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43. 16화로 가는 길(4)
정해영의 되도 않는 내 새끼 타령에 입각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충 맞춰 보자.
우투리 손요운이 그 친구들과 사회의 부조리를 꾸미는 여우에 맞서 싸운다. 여우의 목적은 뱀 목 따는 일에 우투리를 쓰겠다는 데 있었으니 여기까지는 그렇게 될 것이다. 산함박이 인간의 눈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잡으러 가는 데에 손요운이 빠질 것 같지 않다.
“네?”
“아뇨.”
한평원은 누나와 통화하는 호랑이를 느긋하게 관람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관록이 느껴졌다.
친하게 지내는 동생이 아버지를 뱀한테 잃었으니까.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정의감 투철하신 우투리께서는 두 발 벗고 달려올 것이다.
여의주. 복수. 시간. 멸망.
키워드만 늘어놔도 불길하다. 악당이 자신만만할수록 일은 사고를 동반한다. 15화, 이르면 14화 언저리에 일이 잘못될 게 뻔하다.
박서원한테 여의주를 몰아주다가 소화불량이 되든지, 아니면 산함박을 잡는 데 변수가 생긴다든지…….
……산함박도 이무기과 아닌가? 작매에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뱀이었다. 그렇다면 그놈도 여의주, 혹은 여의주와 비슷한 걸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애초에 박서원도 여의주가 없는 거북 영물을 잡아먹었잖아?
그 새끼들 산함박 먹다가 탈 난 거 아냐?!
“지하국이요.”
한평원이 대뜸 말했다. 지하국?
“네?”
“왜, 지하에 요괴들이 잔뜩 있다는 전설 있잖아요.”
다행히 그게 실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번에 나타난 놈이 거기서 올라온 건 아닐까요?”
‘아닐까요?’가 아니라 그냥 그거다. 하지만 아는 척할 순 없었다.
“그럴 수도 있죠. 다시 땅속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머리가 잘려도 살아 있는 건 반칙 아니에요?”
“도마뱀 같은 건가 보죠.”
“도마뱀은 꼬리 아니에요…?”
“꼬리나 머리나 끝에 달려 있는 건 같잖아요.”
한평원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닌데…….”
뭘 까다롭게 따지고 있나.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용은 잠실 타워에 있고, 봉황은 멸종했다. 그런 세계에서…….
한진열을 잠깐 보았다.
애초에 본인부터가 호랑이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잖아? 구두 장군이 사실은 파충류일 수도 있지. 걔가 영장류라는 건 편협한 사고다.
“그런 거라니까요.”
“그런 거군요…….”
한평원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앨 사이코패스가 아니냐고 생각했다니. 좀 더 미안해진다.
“그러고 보니까요.”
한평원에게 확인해야 할 것은 더 있다.
한평원이 아니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긴 하지만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실 제일 급한 건 지하국이 어떻게 되었을지인데, 그건 지금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다. 이건 나중에 까치를 만나게 되면 물어보자.
“불개들은 어떻게 됐는지 압니까?”
지하국에서 구두 장군과 함께 올라온 불개들은 총 일곱 마리. 그중 한 마리는 다리를 다쳐 삼족구(三足狗)가 되었다. 한평원이 마지막에 똘이냐고 물어보았으니 그 불개가 여우, 구민석의 대항마가 될 것이다. 원래 삼족구는 구미호를 물리칠 수 있는 동물로 유명하다.
광화문 광장에서 일곱 마리의 불개는 동물들의 기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초능력자의 곁에 붙어 있었다. 용맹하게 구두 장군을 잡는 불개의 이야기가 방송을 타기도 했다.
“제가 알기로는 특수과에서 돌보고 있어요.”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특수과요?”
“한두 마리도 아니고……. 사실 저번에 성찬 형이 돌본 게 특이 케이스였죠.”
한 명을 완전히 잊고 있었군.
“성찬 형은 괜찮대요?”
“아, 똘이요?”
“난리 날 것 같은데.”
“그렇잖아도 연락했더니 뭐라고 잔뜩 떠들긴 하더라고요.”
