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43. 16화로 가는 길(5)
볼 수 있다 해서 모든 걸 제한 없이 보는 건 아니다. TV나 사진 같은 매체를 통하면 아무래도 정확도가 떨어진다. 게다가 상대는 꼬리가 몇 개인지 모를 여우들.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아니라면 숨길 수단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로라하는 정치인들과 세계적인 대기업 총수가 여우인 건 생각도 못 했겠지만.
“외, 외국에도, 없… 는 건, 아닌, 데…….”
유럽 같은 데서는 흡혈귀가 경영하는 호텔도 있다면서 오늘은 나의 편견을 깨 주려고 노력했다. 정작 본인은 배신감에 깃든 얼굴로 인터넷으로 사회면을 찾아보고 있었지만.
뚫어져라 정치인들과 구민석의 사진을 보고 있었지만, 보이는 건 없는지 오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팀장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티, 팀장님, 이요……?”
오늘은 앞에 놓인 커피를 쭉 들이켰다. 얼음까지 무서운 기세로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는 게, 함부로 건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두, 두래요….”
“……그냥 둬요?”
“네, 네…….”
조금 이상한데.
“아무 조건 없이요? 알아서 한다는 말도 없고?”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좀 이상한데. 많이 이상하지.
“시, 신경, 쓰지, 마, 말래요….”
오늘은 더듬거리며 이산래가 했던 말을 이야기했다.
“사고, 치, 지는, 않… 으니까…….”
더 이상한 말이다.
사고 치지 않으니까 가만히 두라고? 아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그걸 어떻게 아는데?
오늘은 무서운 표정으로 빨대로 유리컵 안의 얼음을 휘저었다. 슬쩍 케이크를 오늘 쪽으로 내미니 마찬가지로 무서운 얼굴로 케이크를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긴 하네요.”
“그, 그쵸?”
생각해 왔던 가설에 살을 더 붙여 볼까.
목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잔뜩 던졌던 이산래다. 이산래는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이곳이 돌아온 세계라면 설명이 된다.
이산래가 겪었던 지난 세계에서 정계에 있다는 여우들은 특수과의 이무기가 신경 써야 할 만큼의 사고는 치지 않았다는 거겠지.
“구민석에 대해서는요? 그쪽도 별말 없었어요?”
내 생각이 맞는다면, 구민석에게는 다른 반응을 할 것이다. 이쪽은 본격적으로 엮여 있으니까.
“그, 그 사람은…….”
예상대로 오늘의 표정이 바뀌었다.
“……나, 나중에, 이야기… 하, 하자고….”
역시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팀장님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 그때 이야기하면 되겠군요.”
* * *
광화문 광장은 며칠 동안 통행이 금지되었지만 금방 복구가 되었다. 관련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 몇 명의 힘이 컸다고 들었다. 완전 복구는 아니지만 원래 모습을 반 이상은 찾았다. 거기다 추가로 더 생긴 것도 있긴 했다.
이산래를 중심으로 특수과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의 바닥 타일에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방송국 드론이 공중을 날며 광장을 찍었다. 까만색과 붉은색으로 그려진 그림은 괴상한 얼룩처럼 보이기도 했고, 짐승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버드나무도 닮아 있었고, 아니면 숲을 그려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저건 또 어디의 주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룡 아드님께서 손을 쓴 거니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을 것이다. 가끔 해태님께서도 훈수를 두는 것처럼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주위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서울시 초능력자들도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퇴원할 이들은 퇴원하고, 손요운이나 이다혜같이 제일 앞에서 싸웠던 이들은 병원에 남았다. 한평원이 누나가 쥐여 줬던 서천꽃을 갖다 바쳤으니 지금 퇴원해도 별문제는 없을 사람들이겠지만.
“뭐?!”
아침마다 전화로 한평화에게 혼나던 한진열은 오늘도 공손한 자세로 로비에서 증손녀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평화야!!”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목소리 톤이 다르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한진열을 힐끗거렸지만 호랑이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아니라, 아니아니, 할아버지는 물론 평화 하고 싶은 거 다…….”
한진열은 안절부절못하고 뭐 마려운 개처럼 종종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그, 그럼 할아버지가 갈 때까지만…….”
“아니, 평화야.”
