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43. 16화로 가는 길(3)
정해영이 드라마에 대해 지껄였던 내용을 되새겨 보자. 솔직히 이젠 잘 기억도 안 난다. 애초에 걔는 지 새끼에 대해 떠들기 바빠서 드라마 내용에 대해 별로 말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내 새끼의 행적에 대해서만 조금 지껄였을 뿐이다.
네 친구한테나 가서 말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정해영은 내가 괴로워하는 꼴에 즐거워하며 내 새끼 메들리를 불렀다. 누굴 닮았는지 성격 한번 개차반이다. 아니, 그런 성격이 우리 조상 중에 있을 리가 없다. 혼자 어디서 뭘 잘못 먹고 와서 그딴 애로 자란 게 확실하다.
어쨌든, 보통 정해영의 수다는 내 새끼 얼굴로 시작해서 내 새끼 얼굴로 끝났다. 하지만 드라마 초반에는 간혹 드라마 내용에 대해서도 말하긴 했었다. 내가 잘 안 들어서 그렇지.
이젠 가물가물한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 보면 정해영은 박서원의 첫 등장에 대해 분명 그렇게 말했다.
‘봐 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포스가 달랐다니까? 캬, 다들 부상 각오하고 괴물한테 덤비려고 했는데 그때 내 새끼가 툭 나타나서는…….’
박서원이 합류한 대형 요괴잡이는 총 세 건. 신선비와 괴조, 구두 장군이다.
신선비는 아예 얘기에 맞지 않고, 구두 장군은 박서원과 쌍둥이 덕분에 일찍 끝났다고는 해도, 우투리인 손요운이 있는 이상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해태와 호랑이도 있었고. 박서원과 쌍둥이의 힘을 비하하는 건 아니다. 좀 더 안전하고 빠르게 잡을 수 있었으니까. 내가 말하려는 건, 정해영이 과장스럽게 말한 것만큼의 위급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역시 괴조잡이가 박서원의 첫 등장일까? 그렇다면 시간상 신선비는 아예 드라마가 시작 전의 이야기여야 말이 맞는다.
손요운이 우투리로 각성한 구두 장군은 이야기의 흐름상 최소한 중반부의 에피소드일 것이다. ‘드라마’는 착실하게 15화를 향해 가고 있다. 서울이 멸망하는 그 이야기로.
“그게 가능합니까?”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구민석에게 물었다.
“가능하라고 모으는 여의주네만.”
그래. 그렇겠지.
시간을 돌리는 건 아니지만, 시간을 거스른다는 말이다. 이곳은 멸망에서 돌아온 세계고, 마찬가지로 시간의 영향을 받았다.
공통점은 시간이라는 점밖에 없고, 과정과 원하는 결과는 다르지만 이 공통점 때문에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가 산함박을 죽이려다가 서울이 날아가고 세계가 멸망했을 수도 있지. 본래 삶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무엇보다 이쪽은 아무래도 악당이니까.
“돌아오는 건 어떻게 합니까?”
구민석은 껄껄 웃었다.
“가는 것도 겨우 보내는데 돌아오는 게 가능할 것 같나?”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확답을 들으니 골치 아팠다.
기억 속에서 박서원이 쌍둥이에게 눈앞에서 죽는 건 힘들 거라는 이야기가 이거였다.
복수에 인생을 바친 것 자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하고 싶은 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솔직히 제정신이냐고 하고 싶었는데 겨우 참았다.
……참을 이유가 있나?
“제정신입니까?”
구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닐 이유가 있나.”
“전부요.”
“가족 잃은 사람을 조롱하는 건가?”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렇게 따지면 저도 가족을 잃었거든요.”
얼굴이 따갑다. 쌍둥이가 굉장히 띠꺼운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내 정체에 대해 의심하고 있으니 별수 없다 싶다가도, 미치고 팔짝 뛰는 건 이쪽이라는 생각에 억울해졌다. 누군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줄 아나? ‘정해준’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든 어쨌든 간에 나는 영문도 모르고 여기에 끌려왔다고!
구민석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눈이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거짓말을 하면 필시 저 여우는 알아차린다.