한평원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도중에 그냥 끊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평화가 그래도 동생 교육은 어느 정도 시켜 놓긴 했다.
“형이 지금 본가에 내려가 있어서 옴짝달싹 못 하거든요. 오고 싶어도 못 올걸요.”
“본가요?”
“네. 집이 좀 엄하거든요.”
엄한 집안치고 백성찬은 너무 자유분방하게 사는 거 아닌가.
“나중에 형이 특수과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100퍼센트 찾아가겠지.
한평원은 평화롭게 말했다.
“그건 특수과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죠.”
하긴, 팀장으로 청룡 아들내미가 있는 곳 아닌가. 알아서 잘 하겠지.
……버들의 귀여운 조카님께서도 지하국 상황에 대해서 알지 않을까. 어차피 그쪽과도 얘기해야 하니 겸사겸사 물어봐야겠다.
오늘에게도 연락해 보고.
“평화야, 할아버지가 잘못했으니까…….”
손녀에게 혼나는 호랑이의 등은 여전히 작았고.
나는 그 평화로운 풍경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물어볼 것도 다 물어봤다.
“어, 들어가게요?”
“답답해서 나왔긴 한데…….”
나는 땡볕 속에서 이쪽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병원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나같이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다.
한평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 사람들은 덥지도 않나 봐요.”
한진열이 우리 앞에서 쩔쩔매며 통화를 하고 있어서인지 기자들의 시선은 그쪽을 향해 있다. 단청에서 초능력자들의 치료와 휴식을 위해 기자들을 강하게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곳을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는 기자들을 심드렁하게 보다가 한평원에게 물었다.
“평원 씨, 들어갈 생각 없어요?”
“아, 전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더워서 그렇죠?”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됩니까.”
날씨는 더웠다. 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평원의 주위는 딱 좋은 온도와 습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능력 덕분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능력만큼은 부러웠다.
“나중에 봐요.”
“평원 씨는 언제까지 입원하는데요?”
한평원은 잠깐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퇴원해도 되긴 하는데요.”
한평원은 턱 끝으로 한진열을 가리켰다.
“누나가 너무 걱정해서요. 이틀 정도 더 있으려고요.”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 더 걱정하는 거 아닙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러니 한평화가 걱정하지.
“아니면 평화 씨가 키우는 꽃 먹는 사진이나 찍어서 보내 줘요. 누나 덕분에 안 아프다고.”
“그게…….”
한평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요운 형이나 다혜 누나가 더 많이 다쳤다 보니까……. 있는 꽃들은 다친 초능력자들 나눠 줬거든요…….”
이러니 한평화가 걱정하지…….
한평원도 이해는 갔다. 해태와 호랑이 덕분인지 다행히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특히 제일 앞에 달려들었던 손요운과 이다혜가.
요괴대책팀을 통하여 서천꽃으로 만든 연고 따위의 약품이 초능력자들에게 전해지긴 해도, 꽃송이에 비하면 효과가 미미하다. 내가 한평원 입장이었어도 줬을 것이다.
하지만 한평화는 자기 동생 먹으라고 준 꽃을 손요운이 홀랑 뺏어 먹고 있지 않나 걱정하지 않았나. 모르긴 몰라도 한평화 안에서 손요운의 평가가 급락하고 있는 건 알겠다.
“그럼 겸허하게 누나의 잔소리를 받아들이세요.”
한평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나가 저한테는 잔소리를 안 하거든요…….”
나는 한진열을 보았다.
이해했다.
“평원 씨.”
이야기가 다시 길어졌는데, 난 아직 내 목적을 잊지 않았다.
“슬슬 들어가지 않을래요?”
“먼저 들어가세요.”
한평원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역시 웃는 모습은 사이코패스 영화 찍을 때와 똑같다.
나는 한평원을 데리고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걸 포기했다. 대신 전화를 받았다.
“도착했어?”
짜증을 억누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나한테 내는 짜증은 아니었기에 나는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래. 로비로 갈게.”
한평원이 물었다.
“병문안?”
“병문안이긴 한데, 나 찾아온 건 아니고요.”