“가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규혁이와 혜사 누나도 제주도 갔으니까, 너마저 내려오면 훈열이가 혼자 있게 되잖아. 내가 바로 올라갈 테니까, 응?”
남의 전화를 훔쳐 듣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지. 휴대폰을 보는 척 슬쩍 걷는 속도를 늦췄다.
“지금 출발할게. 응? 어? 벌써 터미널이라고? 서울행 표 끊었다고? 몇 시 차? 지금? 뭐?”
한진열은 휴대폰을 붙들고 애타게 증손녀의 이름을 불렀다.
“평화야? 평화야?? 평화야!!”
안타까운 광경이 아닐 수가 없다.
“야, 한평화!!!!”
“…….”
막상 소리를 지르고도 한진열은 두려운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톡 건드렸다. 표정 변화가 극적이다. 한진열은 안심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끊겼네…….”
모르는 척하자.
좋아. 저걸로 확실해졌다. ‘빌더쓰’, 이 세계의 이야기는 착실히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 내가 ‘등장인물’이라 확신한 인물 중에는 한평화도 있다.
한평화가 서울로 온다. 목적은 한평원이겠지. 한평원은 오늘 퇴원하지만, 손요운은 아직 병원에 있다. 모르긴 몰라도 한평화와 손요운이 만나는 그 날이 ‘드라마’ 에피소드 중 하나 아닐까?
“정해준 씨?”
호랑이도 제 말 한다더니 손요운이 반가운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광장에서 신세를 많이 졌었는데 인사를 못 해서요.”
“신세랄 게 있습니까.”
손요운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청해 왔다.
“다 돕고 사는 거죠.”
“그래도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야말로 손요운 씨 덕분에 살았지요.”
박서원과 쌍둥이에게 알려 주고 싶다. 이게 바로 어른의 대화다, 새끼들아. 인간 사회의 예의범절이라고.
손요운은 우리 엄마가 사랑해 마지않던 순박한 얼굴로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조금 서글퍼졌다. 이 남자의 운명은 여우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저번에도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서…….”
“저번이요?”
손요운은 볼을 긁적였다.
“왜, 그 괴조 잡을 때 말입니다.”
아. 나도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병원에 입원했었지만 브리핑 시간 말고는 마주칠 일이 없어 신경을 아예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도 오히려 요운 씨가 고생하셨죠.”
“아뇨, 그때도 지금도 해준 씨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었죠.”
나를 무슨 자판기처럼 부려 먹던 세 놈 사이에 있다가 이런 순수한 감사 인사를 듣자 괜히 감동스러웠다. 정해영, 너도 이런 애를 좋아하지 그랬냐.
서로 얼굴에 금칠이나 해 주며 허허 웃고 있는데, 손요운이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얘는 또 왜 이래? 불안하게.
“저, 해준 씨.”
“네.”
“서원 씨와 많이 친하지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아는 사이긴 하죠.”
시원찮은 말이긴 했지만 손요운은 친하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다 업보지. 한평원에게 이야기도 전해 들었을 테니 어쩔 수 없다. 같은 고등학교에, 초능력자가 되어서 같은 후원사. 엄청 친해 보이지 않는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
“고등학교 선후배라 들었습니다만.”
‘정해준’과 박서원, 쌍둥이들은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났고, 그 전까지는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다. 그 이후 고아원에서 함께 지냈다고 해도, 그런 사실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박서원은 고아원에 잘 있지 않았고, 쌍둥이도 수능이니 아르바이트니 뭐니 하면서 비슷한 신세였다.
지금?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
친해질 생각도 없고, 친하게 보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역시 선택을 잘못했다……. 첫걸음이 잘못되면 인생이 얼마나 망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모범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뭐, 그렇죠.”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지.
“그런데 박서원 씨는 무슨 일로?”
손요운은 멋쩍게 웃었다.
“아뇨, 별건 아니고……. 서원 씨가 방문을 다 거절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혹시 말을 전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직접 안 전해도 됩니까?”
나는 휴대폰을 흔들었다.
“번호라도 드려요?”
“아, 아뇨.”
손요운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얼굴을 보고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소리라서.”
“욕이라도 하시게요?”
“아뇨!”
손요운은 다급하게 부정했다.