“……그렇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내뱉은 말 중 거짓말이 없는지 잠깐 되짚어 보았다.
조금 걸리는 말은 있어도 거짓말하진 않았다. 이곳에 와서 내 가족이 순식간에 사라진 건 사실이기도 했고.
“그것도 그렇지.”
구민석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내 아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런 미친 짓거리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네.”
아들을 죽인 인간 부부의 아들로 살고 있는 주제에 그런 말 하면 퍽이나 믿겠다.
문득 구민석의 아버지, 그러니까 단청 회장이 간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게 떠올랐다. 원래 여우는 간 빼 먹는 요괴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혹시 단청 회장이 하필 간암에 걸린 게…….”
“인간의 생로병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건 내가 꼬리 아홉 개였을 적도 힘든 일이네!”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잖아. 내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구민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우리 여우가 간을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먹을 거라면 거길 병에 걸리게 하겠는가? 인간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만 하는지…….”
구민석은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다가 구민석이 얼굴색을 싹 바꾼 채 재수 없게 웃었다.
“하여간, 우투리도 딱 적당한 타이밍에 각성해 주었고.”
너무 일찍 각성해 버리면 산함박과 부딪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쓸려 나갈까 봐 걱정했다고 덧붙였다. 친구 일 때문에 한창 들쑤시고 다녀서 막는다고 힘들었다며 과장스럽게 한숨도 내쉬었다.
……퍽이나 걱정했겠다.
“여의주를 모으는 일이나, 업을 쌓는 일도 순조롭고.”
지금이라도 손요운과 친하게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만약 정말 ‘이곳’의 시간이 돌아간 것이라면 그 일과 관련이 있을 게 확실한 악당 옆에 붙어 있는 게 맞긴 하다. 그래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사고가 날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저 얼굴을 보면 역시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싶다. 너무 전형적인 악당 얼굴이지 않은가.
“서원 씨는 이제 자잘한 걸 신경 쓸 여력은 없고, 그 외 사소한 일은 나와 쌍둥이, 무당이 해결하기로 했거든.”
“……그렇습니까.”
“천 년 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한반도에 용도 거의 남지 않아 우리 일에 초치기도 무리지.”
구민석은 여유로운 얼굴로 팔짱을 꼈다.
“해준 씨 같은 사소한 일에 신경 쓰기에는 대기업 부회장이라는 직함이 너무 바쁘지만……. 한배에 탄 멍청이들의 부탁이 있어서 말이지.”
구민석의 눈이 쌍둥이를 스쳤다.
“그래서 무당에게 시킬 걸 내가 왔다네.”
시간이 많다는 소리를 거창하게도 돌려 말한다.
“속에 있는 게 잡귀가 아니라 본인 말대로 정해준이라 치면.”
구민석은 내 왼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해준 씨는 그걸 가지고 뭘 하고 싶나?”
침을 꿀꺽 삼켰다. 거짓말은 할 수 없다.
“저는, 찾고 있습니다.”
“찾고 있다, 라? 무얼?”
하지만 세상에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도 진실을 숨길 수 있는 방법이 많다.
내가 여태 이곳에서 지내 왔던 것처럼.
“요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요.”
요괴와 영물, 초능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나의 세상’.
이곳에 사는 선량한 사람들이 ‘15화’ 때 죽도록 내버려 둘 순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곳에 평생 있을 생각은 없다.
16화의 내용이 해피엔딩이거나, 혹은 배드엔딩이라 하더라도 ‘드라마’의 내용을 돌파할 단서는 있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
어차피 내가 이곳에 오면서 ‘정해준’이 있던 기존의 ‘이 세계’와는 흐름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단서가 필요하다.
오늘에게서 박서원이 헛짓하지 않도록 한 번은 말려 달라고 부탁도 받았고.
나는 한 번 더 강하게 말했다.
“요괴와 영물, 초능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찾고 있습니다.”
* * *
한진열은 전화기를 붙잡고 쩔쩔매고 있었다.
“어, 평화야……. 아니, 그러니까아…….”
증손녀에게 혼나는 할아버지의 등은 작았다.
한평원은 한진열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허허, 웃고 있었다. 나는 한평원의 옆에 앉았다.
