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44. 꿈꾸는 사자(2)
“이모님을 뵈었습니다.”
굳이 그 말을 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깐 신세를 졌었고, 이것저것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남자에게서는 버드나무 용의 가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운 향이 났다.
이모님이 힘을 써 줬다면 남자는 이산예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모님과 어머니는 친한 동무셨습니다. 저도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뵈러 간 적이 있었지요.”
이산예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추억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많지 않은 건 남자나 이산예나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아니, 그 전에 말해 둘 게 있긴 했었다.
“먼저, 해준 씨가 선생님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산예는 규칙을 설명했다.
“학생이 해준 씨한테 질문을 하러 왔어요.”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왜 이상한 소리를 하냐고 말하긴 귀찮고,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다는 눈치다. 일부러 그걸 숨기지 않고 티를 내는 것도 ‘정해준’과 같았다. 근본적으로는 같은 인간이기 때문일까.
“그 학생이 모른다는 문제가 1부터 0까지라고, 전부 다 가르쳐 달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쉬울까요. 아니면, 왜 8이 0이 되냐고 묻는 것에 답하는 게 쉬울까요.”
정해준은 이산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듯했다.
이산예는 계속해서 규칙을 말했다.
“더해서, 점을 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점이라고요?”
“질문에 따라 복채가 정해지니까요. 앞뒤가 살짝 바뀌긴 했지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제가 들을 수 있습니다.”
정해준은 생각에 잠겼다. 아마 짐작 가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이산예는 눈을 깜빡였다. 햇무리와 달무리의 눈에 반짝이는 인간의 운명이 비쳤다. 반짝반짝. 음식점 안에 앉아 있는 모든 인간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딱, 정해준만 빼고서.
“그러니까 되도록 구체적으로. 제가 들을 수 있는 범위 내라면 최대한 답해 드릴 테니까요.”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과는 다르다. 그에게 운명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비치지 않을 뿐이다.
이곳이 그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해준은 영리한 인간이다. 규칙을 말해 주는 걸로 빠르게 셈을 끝냈을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과 단서로 어떻게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저 남자에게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한다.
이산예 또한 ‘모든 것’을 알진 못한다. 하지만 정해준의 의문점 몇 개 정도는 해결해 줄 자신이 있었다.
정해준은 이산예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동해용왕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래, 이렇게.
이산예는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질문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정해준은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았다. 현명한 선택이다.
현재 이곳의 동해용왕은 이산예의 아버지, 이목이라 알려져 있다. 그에 얽힌 이야기는 인터넷으로 쉽게 검색할 수 있다.
[동해용왕은 오래전 돌연 모습을 감추었고, 지금의 동해용왕 이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정해준이 동해용왕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면 분명 버드나무 용이 힘을 써 줬기 때문일 테다. 수정된 세계에서 이상함을 깨달을 수 있는 건 수정되기 전의 세계를 본 사람뿐일 테니까.
질문에 도달한 과정은 불필요하다. 이산예는 답해 줄 뿐이다. 용들에게도 과정은 중요한 법이지만 인간만큼은 아니다. 인간은 용들처럼 결론을 엿볼 수 없으니까.
“동해용왕께서는.”
이산예가 입을 열자 정해준은 그제야 아차, 했는지 오늘을 보았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오늘에게 즐거운 이야기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이산예는 이미 오늘의 각오를 보았고, 이어서 정해준 또한 오늘의 각오를 보았다.
“괘, 괜찮… 아요…….”
오늘이 입을 열었다.
“저… 는, 해준, 씨를, 도, 돕기로, 했… 으, 니까…….”
정해준의 운명은 보이지 않지만 흔들리는 감정 정도는 볼 수 있다. 정해준이 ‘정해준’의 백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상, 용의 눈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다.
미안함과 고마움 같이 뭉글뭉글한 감정으로 가득 차오르는 인간을 보며 이산예는 작게 웃었다.
“오늘 씨에게는 조금 뜬금없게 들리는 말들이 나오겠군요. 이해해 주세요.”
하지만 그녀는 현명하고 곧은 인간이다. 어떤 운명이어도 오늘은 눈앞에 있는 진실을 믿고, 지킬 것이다. 오늘의 선한 기운이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향했다.
“해준 씨는 제 말을 부디 잘 알아듣기 바랍니다.”
이산예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천기(天機)를 누설하는 일은 아직 버겁다. 자음과 모음을 입에 담을 때마다 세계 안의 종이인형들이 타올랐다. 형들의 종이인형이 없었더라면 이산예의 세계는 진즉 재로 뒤덮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를 늘 걱정하셨지.’
인간을 돕겠다는 자신의 고집에 끝내 져 주셨지만, 몸을 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도록 했다. 이산예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약속도 끝내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동해용왕은 이 땅을 지키기로 맹세한 존재. 그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금세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뛰어다녔다.
“하늘로 올라간 건 동해용왕과 다른 용들. 지상에 남은 유일한 용은 기둥이 되어 지탱하고 있습니다.”
“……무엇을요?”
“이 세계를요.”
쨍그랑!
공기가 흔들렸다. ‘바깥’의 유리창 하나가 깨졌다. 아버지가 제재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지켜보는 눈길은 있었지만 그것이 감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이산예는 쓰게 웃었다.
이산예의 아버지, 청룡에게도 정해준의 존재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니 부탁 하나를 들어준다는 감당 못 할 말을 지껄였겠지. 지금쯤 조금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래 용들은 어딘가 감성적인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감정에 휩쓸려 일을 저질렀다가 뒤돌아 후회한다. 마치 인간 같지 않은가. 겨우 용 주제에.