“하셔도 되는데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손요운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서원 씨한테, 그때 조언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조언이요?”
“네, 그…….”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둘이서 마주친 적이 있나 싶었다. 둘의 행적을 모두 아는 건 아니니 이런 구멍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신선비 때…….”
아니, 나도 있었던 일이잖아.
그때 도대체 언제 조언을 해 줬다는 거지? 박서원이 그럴 성격은 아닌데. 다짜고짜 칼을 날린다면 모를까.
“서원 씨가 자비를 베풀 상대를 가리라는 말을 저에게 해 주셨습니다.”
“……아, 그거요.”
그게 조언이었다고? 시비 터는 거 아니었나?
“그 뒤로 계속 생각해 봤었거든요.”
“생각하셨구나.”
“아무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모든 영물들이 인간의 편을 들지는 않잖습니까. 해준 씨, 영물과 요괴의 차이를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손요운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
“인간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고,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영물일까요? 그렇다면 신선비는요? 영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신선비는 인간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럼 인간을 먹으려고만 하면 요괴입니까?”
“글쎄요…….”
“과연 이 땅에 사는 영물 중 인간을 해하지 않은 적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손요운은 휴대폰을 꽉 쥐고 병원을 빠져나가는 호랑이를 보았다.
“호랑이님도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영물이시죠.”
“……먹진 않았잖습니까.”
“네. 먹진 않았지요.”
“그리고 그건 상황이….”
손요운은 고개를 저었다.
“상황을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설명하지 못할 살인이 줄어드니까요. 제가 얘기하려는 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는 짐작 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인간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입니다.”
손요운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해태님과 호랑이님이 아니었으면 이번에 분명 사상자가 엄청 나왔을 겁니다. 추모식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으니까요.”
“…….”
“임 팀장님이 따로 이야기해 주셨는데, 그때 잠실에 계신 청룡님께 도움을 요청했었다고 합니다.”
청룡은 오지 않았다.
“시답잖은 날씨를 물어볼 땐 대꾸해 주시던 분이 이번에는 귀를 기울이는 시늉도 하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손요운의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날개처럼 눈동자가 오색빛깔로 반짝였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영물은 인간의 편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웅은 확신에 찬 얼굴로 선언했다. 영웅이 하는 말은 가족을 잃은 소년이 복수를 꿈꾸며 외치던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저는 앞으로 인간의 세상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 대한민국 정재계를 여우가 쥐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손요운의 결심이 영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손요운이 조언이라고 받아들였던 말을 한 주체가 누구였냐는 문제지.
인간의 영웅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과연 손요운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그때도 지금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 날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하루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 일이 일어나는 시간대는 분명 ‘15화’ 부근일 테니까. 무언가의 지표는 되어 줄 것이다.
“……라고 손요운 씨가 말하던데요.”
박서원은 내가 전해 준 손요운의 말을 듣더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없어도 남은 영물들은 손요운 씨가 다 죽여 주겠네요.”
왜 말이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박서원은 피식 웃었다.
“정해준 씨는 또 도망가고.”
“도망이라니.”
“그럼 뭔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퇴원이죠.”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 그때도 그렇게 도망쳤던 모양이니까. 그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죠.”
“제가 언제 도망쳤다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도망칠 계획이잖아요?”
요괴와 초능력자가 없는 세계로.
구민석에게 내가 찾는 세계를 전해 들은 박서원은 결론을 내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기 일이나 잘하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이 세상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쌍둥이도 옆에서 동의했다.
“도망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
“도망치려면 눈에 띄질 않았어야지.”
“맞아. 기껏 모든 준비까지 해 놓고 왜 다시 우리 눈에 나타난 건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와, 너 우리 보기 싫었다 이거지?”
“당연하죠. 누가 선배를 보고 싶어 해요?”
“들었지, 백주하?”
“들었냐, 백주연?”
쌍둥이의 투덕거리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나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갔다. 저놈들이 아직 병원에 묶여 있을 때,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양수역으로 가 주세요.”
‘정해준’이 죽은 이무기의 여의주를 꺼냈던 곳.
용이 되지 못하고 돌이 된 이무기가 가라앉은 늪으로 가 내 눈으로 확인할 것이다.
용늪의 여의주가, 과연 이곳에서도 존재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