“왜 저러고 있습니까?”
한평화가 동생의 안위를 극성맞게 걱정하는 사실이 말을 내뱉자마자 떠올랐다. 한평원이 어색하게 웃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괜찮으시고요?”
“아, 네. 강원도에서 TV 보시고 좀 놀라셨던 모양인데, 원래 머리 아홉 개 달린 놈보다 더한 걸 잡고 사시던 분이라…….”
그 말에 나는 다시 한진열을 보았다.
“평화 씨가 더 놀란 모양인데요?”
“뭐…… 그렇죠……. 전 싸움에 안 끼었다는 데도 그러네요.”
오히려 최전선에서 뛰었던 한진열이 다치면 더 다쳤지. 한평화에게는 무식하게 몸만 튼튼한 증조할아버지는 어떻게 됐든 좋았던 것 같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한진열의 휴대폰에서 새어 나오는 한평화의 목소리가 주장하는 말이었다.
“평원이가 안 다치게 잘 했어야지!!!”
“그러니까 평원이는 안 다쳤…….”
“평원이 다치면 어쩔 거야!!!!”
“할아버지도 거기에 그런 놈이 나올 줄은 몰랐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장에 있던 초능력자는 모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래서 한평원도 환자복을 입고 있긴 했었다.
“내 동생 다치면 할아버지 다시는 안 볼 거야!”
“펴, 평화야,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말자, 응?”
나는 한진열에게서 관심을 끄고 한평원에게 물었다.
“손요운 씨는 어때요?”
광장에서 날개를 집어넣는 것까진 보았다. 우투리는 아주 훌륭하게 진화했다. 도대체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물도 인간으로 둔갑하는 세상인데, 뭘. 놀랄 것도 없지.
그래도 커다란 날개 때문에 옷이 찢어졌긴 하지만 그건 구두 장군 때문에 광화문 광장을 뒹굴 때부터 찢어져 있었다.
“요운 형이요?”
봉황의 날개를 단 전설 속의 영웅의 등장에 시끄러울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TV에서 우투리 이야기는 쏙 빠져 있었다.
그 얘길 슬쩍 하자 한평원은 말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투리는 여태 안 좋게 끝났다잖아요? 널리 알리는 건 안 좋지 않겠냐고 다흰 누나가 그래서요.”
서다흰이 구구절절 옳은 말을 했다.
사회가 바뀐 만큼 우투리가 옛날처럼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인간 사회는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법. 아사달 사건 때 돌탑을 무너뜨린 놈을 봐라. 사람이 언제 어디서 악의를 품게 될지는 하늘도 모른다.
여우가 속셈이 있던 만큼 어련히 알아서 잘 막을까 하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도 그렇겠군요.”
“진열이 형도 그게 나을 거라고 해서……. 임 팀장님이 힘 좀 써 주셨죠.”
“임 팀장님이요?”
“현장에서 뛰어다니시긴 해도 임 팀장님 권한이 꽤 세잖아요. 자기가 알아서 통제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설마 임 팀장도 여우인 건 아니지?
물론 그렇다면 한진열이 못 알아차릴 리가 없지. 인간은 맡지 못할 거라고 했던 제천대성의 복숭아 저주 냄새나 다리화의 여의주 냄새도 알아차렸던 한진열의 코다.
“그렇잖아도 이번 사태 때문에 일이 많을 텐데 신경 써 주셔서 고맙죠.”
한평원은 선량하게 웃었다. 내가 이런 놈을 두고 사이코패스니 뭐니 생각했던 게 조금 미안해졌다.
이쪽은 내가 살던 세계와 다르고, 당연히 사람들도 다르다. 일어난 일이 다르기 때문에 사회 구조도 다를 수밖에 없다. 초능력자들이 목숨 걸고 요괴를 잡는 것처럼 요괴대책팀의 공무원들도 목숨 걸고 현장에 나온다. 후방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기는 하다.
이런 사람들이 ‘이 세계’에 많은 것은 그만큼 산함박의 영향이 큰 것일까? 아니면 ‘빌더쓰’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드라마였던 것일까?
그래 봤자 그게 빌어먹을 ‘드라마’를 따라가는 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