 했다.
“…….”
그래도 내 개인 사감을 제쳐 두고 생각하자면, 청룡이 각종 영물들을 잡아 죽이는 박서원과 그 패거리를 가만히 놔두는 것도 이런 아들의 의견이 적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유일하게 남은 아들에, 막내라며? 더 사이가 나빠지기 싫다면 애가 좋아하는 인간들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돌아온 세계라는 건 거의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구민석이 사고를 치는 건 확정이니 그놈이 박서원과 쌍둥이를 가지고 놀았던 것일 수도 있고. 청룡과 이산래는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있을까.
여우에 대한 의심과는 별개로 어느 정도 의문은 풀렸다. 이런데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이 경이롭다. 다음으로는 뭘 물어볼까. 내가 왜 이곳으로 불려 왔는지? 이곳이 몇 번째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한 건,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묻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난쟁이도 질문을 듣지 못했는데 눈앞에 있는 어린 이무기가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해 볼까? 내 어림짐작으로 넘어가는 것보다는 확실한 게 낫지.
“해준, 씨…….”
톡톡.
오늘이 날 바라보며 휴대폰을 두드렸다. 입을 우물거리는 게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보았다. 메시지가 와 있다.
“음…….”
[오늘 : 기둥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세요]
오늘이 눈치챘다. 똑똑한 사람이니 뜬구름 잡는 질문에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들었을 것이다.
[오늘 : 전 괜찮아요]
오늘이 희미하게 웃었다.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 저는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걸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만약.”
이산래가 나와 오늘을 보았다.
“기둥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산래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대답했다.
“무너지고 말겠죠. 눈과 발이 닿는 모든 곳이.”
다음 질문을 할 시간은 없었다.
이산래가 콜록 기침을 터뜨렸다. 빨간 핏물이 보인다 싶었는데, 그보다는 이산래가 앉아 있는 뒤쪽이 일렁이는 게 더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오늘이 비명을 질렀다.
“팀장님!!!”
도끼다. 도끼가 휘둘러졌다.
이산래가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허둥거리며 보호막을 펼쳤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늦었다.
* * *
본 적이 있는 풍경이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과,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춤을 추던 종이인형들.
어디선가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까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내가 처음 이곳을 보았을 때는 그랬다.
“히, 히익…….”
오늘이 어깨를 움츠리며 내 옷자락을 잡았다. 나도 오늘을 감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티가 휘날렸다. 하늘은 어두컴컴했고 어린아이가 그려 놓은 낙서 같았던 세상이 불에 그슬리고, 반쯤 탄 채로 나뒹굴었다.
새하얀 종이사자는 쓰러져 미동도 않고 있다. 종이사자 주위로 빙글빙글 춤을 추던 아이들이 사자 주위에서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다른 종이인형들은 울상을 지은 채 숨 가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드디어, 닿았다!]
그리고 세계의 한구석이 찢어졌다.
색 바랜 금발을 한 남자였다. 얼굴은 여자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사납게 웃고 있는 모습에는 귀기가 서려 있었다. 애초에 인간이 아니기도 했다. 알은체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는 얼굴이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고, 목격한 적이 있다는 말이 맞겠지.
검은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남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종이인형들이 있었다. 이산래가 형들의 종이인형이라고 말한 그 인형들이다.
종이인형들이 표정을 바꿨다. 잔뜩 찌푸려졌다.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대형을 짰다. 무언가를 지키는 것처럼, 손에 든 공이나 장구채를 꽉 잡았다.
[그놈 머리는 어디에 숨겼지?]
사내는 커다란 도끼를 한 손으로 손쉽게 휘두르며 외쳤다. 물론 종이인형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종이인형의 뒤로 하얀 털을 가진 뭔가가 보였다. 종이사자만큼이나 하얀 털을 가졌지만 그보다는 훨씬 작은 크기다.
종이인형들은 그걸 지키는 것처럼 앞을 가로막은 채 차분하게 자세를 취했다.
[하, 지금이라도 내놓으면 숨만은 붙여 놓으마!]
지난번에도 저 사내는 상자 속에 봉인되어 있었던 머리를 찾고 있었다. 끈질기기도 하다. 여태 찾고 있었던 건가? 왜?
요괴란 족속들은 하여간 국적을 불문하고 지랄이다.
사내는 도끼를 꽉 쥐며 종이인형들의 뒤를 가리켰다.
[그 사자 새끼가 숨겼지 않나!]
아, 젠장. 이런 일에 끼고 싶지 않은데.
썩 마음에 드는 놈은 아니지만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아직 이산래에게 들어야 할 말이 남았다. 남의 대화에 멋대로 끼어드는 놈은 질색이다!