나는 조금 기분 좋게 웃었다.
“지금 가면 좋은 구경 할 수 있을 텐데. 평원 씨도 갈래요?”
* * *
안타깝게도 한평원은 내 제안을 거절했다.
방문자가 누군지 들은 한평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방문자보다는 찾아갈 병실에 누가 있는지 알기 때문에 나오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권유하지 않고 로비에서 방문자를 만나 병실로 올라갔다.
“야, 그래서…….”
날 향해 불만을 터뜨리던 쌍둥이는 내 동행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내 옆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미친 새끼들!”
쌍둥이는 여동생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과일을 먹고 있던 박서원이 눈을 피했다.
백하연은 쌍심지를 켰다.
“오빠도 여기 와서 앉아!”
박서원은 비척비척 일어나서 쌍둥이 옆에 앉았다. 11등급에 근접한 초능력자라 하더라도 여동생 앞에서는 오빠 새끼에 불과하다.
내가 백하연의 뒤에서 실실 웃고 있자 쌍둥이가 울화통이 터지는지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앞에는 백하연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뭐야? 지금 눈을 왜 그렇게 떠?”
쌍둥이는 얌전히 눈을 깔았다.
백하연은 팔짱을 끼고 아니꼬운 눈으로 자신의 세 오빠를 내려다보았다.
“자, 첫째부터 변명해 봐.”
가운데 앉아 있던 백주하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연아, 오빠가 그러려던 게 아니고…….”
“기각. 둘째. 말해 봐.”
백주연이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하연아. 오빠가…….”
“기각.”
“아니, 좀 더 들어 주면 안 돼?!”
“셋째.”
“연락 안 해서 미안해.”
“잘못한 거 알긴 알아?”
백하연이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운동에 들어갔다. 저 세 명은 혼나도 싸다. 즐거운 마음으로 관전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오늘 : 이제 괜찮아요!]
한참 전에 연락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답이 이제야 왔다. 바쁜 사람을 괜히 재촉한 기분이라 미안해졌다.
[정해준 : 진짜 괜찮아요? 아직 바쁘지 않아요?]
[오늘 : 팀장님이 다 하니까 괜찮아요!]
그럼 괜찮겠지.
오늘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 해준 씨는 괜찮아요? 진짜 안 다친 거 맞아요?]
[정해준 : 저야 뒤에서 능력만 쓰는데요.]
슬쩍 고개를 드니 고개를 나란히 숙인 채 백하연에게 혼나고 있는 세 명의 철없는 어른들이 보였다.
오늘이 따로 묻진 않았지만 궁금해할 것 같았다.
[정해준 : 박서원 씨도 안 다쳤어요.]
읽지 않았다는 표시는 사라졌지만 오늘은 잠깐 대답이 없었다. 조금 기다리자 오늘이 답장했다. 고마워, 피켓을 들고 꼼지락거리는 토끼 이모티콘이 함께 도착했다.
[오늘 : 고마워요.]
문득 주위가 조용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백하연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혹시 연애해요?”
“아니?”
“휴대폰 보고 실실 웃고 있길래……. 저 덜떨어진 세 명에 비하면 오빠는 여자 친구한테 잘해 줄 것 같으니까 괜찮아요.”
덜떨어진 세 명 중 둘째가 울컥해서 반발했다.
“하연아, 오빠도 어디 가서 부족하…….”
“뭐?”
“부족하지요. 그럼요. 아주 부족합니다…….”
본전도 못 찾을 거면서.
한심함을 숨기지 못하고 혀를 쯧쯧 차다가 이쪽은 백하연에게 맡기기로 했다.
“하연아, 다 끝나면 전화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병실을 나오면서 오늘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정해준 : 그런데, 오늘 씨.]
[오늘 : 네?]
[정해준 : 정치인 중에 여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해준 : 혹시 아세요?]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
휴대폰으로 곧바로 걸려 온 전화를 보았다. 몰랐구나.
“오늘 씨?”
“그, 그, 그게, 무, 무슨, 말, 이에요?!”
단청도 여우 소굴이라고 얘기해 줘야 하는데. 어떡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