그래도, 어쩌면 자신처럼 기대를 걸고 있을 수도 있다. 정해준만큼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정해준은 이산예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 ”
쨍그랑! 쨍그랑!
유리창이 두어 장 더 깨졌다.
이산예는 귀를 틀어막으려는 손을 겨우 멈췄다. 이산예는 눈을 살짝 찌푸린 후 정해준에게 말했다.
“들리지 않습니다.”
정해준이 눈을 찌푸렸다.
“이걸 들을 수 없다고요?”
이산예는 듣지 못한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그런 규칙이다.
“아, 좋아요…. 그럼 박서원과는 아는 사이입니까? 이건 들을 수 있습니까?”
이번엔 들렸다. 동해용왕보다는 한결 답하기 쉽다. 오늘의 손이 잠깐 움찔거렸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답을 기다렸다.
“아는 사이였습니다.”
“사이는 어땠습니까?”
이산예는 싱긋 웃었다.
“나빴죠.”
“어느 쪽이?”
“그 사람이 나를 많이 싫어했어요.”
정해준의 눈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정해준의 입 안에 맴도는 말이 무엇인지 보였다. 그 땅꾼이 자신을 죽였거나, 죽이려고 하였나 묻고 싶을 것이다.
이산예는 차분히 정해준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의 성정이라면 직접적으로 묻진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요?”
“어린애 장난질에 자길 끼우지 말라고 하더군요.”
“……싸운 적이 있습니까?”
“싸울 뻔한 적은 있죠.”
“누군가 다친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 사람과 나는 아닙니다.”
정해준은 입 안이 마르는지 물컵을 비웠다.
“원망합니까?”
이래서 이산예는 인간을 좋아한다. 어둠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걱정해 주는 다정한 마음씨.
11년 전, 자신을 구해 준 인간도 그랬다.
이산예가 인간의 곁에 남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뇨.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산예는 원망을 받을 입장이었다.
이 길을 걷기로 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산예는 조금 우울한 얼굴로 오늘을 보았다. 이산예가 정해준을 돕기로 한 것은 그가 순전히 이 세계의 일에 말려든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이 세계’를 포기했냐는 원성을 듣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정해준은 이산예의 우울한 기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이산예에게도 좋았다.
“…그럼 여우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이번 질문도 예상했던 범위 내였다. 아슬아슬하게 천기와 닿아 있으나 아직 감당할 수 있다.
이산예는 정해준을 보았다. 질문은 구체적으로. 정해준은 잠깐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신경 써야 하는 여우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여우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이산예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본래 백에 쌓인 업과, 혼에 쌓인 덕. 추가로 얻은 업에, 여의보주가 두 개.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버드나무 용의 가호. 거기다 오늘의 기원(冀願)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여의보주가 하나.
정해준은 감당하겠지만 자신은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이 이미 걸어온 길의 차이죠.”
정해준의 얼굴이 묘해진다. 긴가민가해하는 얼굴에 다시 단어를 골랐다.
“그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의 차이기도 하고.”
이건 개인적인 사견을 담아서.
“해준 씨가 그 일에 신경을 쓰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죠.”
“어떤 의미의 시간입니까.”
“…….”
이산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질문에는 대답하면 잘려 나간다.
조금 잘라 버린다면 대답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이 뒤로 정해준을 돕지 못한다. 잘못하면 정해준에게 너무 과한 업이 쌓일 수 있다.
이산예가 대답하지 않자 정해준은 말을 돌렸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난 11년간 인간들의 틈에서 살면서 배웠다.
“그자들이 사고 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네.”
“기간은?”
쩌저적.
유리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산예는 곰곰이 생각했다. 쿠르릉! 번개와 천둥이 한 번씩 쳤다.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소리였다.
“올해까지는 괜찮습니다.”
“그 뒤로는요? 어떻게 됩니까?”
“저도 모릅니다.”
이만하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산예는 빈 컵에 물을 따랐다. 목이 탔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이야기는 종종 그를 위해 반대편에 놓인 대가가 있곤 했다. 이산예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톡톡.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오늘은 정해준을 부르며 휴대폰을 두드렸다. 잠깐 고개를 기웃거리던 정해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보았다.
“음…….”
정해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언뜻 보이는 휴대폰 화면이 채팅창을 띄우고 있다.
이산예는 조용히 웃었다. 흔들리지 않는 오늘의 눈을 보았다. 이런, 분명 그녀라면 중요하고, 그렇기에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할 것이다.
정해준이 물었다.
삐이익-
“만약 기둥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명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대답해야 할까? 눈앞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형들의 종이인형들이 아우성쳤다.
‘소예, 내 아들. 그래요, 어미로서는 차라리 산에 들어가 불경이라도 외웠으면 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소예가 원한다면 그러도록 하세요. 무얼 하든 그곳에 길이 있을 테니.’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하지만 어미의 말을 기억하세요. 스스로 일어서지 못한 운명은 기록되지 못합니다. 모든 걸 다 해 주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의 힘이 없어도,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간은 성장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어머니. 성장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해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건 가르쳐 주지 않으셨잖아요.
이산예는 정해준을 보며 대답했다.
“무너지고 말겠죠. 눈과 발이 닿는 모든 곳이.”
그래도 그 속을 걸어가는 빛이 있을 것이다. 이산예는 그 빛을 믿었다.
속에서 핏물이 울컥 올라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정해준과 오늘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이산예는 두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해준과 오늘이 놀랐던 이유가, 이산예가 기침과 함께 뱉어 낸 핏덩이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목을 향해 거침없이 휘둘러지는 도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산예는 황급히 몸을 틀었다.
“팀장님!!!”
그러나 조금 늦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