숨을 참으며 능력을 썼다. 일단 저 사내를 가둬 놓으면 이산래든 저 종이인형이든 처리해 줄 것이다.
사내의 주위로 하얀 막이 생긴다. 은은하게 빛나는 차단막은 ‘정해준’이 물속에 들어가기 위해 만든 것과 다를 바 없다. 주먹을 꽉 쥐었다. 양손에 여의주가 하나씩.
‘정해준’이 얻은 여의주는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었다. 죽은 이무기의 여의주는 희미하게 세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큰 저항은 없었다. ‘정해준’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자 여의주는 손쉽게 내 손에 들어왔다.
아주 손쉽게, 증명되었다. ‘정해준’이 가져간 여의주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하!]
사내는 콧방귀를 끼며 짐승처럼 웃었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위험하다.
사내는 자신을 가두는 차단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저건 틀림없이 닿는다.
생각할 겨를은 없다. 본능적으로 종이인형들의 뒤쪽, 이산래로 추정되는 작은 사자가 있는 곳에 보호막을 쳤다.
콰앙!!!!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안 되지만 보호막에 커다란 충격이 왔다. 속이 뒤집혔다.
“끄, 끈이…….”
오늘이 무언가 보았는지 중얼거렸다.
“끈이요?”
“저, 저, 남자, 팀장님을, 계, 계속… 노, 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내 옷을 놓고 손을 뻗었다.
“오늘 씨?”
“이, 이러면, 볼, 수, 이… 있을, 거예요.”
오늘은 어린아이들이 누군지 맞춰 보라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가 살짝 벌어졌다. 손가락 틈으로 바뀐 시야가 펼쳐졌다.
이것이 오늘이 보는 세계다.
세계는 좀 더 반짝거리고, 좀 더 어둡다. 본래 이산예의 세계는 동화책 삽화처럼 물감처럼 부드러운 색감이다. 그것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바닥을 태우고 있는 불길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불길이 있다. 넘실거리는 불길은 종이로 된 것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니, 보려는 건 이게 아니다. 도끼를 든 사내를 보았다. 도끼날에서부터 새까만 불꽃으로 만들어진 얇은 줄이 종이인형 뒤의 상처 입은 사자와 이어지고 있었다.
사내가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큭!”
급하게 차단막을 없애고 보호막을 한 겹 더 쳤다.
종이인형들이 손에 든 채찍이나 장구채들을 휘둘러서 사내의 도끼를 막으려고 했지만 전부 실패했다.
남자의 움직임에 불꽃으로 된 줄이 크게 움직였다. 충격이 줄을 타고 움직였다.
쾅!!!
다시 한번 보호막에 막혔다.
[……날 방해하는 거냐?]
사내의 싸늘한 목소리가 나에게 꽂혔다.
종이인형들이 사내에게 달려들었지만 저번과는 다르게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산래의 세계가 이 모양이다 보니 종이인형들도 별 힘을 못 쓰고 있는 듯했다.
[날 방해하는 게 네놈이냐!]
일단 계속 막기는 했는데, 역시 잘못된 선택 아니었을까….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내 능력은 아무래도 공격에는 적합하지 않고, 막기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산래라도 멀쩡했으면 종이인형들이 막아 줬을지도 모르지만…….
이산래가 있는 곳에 불꽃이 아닌, 새빨간 피가 고여 있다. 도움을 바라는 건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이산래의 세계가 아니라, 바깥이었다면 다른 초능력자들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임 팀장에게 직접 전화해서 요청할 수도 있었을 테고.
이를 악물었다. 이산래만 있었다면 모를까, 내 뒤에는 오늘도 있다. 기껏 여기까지 도달했는데 이제 와서 죽기에도 아쉽다. 정신을 바싹 차리면 호랑이굴에 물려 가도 살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아는 호랑이라면 사람을 잡아먹진 않겠지만…!
“…어?”
“비?”
그때였다.
이슬비가 내렸다. 오는지 오지 않는지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빗방울이었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물방울이 없었더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그 가녀린 물방울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사그라졌다.
[큭, 크아아아악!]
빗방울을 맞은 사내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사내가 타고 있는 말도 거품을 물며 몸부림쳤다.
쿵! 사내가 말에서 떨어졌다. 몸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살 타는 냄새가 기분 나빴다.
“그 더러운 손을 치우 거라.”
하늘이 갈라지며 새하얀 빛이 내려왔다. 그 빛 속에서 노기가 서린 음성과 함께 용이 나타났다.
“내 아들을 위협하는 것을 더 이상 허하지 않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